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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에 멈춰 선 ‘불도저’

촛불에 멈춰 선 ‘불도저’

▶쇠고기 재협상을 요구하는 시민들(왼쪽)과 이 대통령.

이명박 대통령의 리더십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린다. 구세주형 리더로 박수 받던 때가 불과 엊그제였다. 정치학자 넬슨(Nelson)에 따르면 구세주형(Savior model) 대통령은 고난의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처럼 국익을 위해 헌신하는 좋은 지도자인데 반해 지금 이 대통령은 이와는 한 참 멀어 보인다. 세계도 깜짝 놀랄 만한 유례 없는 최장기 가두 촛불시위 현장에 등장하는 구호들과 피켓을 보면, 이 대통령을 겨냥한 험악한 문구를 차마 지면에 옮기기 어려울 정도다. 더 비참한 지도자는 잠깐 방심하다가 머리털을 깎여 힘을 못쓰게 된 삼손형(Samson model)이다. 이 대통령은 하루빨리 이 위험 모델에서 벗어나야 한다. 6·10 항쟁 21주년 기념일인 지난 6월 10일 서울 광화문 프레스센터 20층. 미국, 영국, 일본, 중국 등 외신기자 30여 명은 두 시간 넘게 진행된 외부 전문가 초청 기자간담회에서 연사의 답변이 시원치 않은 듯 세 가지 질문을 거듭 물었다. “촛불시위의 진짜 원인은 뭐라고 생각하나?”“촛불시위의 끝은 어디인가?” “이명박 대통령은 반전의 기회를 잡을 건가?” 심지어 “이 대통령이 임기 5년을 제대로 채울 수 있겠느냐”는 질문까지 나왔다. 위의 질문들을 하나로 정리하면 결국 ‘이명박 리더십의 추락 요인은 무엇인가?’로 귀결된다. 이명박 정부는 확실히 위기에 놓여 있다. 이 대통령의 지지도는 비슷한 시기 김영삼 전 대통령의 90%대, 김대중 전 대통령의 80%대, 노무현 전 대통령의 70%대와 현격한 30%대로 뚝 떨어졌고 급기야 6월 중순에는 10%대까지 폭락했다. 역대 대통령의 지지도가 갈수록 낮아지는 미끄럼틀 현상을 감안한다고 해도 그 낙폭이 지나치게 커보인다. 2007년 대선 당시 일부 언론이 대선 주자들을 동물에 비유하면서 이 대통령을 ‘뚝심 좋고 생산력 왕성한 멧돼지’로 묘사한 적이 있는데, 현재 상황은 “제 힘만 믿고 밀어붙이다가 덫에 걸린” 신세가 되어버린 듯하다. 위기는 전방위로 다가오고 있다. 우선 네티즌을 중심으로 하는 정권퇴진운동 조짐이다. 인터넷상에는 ‘아고라당’ ‘촛불당’이 만들어져 네티즌의 정치세력화를 이루며 직접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나섰다. 게다가 광우병 국민대책회의는 공기업 민영화, 교육 개혁, 대운하 건설 등 이명박 정부의 개혁과제에 대해서도 반대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국내외 경제상황도 험악하다. 화물연대 파업으로 인한 물류 대란, 10년여 만에 처음으로 44.5%(전년 동월 대비)에 달하는 수입물가 상승률, 원유 등 원자재 가격 상승 등이 발목을 잡는다. 여권 내 파워게임도 간단치 않다. 이 대통령이 최근 “묻지마식 인신공격이 걱정스럽다”고 말했는데, 이는 뒤집어 말하면 지금 정치권에는 묻지마식 인신공격이 난무하고 있다는 고백이나 다름없다. 전쟁터에서 가장 무서운 적이 자중지란이라고 한다면 최근 정두언 의원(한나라당)을 중심으로 하는 한나라당 쇄신파동은 이명박 정권의 중심부를 뒤흔들고 있다. 당면한 위기는 이 대통령이 자초한 측면이 있다. 사태의 본질은 대통령의 리더십이라는 뜻이다. 지금 이 대통령은 자신이 지닌 리더십의 장점은 부각되지 않은 채 단점만 크게 부각되는 상황이다. 특히 이 대통령의 트레이드 마크인 CEO형 리더십의 장점인 추진력과 성과중심주의는 온데간데없고, 성급함과 결과지상주의로 왜곡되어 나타나고 있다. 예컨대 MB 리더십의 장점인 뜨거운 열정은 과욕으로, 변화지향성은 변화무쌍함으로, 성과주의는 절차 무시로 변질되면서 ‘MB=단기 성과에 급급한 나머지 절차와 과정을 무시하는 마이웨이형 지도자’로 비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 대통령은 과거 현대 신화나 청계천 신화와 같은 성공을 일궈내면서 얻은 강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국정을 야심만만하게 밀어붙였다가 벽에 부닥쳤을 개연성이 높다. 차제에 이 대통령은 기업 경영과 국가 경영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확실히 인식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CEO 출신 국가지도자가 드물었고, 또 성공 사례도 적었다는 사실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230년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 대통령 43명 가운데 정통 기업가 출신은 1920년대 말 31대 대통령 후버 등 손에 꼽을 정도이고, OECD 국가 중에서 지난 30년 동안 기업가 출신 대통령이나 총리를 배출한 나라는 이탈리아, 태국, 페루 등 5∼6개 국가에 불과하다. 역설적이지만 CEO 출신 대통령이 성공하려면 CEO 마인드를 국가 경영에 그대로 적용하면 안 된다. 이 대통령의 또 다른 위기요인은 정치사회적인 페러다임의 변화다. 국민은 많이 변했다. 무엇보다 자아의식이 강해졌고 경제제일주의적 성향이 짙어졌다. 대한민국이 선진국 대열에 접어들면서 국민의 개성과 자존심이 과거보다 훨씬 고양돼 국가적 현안, 특히 자신의 건강이나 민생 관련 문제에 대해서는 언제 어디서든 거침없이 자기 목소리를 낸다. 새 대통령에게 예전처럼 달콤한 허니문 기간을 주거나 관망 기간을 거치지 않고, 필요하면 곧바로 자기 의사를 분출해낸다. 한마디로 대통령 해먹기 어려워졌다. 경제제일주의 즉, 국민의 경제발전 희구심리가 매우 강해진 점도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과거에는 민주화와 정치개혁이 화두였지만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경제발전과 민생이 최대 화두로 떠오르면서 국민은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가차없이 회초리를 든다. 이처럼 이 대통령은 자신의 리더십 탓도 있지만 정치사회적인 패러다임 변화로 인해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비판에 직면한 것 같다. 위기의 핵심 요인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청와대 참모진 문제다. 이명박 정부의 청와대는 집권 초부터 노무현 정부의 아마추어리즘 못지않게 무능, 정무기능 취약, 홍보역량 부족 등의 질타를 받고 있다. 청와대는 단순히 대통령의 참모조직이 아니라 국정의 컨트롤 타워라는 점에서 국정운영의 중심축이 고장 난 셈이다. 청와대의 무능론은 언론이나 야당보다 오히려 여권 내부에서 강하게 제기되었다는 점에서 심각성이 더하다. 대통령의 부족한 리더십을 보완하고, 정치사회적인 패러다임 변화에 효율적으로 대응해야 할 국정운영의 컨트롤 타워에 ‘빨간 불’이 켜졌으니 국정이 제대로 돌아갈 리 만무하다. 위기에 처한 이 대통령이 요즘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최근 미국의 부시 대통령을 비롯해 프랑스의 사르코지 대통령, 영국의 브라운 총리, 일본의 후쿠다 총리 등 서방국가 지도자들의 지지율 하락 현상이다. 지지율이 뚝 떨어진 부시 대통령은 최근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덤벼보라고 해”(bring them on), “죽이든 살리든”(dead or alive)과 같은 격한 표현을 구사했던 것을 후회하면서 자신이 과도하게 호전적 지도자로 비친 데 대해 반성하기도 했다. 사르코지 대통령은 집권 초기 개혁성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사생활 논란과 좌충우돌하는 정책으로 국민으로부터 비판을 받는다. 지지율이 10%대에 머물며 야당과 국민으로부터 사면초가에 몰린 후쿠다 총리는 지난 6월 11일 사상 처음으로 참의원에서 문책 결의안이 가결됐는데도 버티고 있지만 정치적 사형선고를 받은 거나 다름없다. 지지율 하락으로 고민하고 있는 이들 서방지도자의 공통점은 ‘독선적인 스타일’과 ‘민심과의 괴리감’ ‘가벼운 언행’이다. 반면에 사회주의체제인 러시아의 푸틴 총리나 중국의 후진타오 주석은 국민정서에 부합하는 진중한 행보로 상대적으로 높은 지지율을 얻는다. 결론적으로 국가지도자가 국민의 뜻을 외면하고 혼자 밀어붙이거나 튀는 언행을 할 경우 국민은 고개를 돌린다는 교훈을 되새기게 한다.

▶경찰은 6월 10일 시위대의 청와대 행진을 막고자 컨테이너 박스를 세종로에 쌓았다.

정치컨설턴트로 유명한 딕 모리스는 집권 초기 국민은 가볍고 개방적인 ‘친구 같은 대통령’보다는 듬직하고 진중한 ‘아버지 같은 대통령’이나 ‘맏형 같은 대통령’의 이미지가 더 적합하다고 강조했다. 이는 국민이 자유분방하고 투박한 지도자보다는 절제되고 세련된 지도자를 원한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정치심리학자 라스웰의 유형에 따르면 현 시점에서 우리 국민은 자기 현시욕이 강하고 휘황찬란한 선동가형 지도자보다는 자기절제가 뛰어나고 담백한 행정가형 지도자를 선호하는 것 같다. 행정가형 지도자는 ‘정치’보다는 ‘경제’나 ‘민생’에 비중을 두는, 합리적이고 점진적인 정책관리자형에 해당한다. 이 대통령이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는데 가장 절실한 덕목은 겸허함이랄 수 있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는 겸손이어야 한다. ‘행동하는 겸손’은 다소 추상적으로 비칠지 모르지만, 뿔난 민심을 하루빨리 가라앉힐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만약 길거리에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대통령이 진정으로 반성한 것 같은가?”라고 물었을 때 “그렇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많으면 위기를 극복하겠지만, “아직 멀었다”고 대답한다면 위기는 지속될 것이다. 겸허함과 함께 둘째로 필요한 것은 포용력의 발휘다. 이 대통령은 국정쇄신 과정에서 ‘고소영 참모’나 ‘강부자 내각’과 같은 편향인사 시비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탕평인사를 단행하고, 박근혜 전 대표와 손학규·이회창 등 정치권 지도자들과의 관계에서도 ‘소통하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이 대통령은 2007년 대선에서 530만 표라는 큰 표차로 당선되었던 ‘메이저 대통령’(major president)인 동시에 63%라는 저조한 투표율로 당선된 ‘마이너 대통령’(minor president)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셋째로 안정적인 지도자의 면모다. 이 대통령은 지난 대선에서 BBK, 땅투기 의혹 등 불안요인들이 많았지만 경제능력을 인정받아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런데 임기 100일이 지나도록 경제지도자로서의 활약상은 보이지 않고 인사 실패, 대운하 공방, 쇠고기 파동 등 불안요소들만 잇따라 터져나오니 국민은 참았던 분노를 터뜨린 것이다. 이 대통령이 ‘안정적인 지도자’의 면모를 보여주기 위해 각별히 신경 써야 할 것은 언행의 절제력이다. 이 대통령은 호방하고 활발한 외향형이기 때문에 말과 행동에서 거침없고 직설적인 경향이 강해 불필요한 구설에 오를 소지가 많다. 특히 국가지도자의 말투는 사소한 것 같지만 국민정서에 직접적이고도 빠른 속도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이 대통령은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의 메시지 기법을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 대통령처럼 뜨거운 열정과 넘치는 의욕으로 강력한 정책드라이브를 주도하는 과정에서 비판이 적지 않았지만, 노변정담이나 정례 기자간담회와 같은 지속적이고 성실한 국민과의 소통을 통해 광범위한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한 손에는 추진력의 무기를, 다른 한 손에는 겸허함의 미덕을 들고 성공한 지도자가 된 것이다. 이대통령은 이 시점에서 CEO는 단순히 Chief Executive Officer(최고경영자)의 약칭이 아니라 Communication(소통)+Economy(경제)+Open mind(포용력)의 합성어라고 생각할 때 국정의 해법이 보일 것이다. [필자는 시사저널 정치팀장과 대통령 국정홍보비서관실 국장을 거쳐 대통령리더십연구소 소장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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