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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 숙인 독재자들

고개 숙인 독재자들

▶무가베의 폭력 성향은 1983년부터 그 모습을 드러냈다.

아프리카 국가에서 수백 명이 숨지는 부정선거가 자행돼도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하물며 이웃나라 지도자들이 비난을 퍼붓는 모습을 보기도 어려웠다. 자이레의 모부투 세세 세코와 우간다의 이디 아민 시절엔 대량학살이 예외적이기보다 오히려 보편적인 일이었다. 14년 전 르완다도 그랬고, 가까운 과거엔 콩고와 수단이 그랬다. 대다수 아프리카 지도자는 같은 처지의 동료를 대놓고 비난하기를 꺼려해 조심스레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그 뒤로 아프리카가 많이 변했다. 로버트 무가베라면 옛날이 좋았다고 여길 법도 하다. 대통령 결선투표(무가베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이기겠다는 각오다)를 앞두고 짐바브웨 전국에서 폭력사태가 터지자 비난의 목소리가 요란하다. 호세 도스 산토스 앙골라 대통령 같은 마르크스주의 혁명동지들, 자카야 키퀘테 탄자니아 대통령 같은 옛 지지세력 등 대다수 이웃나라 지도자가 무가베가 6월 27일 결선투표를 피에 물든 코미디로 변질시킨 데 혐오감을 표명했다. 다른 아프리카 지도자를 꾸짖지 않기로 이름 난 넬슨 만델라조차 정도가 심하다고 판단했다. 6월 25일 90회 생일잔치를 빌려 그는 짐바브웨에서 일어난 “지도력의 비극적 실패”를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만델라가 굳이 이름을 대지 않았지만 누구 이야기인지는 뻔했다. 이처럼 전례 없는 비난 일색은 그만큼 무가베의 악행이 심하다는 증거다. 인권운동가들에 따르면 6주 선거유세 기간에 적어도 80명에서 많으면 500명의 야당인사가 집권당이 동원한 폭력배들에게 살해됐다. 희생자 중엔 야당인 민주변화운동(MDC) 소속인 수도 하라레 시장의 부인도 있다. MDC는 지도자 모건 츠방기라이가 네덜란드 대사관으로 피신하자 선거를 며칠 앞둔 시점에서 투표 불참을 결정하고 더 이상의 선거운동은 지지자들만 희생시킨다고 판단했다. 츠방기라이는 본지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무가베가 지난 3월 1차 투표에서 과반수 의석을 석권한 자기네 당을 상대로 폭력적인 선거운동을 치르고 있다고 비난했다. “우리 당 의원들은 대부분 숨거나 국외로 떠났다”고 그가 말했다. 무가베의 폭정이 계속되면서 가뜩이나 절박한 경제위기가 심화됐다. 지난 2월 16만5000%를 넘어 이미 세계 최고를 기록한 인플레이션(로이터 통신 보도)이 최근엔 무려 3000만%(하라레의 파이낸셜가제트 보도)를 기록했다. 빵 한 조각이 암시장에서 짐바브웨 돈 35억 달러에 거래된다. 하라레 주재 미국 대사 제임스 맥기의 표현을 빌리면 “무가베는 짐바브웨를 남아프리카의 곡창지대에서 최빈국으로 전락시켰다.” 그래도 이 정도론 아프리카인들이 왕년의 혁명영웅을 경멸하는 이유가 모두 설명되지 않는다. 사실 무가베의 폭압적 태도는 새삼스러울 게 없다. 대통령에 처음 당선된 1980년 지미 카터가 “주목할 세계 지도자”라고 치켜세우긴 했어도 그는 우호적인 언론의 표현처럼 결코 모범시민이 아니었다. 1979년 옛 로데시아의 백인정권을 무너뜨린 뒤 지도자 이언 스미스를 포함해 백인들에게 놀라울 정도의 관용을 베풀었다. 그러나 1983년엔 짐바브웨아프리카민족연맹-애국전선(ZANU-PF)이 “영원히 통치하는” 1당 국가의 꿈을 천명하고 이내 정적들의 학살에 착수했다.

▶구미의 외교관들은 폭력배들이 대통령 결선투표에 불참한 사람들을 보복해 난민이 늘지 않을까 우려한다.

변한 것은 아프리카다. 미 국무부에 따르면 지난 4년간 아프리카 대륙에서 각종 민주선거가 50회 이상 실시됐다. 시에라리온, 라이베리아, 모잠비크가 최근 비교적 공정한 총선을 실시했고, 말 많던 케냐의 선거도 결국 민주정부를 선택했다. 프리덤하우스는 사하라 사막 이남 전체 국가의 4분의 3 가까이를 “자유” 또는 “부분적 자유”로 분류했다. 1990년엔 절반이 채 안 됐다. 민주주의가 성숙하면서 혁명동지들의 유대감은 시들해졌다. 아프리카의 거물들이 어깨를 맞대고 제국주의에 맞서 죽기 살기로 투쟁을 벌이던 시절은 지나갔다. 짐바브웨 대학에서 정치학을 가르치는 존 마쿰베 교수는 무가베가 동맹을 무너뜨리는 “생각도 못할 짓을 저질렀다”고 말했다. “다른 아프리카 지도자의 뒤에서 굳게 단결하던 국가원수들의 관행이 무너지는 전례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코넬 대학의 아프리카 전문가 니콜라스 반데 왈은 이제는 무가베가 “비즈니스에 폐해가 된다. 이웃나라 보츠와나, 잠비아, 말라위의 관광산업을 망친다. 전 지역을 물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게다가 난민 문제도 있다”고 강조했다. 이 난민 문제가 이웃나라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14개국으로 이뤄진 남아프리카개발공동체(SADC)에는 아프리카에서 신생 민주주의가 가장 발달한 나라들이 있다. 그들이 특히 비난의 목소리를 높인다. SADC 의장인 레비 음와나와사 잠비아 대통령은 무가베의 행동 때문에 “창피해서 고개를 못 들 정도”라고 말했다. 폴 카가메 르완다 대통령은 짐바브웨 대선이 “장난”이라고 말했다. 르완다는 특히 짐바브웨와 크게 대조된다. 무가베의 옛 아프리카를 제치고 새로운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나라가 됐다. 카가메는 이견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간혹 듣지만 1994년 하마터면 나라를 분열시킬 뻔했던 유혈 민족분쟁을 종식시키는 데 성공했다. 정보통신 경제를 건설해 지난해 GDP 6.3% 성장이라는 인상적인 업적을 이뤘다.

▶짐바브웨 방켓에서 열린 무가베 대통령의 선거 유세에서 지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무가베의 고립이 깊어지면서 다른 한 지도자의 이미지도 함께 추락한다. 타보 음베키 남아공 대통령이다. 음베키는 MDC에게서 짐바브웨 사태를 중재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지만 옛 동지의 비난대열에 동참하길 거부했다(나미비아와 말라위도 입을 다물었지만 국력 차원에서 볼 때 별 의미가 없다). 음베키는 침묵을 고집함으로써 국내외의 평판에 손상을 입었다. 남아공 국내 여론은 무가베에게 불리하게 돌아간다. 특히 300만~400만 명에 이르는 짐바브웨 난민 행렬이 큰 원인이다. 음베키 소속당인 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 총재 자콥 주마는 짐바브웨 상황이 “통제불능”이라고 말했다. 그 나라의 노조들이 물품의 국내 반입을 봉쇄하고, 한때 무가베를 혁명동지로 옹호했던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는 최근 그를 가리켜 “일종의 프랑켄슈타인”이라고 비난했다. 6월 23일 유엔 안보리는 남아공의 동의를 얻어 무가베의 결선투표를 비난하고 1차 투표의 결과를 존중하라고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유엔이 무가베를 비난하고 나선 것은 처음이다. 음베키가 무대응으로 일관하면서 가뜩이나 더럽혀진 평판에 더욱 손상이 갔다. “아프리카를 중흥한다고 좋은 구상을 많이 내놓은 사람의 얼굴에 끔찍한 오점이 묻었다”고 외교관계위원회의 미셸 개빈이 말했다. “이제는 가혹한 독재자를 밀고 다른 나라를 완전히 망가뜨린다는 인상을 준다.” 남아공의 작가 겸 언론인 사샤 폴라코-수란스키는 “음베키가 좀 더 강력 대응하기를 거부하면서 세계인들의 눈에 남아공 정부의 신뢰도가 크게 떨어지고 이 지역에 지도력 공백이 생겼다”고 말했다. 음베키가 허송세월 하는 동안 짐바브웨는 불타 오른다. 하라레의 서구 외교관들은 선거 이후에도 “잉크 묻은 손가락 작전”의 일환으로 폭력사태가 지속되지 않을까 걱정한다. 정부 측 폭력배들이 투표에 불참해 그 증거인 잉크 자국이 없는 유권자들을 공격 목표로 삼는 작전이다. 투표일을 앞두고 MDC 당원들은 계속 도망을 쳤다. 상당수가 남아공 대사관에 피신하거나 많은 일반인을 따라 국경을 넘었다. 이 난민들은 음베키가 무가베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기로 마음먹을 경우 이용할 수 있는 한 가지 지렛대를 확실하게 가리킨다. 남아공은 내륙국가인 짐바브웨의 국경선을 봉쇄하고 전력 공급을 끊을 수 있다. 그러지 않으면 무가베가 여전히 권좌를 지킬 것 같아 보인다. 그는 현대 아프리카에는 설 땅이 없는 구시대적 인물이다. 그러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기에 앞서 수많은 동포를 물귀신처럼 함께 데리고 갈지 모른다.


With ROD NORDLAND in Harare, and ANDREW BAST and BARRETT SHERIDAN in New Y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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