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의 신앙 오디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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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가 쓴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은 젊은 시절의 영적 탐구와 가족을 찾으려는 갈망을 담고 있다. |
1981년 버락 오바마는 스무 살의 컬럼비아대학 학생으로 삶의 의미를 찾고 있었다. 그는 풋내기와 완숙함, 흑과 백, 도시와 시골, 경이와 비극 사이에서 방황했다. 뉴욕의 컬럼비아대학 진학은 자신의 과거로부터 벗어나는 의미도 있었다. 하와이에서 고등학교를 나와 2년 동안 LA의 옥시덴털 칼리지에서 지낸 직후였다. 그는 LA에서는 “삶을 즐겼다”고 말했다. 하지만 뉴욕에 와서는 “고행 생활을 했다”고 오바마는 지난주 유세용 전용기에서의 인터뷰에서 뉴스위크에 말했다. “영적인 탐구를 했다. 의도적으로 속세와 담을 쌓았다.” 단식도 하고 며칠씩 대화를 하지 않는 묵언 수행도 했다. 그때는 책이 유일한 벗이었다. 4세기 북아프리카의 주교로 서양 최초의 신앙 회고록을 썼으며 기독교의 신학적 기초를 닦은 성 아우구스티누스, 19세기 독일 철학자이자 실존주의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니체, 타협과 양면가치 그리고 고통으로 가득한 단편소설을 쓴 영국인 가톨릭 신자 그레이엄 그린 등. 오바마는 이들의 삶을 돌아보며 그들과 정신적으로 교감했다. 일요일 아침 초조하고 불안할 때면 뉴욕 할렘의 흑인 교회 아비시니아 침례교회에 나갔다. “그냥 뒷자리에 앉아 성가대의 찬양과 설교를 들었다.” 오바마는 그 ‘광야’에서 보낸 젊은 시절을 기억하며 미소를 머금었다. “찬양을 들으면서 억눌린 감정이 풀어져 눈물을 흘린 적도 있다.” 오바마는 공인으로서의 삶에서 종교의 중요성을 열정적으로 자주 언급했다. 그러나 지지자들의 감정이 상하지나 않을까 조바심을 내는 여느 정치 지도자처럼 그도 자신의 신앙을 되도록이면 드러내지 않았다. 특히 신과 기도, 구원과 개인적 책임의 관계에 관해서는 말을 아꼈다. 어떤 면에서는 이해가 된다. 오바마의 신앙 여정은 정통적인 것이 아니며, 정치적으로 문제 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오바마는 기독교 모태 신앙을 가졌지만 회의를 가진 어머니와 이슬람 신자에서 무신론자로 변한 아프리카의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 뒤 오바마는 세계 여러 곳에서 성장하면서 다양한 종교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이렇다 할 신앙은 없었다. 이제 그는 기독교인으로 거듭났다. 1990년대 초 시카고 트리니티 그리스도 연합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오바마의 신앙에 관한 소문은 끊이지 않는다. 뉴스위크 조사에서 유권자의 12%는 그가 이슬람 신자라고 잘못 알고 있었다. 25% 이상은 그가 이슬람 가정에서 성장했다고 믿었다. 오바마가 세례를 받은 과정도 문제의 소지가 있다. 세례를 받을 당시 트리니티 교회의 선임 목사는 제러미아 라이트였다. 지난봄 수주 동안 케이블 TV는 라이트 목사의 ‘미국을 저주하는’ 설교를 방영했다(라이트 목사는 지난 3월 트리니티 교회 설교에서 인종 문제를 거론하며 미국 정부가 흑인 사회의 에이즈 확산을 방조했고, 미국의 국외 군사 행동이 테러를 자초했다는 이른바 ‘갓댐 아메리카’ 발언으로 논란을 빚었다). 올가을에도 그 비디오가 다시 등장할 게 뻔하다. 뉴스위크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거의 절반은 오바마가 적어도 어느 정도는 라이트 목사와 같은 생각을 가진 듯하다고 말했다. 라이트 목사 때문에 미국 대선 결선에서 오바마를 찍지 않을지 모른다고 말한 응답자도 거의 3분의 1이나 됐다. 오바마의 신앙 이야기는 어머니 앤에서 시작한다. 미국 중서부에서 기독교인이었지만 신앙심이 깊지 않았던 부모 아래서 성장한 앤은 모든 종교를 넘나들었지만 어느 하나를 잡지 못하고 세계 곳곳을 전전했다. 앤이 좋아하는 책 중 하나는 ‘신화의 힘(Joseph Campbell and the Power of Myth)’이었다고 오바마의 배다른 여동생 마야 소에토로-응이 뉴스위크에 말했다. 종교와 신화의 공동 주제를 탐구하는 조셉 캠벨과 빌 모이어스의 PBS 인터뷰 녹취록을 엮은 책이다. 가족이 인도네시아에 살 때 앤은 가끔씩 자녀들을 성당에 데려갔다. 하와이로 돌아온 뒤에는 그리스도 연합교회에 나가 부활절과 성탄절을 지켰다. 나중에 앤이 마야와 함께 인도네시아로 돌아갔을 때 오바마가 그들을 만나러 갔다. 그때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큰 불교 사원 중 하나인 보로부두르로 오바마를 데려갔다. 앤은 나중에 인도에서 일할 때 한동안 불교 수도원에서 생활했다. 앤이 신을 믿었을까? 오바마는 어머니를 “불가지론자”라고 불렀다. “더 높은 힘을 믿었다. 우주의 기본 질서와 선을 믿었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아인슈타인의 생각에 공감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하나의 종교가 진실을 알려준다는 생각에 큰 회의를 품었다.” 오바마의 아버지는 케냐에서 이슬람 신자로 성장했다. 그러나 앤을 만났을 때는 이미 “확고한 무신론자”였다. 오바마는 ‘담대한 희망(The Audacity of Hope)’에서 아버지는 종교를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으로 보았다고 적고 있다(아버지는 오바마가 두 살 때 집을 떠났다). 오바마는 인도네시아에 살던 시절 가톨릭 학교에 입학했다. 그 다음 공립 초등학교에 들어가 일주일에 한 번씩 주로 이슬람 문화를 소개하는 종교 교육을 받았다. 그는 계부의 손에서도 자랐다. 계부의 이름은 롤로였다. 오바마는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Dreams From My Father)’에서 이렇게 회상했다. “계부는 이슬람 신자였지만 대다수 인도네시아 사람처럼 고대 정령신앙과 힌두교를 수용했다. 그는 사람은 먹거리에 따라 운명이 달라진다고 말했다.” 롤로는 어린 오바마에게 개고기, 뱀고기, 구운 메뚜기의 맛을 보여줬다. 인도네시아에서는 히잡을 쓴 여자도 있고 쓰지 않는 여자도 있으며, 이슬람 신자들이 기독교인들과 사이 좋게 지냈다고 오바마는 말했다. 또 인도네시아의 이슬람 신자들 사이에서 살면서 “이슬람이 현대 세계와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오바마는 하와이에서 공부벌레였지만, 이미 그때부터 삶의 의미를 찾는 구도자였다. 그러나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은 그가 하와이에서 사춘기를 보내면서 여느 10대들처럼 음주와 흡연, 농구를 즐겼다고 적고 있다. LA의 옥시덴털 칼리지에서 보낸 2년 동안은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그 어떤 것에도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컬럼비아대로 옮긴 뒤에는 진지한 자세로 영적인 탐구에 들어갔다. 당시 오바마를 알았던 사람들은 그가 말수가 적고 수도승처럼 살며, 술집에 드나들고 사교생활을 하고 잡담을 즐기는 뉴욕 대학생들의 판에 박힌 생활에 흥미가 없는 청년이었다고 기억한다. 윌리엄 아라이자는 4학년 때 오바마와 정치학 세미나에 참석했다. 그는 오바마가 모든 일에 별 관심이 없는 데 놀랐다고 돌이켰다. 의도적으로 냉담하다는 게 아니라 일반 대학생이 아닌 듯했다. 기숙사에서 살지도 않았고 캠퍼스에서 노닥거리지도 않았다.” 대학 졸업 후 오바마의 첫 직장은 뉴욕의 시장조사 업체인 비즈니스 인터내셔널이었다. 오바마의 동료였던 베스 노이머 리바인은 이렇게 돌이켰다. “젊은 싱글들이 가득했기 때문에 누가 누구와 연애를 하느니 말들이 많았다. 하지만 오바마는 초연했다. 아주 침착하고 성숙했다. 당시 난 스물셋이었는데 그 곁에 서면 나는 탈선한 기차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오바마는 그런 영적인 탐구가 두 가지 목표에 기초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마음의 고향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지역사회를 찾고 있었다. 혼혈아로 여러 곳을 돌아다닌 어린 시절의 경험 때문에 그때 갖지 못한 소속감을 찾고 싶어 했다. 흑인 교회에 나가면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흑인 교회의 전통에는 아주 특별한 무엇이 있다. 그게 내게는 아주 큰 영향을 미쳤다.” 아비시니아 같은 교회의 열정적인 신앙과 가족 같은 분위기, 미래를 내다보는 설교 내용이 머릿속으로만 그렇게 살아온 청년 오바마의 마음을 끌었다. 오바마는 민권운동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사회 참여주의가 특히 종교와 연대하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매우 강하다는 사실을 독서를 통해 알았다. 제럴드 켈먼은 시카고의 지역사회 운동가로 오바마를 채용했을 때를 떠올리며 그 젊은이가 “갖가지 아이디어에 흠뻑 빠져 있었다”고 말했다. 오바마는 테일러 브랜치의 ‘물길을 가르다(Parting the Waters)’를 탐독했다. 민권운동의 역사서 겸 마틴 루터 킹의 자서전 격인 책이다. 시카고에서 오바마는 지역사회 운동가들이 신자들의 참여의식을 북돋우기 위해 진보적인 신학을 동원한다는 것을 알았다. 종교 지도자들은 폴 틸리치, 라인홀트 니부어 같은 청교도 신학자, 마틴 루터 킹, 그리고 흑인과 가톨릭 해방신학자들, 성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기독교의 아버지들의 저서를 사용해 원죄와 인간의 불완전성을 강조했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독립적인 개인이 아니라 믿음의 공동체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신자들이 행동을 통해, 이 세상의 종말이 올 때만이 완벽하게 실현될 완벽성을 추구하도록 서로 도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신학의 신봉자들은 자주 마태복음 25장을 인용한다.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다시 말해 모두가 구원의 역사에 매달려야 한다는 얘기다. 그 경험에서 오바마는 신앙과 사회 행동이 별개의 사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 신앙에 충실하면서도 나를 뛰어넘어 다른 사람에게 어떤 것이 좋을지 생각하지 않거나 도덕적이고 윤리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그는 말했다. 여기에 정서적인 소속감을 찾으려는 욕구가 합해지면서 오바마는 비로소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담대한 희망’에서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성령이 나에게 손짓하는 것을 느꼈다. 나는 주님의 의지에 복종했고, 그분의 진실을 발견하는 데 나를 바쳤다.” 그렇다면 그것이 예수님의 말을 듣는 순간 과거의 삶과 완전히 단절하는 회심일까? 아니다. 오바마는 이렇게 말했다. “순간적인 깨달음이 아니었다. 번개를 맞고서 ‘아! 그렇구나’라는 식이 결코 아니었다. 나의 깨달음은 서서히 왔다. 독서에 몰두하며 방황하던 뉴욕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뉴욕 시절 나는 내가 삶에서 찾은 의미, 내게 가장 중요했던 가치, 내가 가졌던 경이와 비극이 기독교 이야기에 모두 들어 있다고 판단했다.” 이런 판단이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에서 그가 말한 대로 돕고 싶은 사람들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실용적인 욕구에서 비롯됐을까? “신앙 공동체의 일부분이 되고 공개적으로 신앙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오바마는 말했다. 오바마가 진정 예수를 받아들인 곳은 논란이 되는 트리니티 그리스도연합 교회다. 모든 것이 맞아떨어진 상황이었다. “그 교회가 내가 원하던 바로 그런 공동체였다”고 오바마는 말했다. 무엇보다 트리니티는 신앙생활의 일부로 현실 참여를 촉구했다. 또 그곳은 가족 공동체였다. 신도들은 그 교회를 자기 동네라고 표현했다. 교인들은 매주 일요일 같은 교회에 나가 곁에 앉은 사람들을 알게 됐다. 누군가 아프거나 직장에서 승진하면 모두가 알았다. 오바마는 지역사회 운동을 하면서 제러미아 라이트 목사를 만났고, 둘은 친구가 됐다. 오바마는 “결혼 후 예배가 끝나면 라이트 목사를 집으로 초청해 닭고기 요리를 같이 먹으며 가족들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고 말했다. 라이트는 설교에서 가족과 결혼생활, 자녀 양육의 중요성을 자주 강조했다. 최근 아버지의 날 연설에서 오바마는 “아버지의 책임은 생명을 잉태시키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라이트의 말을 그대로 인용한 것은 아니지만 그 전제는 라이트 목사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바마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로 결심한 시점에서 나의 지성과 감성이 합쳐졌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한 믿음, 다시 말해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해 죽었고, 그를 통해 우리가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 그리고 선행을 통해 이 세상의 질서와 의미를 찾을 수 있고, 우리의 한계와 결점, 그리고 약점을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아주 강력한 힘이 됐다.” 마야는 어머니라면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오바마의 결심을 이해하고 인정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오빠와 달리 어느 하나를 선택하지 않고도 서로를 잘 대하고 봉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어머니는 늘 영적인 방랑자였다. 반면 오바마는 어느 한 가지 신앙을 선택함으로써 좀 더 확고한 목표를 가지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오바마는 시카고에서 지역사회 운동가로 잠시 일한 뒤 하버드 로스쿨에 진학했다. 몇 년 뒤 유망한 변호사로, 남편과 아버지가 되고 출세하겠다는 결의를 갖고 시카고로 돌아갈 때까지 트리니티 교회와 공식적인 관계는 없었다. 그때쯤 오바마는 세례를 받았다. 그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나의 신앙을 시험한” 유능한 교사들과 성경 공부를 했다고 말했다. 결혼 뒤 버락과 미셸(역시 어려서는 교회에 자주 나가지 않았다)은 자주 교회에 나갔다. 한 달에 두세 번은 됐다. 그러나 첫딸 말리아가 태어난 뒤에는 교회에 자주 나가기가 힘들었다. “갓난아기를 데리고 교회에 나가는 일은 정말 쉽지 않다”고 오바마는 말했다. “트리니티 교회는 늘 만원이어서 일찍 가야 자리를 잡는다. 특히 아침 예배에 가면 아주 힘들었다. 그래서 교회에 잘 나가지 못했다.” 연방 상원의원에 출마한 뒤 그의 가족은 몇 달씩 교회에 나가지 못했다. 딸아이들도 주일학교에 가지 않았다. 그의 가족은 식사 전에 기도를 했고 오바마는 아이들이 질문을 하면 종교에 관해 이야기했다. “나는 아이들에게 신앙을 강요해선 안 되면 내재된 호기심과 영성을 발현시켜야 한다고 믿는다.” 오바마는 심란한 가운데서도 신앙을 가지려 애썼다. 일리노이 주상원의원 시절인 1999년 그는 정통파 유대교도인 아이러 실버스타인과 같은 사무실을 썼다. 오바마는 실버스타인에게 음식에 관한 율법과 안식일에 금지되는 행동 등 정통파 유대교인에게 일상생활에 어떤 제한이 있는지 많이 물었다. “안식일에 내가 필요한 것이 있으면 버락이 대신 해줬다”고 실버스타인이 회상했다. “사무실 문이 전자식이었기 때문에 그가 대신 열어줬다. 사실 그런 것까지는 기대하지 않았다.” 오바마는 라이트 목사와 트리니티 교회에 등을 돌린 이후 다시 약간은 방황하고 있는 듯하다. 그는 라이트 목사라는 친구를 잃었고 트리니티 교회라는 제2의 고향을 잃었다. 하지만 그는 선거가 끝나기 전에는 새 교회를 찾아볼 생각이 없다. “우리 선거운동의 특수한 사정 때문에 어느 교회에 나가면 좋을지 알아보기에 적절한 시점이 아니다”고 오바마가 말했다. “트리니티 교회에서 일어난 일 때문에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이 주시 받는다.” 그럼에도 유세를 떠나서도 그의 영적인 탐구는 계속된다. 그는 매일 기도한다고 말했다. 특히 “수많은 나의 죄와 결점을 용서받고, 내 가족의 안전을 위해 기도한다. 또 거창하지 않지만 내 행동과 주님이 원하는 것 사이에 일치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내가 주님의 의지를 실현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기 위해” 기도한다고 그는 말했다. 때때로 저녁에 성경도 읽는다. “긴급한 현안에서 잠시 벗어나 삶을 반추할 시간을 갖기 위한 일종의 의식이다.” 지금 수많은 성직자와 친구들이 그를 위해 기도하고, 그에게 도움이 되는 성경과 유대교 율법 구절을 e-메일로 보내준다. 조지 W 부시의 대통령 취임식과 부시의 딸 제나의 결혼식에서 기도를 한 커비존 콜드웰 목사도 오바마를 위해 기도한다. 콜드웰은 오바마에 관해 이야기할 때면 감정을 잘 억누르지 못한다. 그는 오바마에게 “무엇에 대해 기도할까요?”라고 물으면 오바마는 늘 “아내와 딸들”이라고 대답하는데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결코 ‘나를 위해, 그리고 선거의 승리를 위해, 그리고 비방을 받지 않기 위해 기도해 달라’고 말하는 법이 없다. 그는 늘 ‘아내 미셸과 딸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말한다.” 그러나 오바마의 신앙을 비판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특히 복음주의자 중 일부는 오바마의 신앙이 현시대적 특징의 혼합물이라고 지적한다. 정통이 아니고, 규율이 없으며, 심지어 성실치 못하다는 것이다. 지난달 미국 복음주의 지도자 중 한 명인 제임스 돕슨 박사는 오바마가 “자신의 세계관과 자신의 어설픈 신학에 맞추려고 성서의 전통적 해석을 의도적으로 왜곡한다”고 비난했다. 이에 오바마 캠프는 신자들을 포용하고 가족의 가치를 옹호했을 뿐이라고 반박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아들 프랭클린 그레이엄은 최근 오바마에게 구원이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신약성서의 교리와, 다원주의와 다양성을 포용하려는 선거운동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지 물었다. 그레이엄은 오바마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뉴스위크에 전했다. “나의 속죄와 구원이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은 내 기독교 신앙의 기본이다. 하지만 나는 황금률(‘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을 확고히 믿는다. 그것이 내 신앙뿐이 아니라 나의 가치관과 이상, 그리고 이 세상에서 나의 경험을 떠받치는 기둥이다. 이전에도 나는 그렇게 말했다. 이 점과 관련해 복음주의자들이 의문을 갖는다는 사실을 나도 안다.… 내가 아는 한 기독교를 정식으로 받아들인 적이 없는 내 어머니가 지옥에 갔을까? 나는 그렇게 믿지 않는다.” 만약 오바마가 존 매케인 공화당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선출된다면 그 말이 정당화될지 모른다. 링컨과 제퍼슨 같은 역대 대통령들도 비정통파 기독교인이었다. 그리고 퓨 포럼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70%는 “다른 종교도 얼마든지 영생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말에 동의한다. “나의 믿음이 다른 기독교인들의 믿음과 일치하지 않을지 모른다”고 오바마는 말했다. 지난 3월 라이트 목사의 ‘갓댐 아메리카’ 비디오가 방송을 탔을 때 오바마는 인종에 관한 연설문을 썼다. 그래야 후보로서 살아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몇몇 사람은 그것이 인종 문제만이 아니라 신앙에 관한 연설이라고 생각했다. 오바마는 라이트 목사와 자신의 관계를 설명하고, 미국인들의 선의에 호소했다. 미국의 인종 문제가 “완벽하지 못한 인간으로서 우리가 가진 결점”이라며 라이트 목사의 실언을 인간으로서의 부족함으로 설명했다. 가톨릭 신자로 ‘당신이 구한 생명이 당신의 생명일지 모릅니다(The Life You Save May Be Your Own)’의 저자인 폴 엘리는 이렇게 말했다. “너무 기독교에 치우친 생각이었다. 우리가 맺는 대인관계는 전부 결함이 있고 우리 모두에게 문제가 있다. 인간관계를 단칼에 끊을 수는 없다. 다른 불완전한 인간과 함께 나아가야 하며 양쪽 다 완벽해야 한다는 주장에 저항해야 한다.” 라이트 목사는 한 달 뒤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 나와서 자신의 실언을 인종적인 측면에서 해명했다. 엘리는 그 뒤 오바마가 기독교인으로서 그와 절연한 것이 옳았다고 말했다. 오바마는 과연 인종에 관한 이야기를 신앙에 관한 이야기로 생각했을까? 지난주 유세용 전용기에서 오바마는 이렇게 말했다. “인종 문제는 우리 자신이 우리 형제자매들의 보호자라는 믿음에 대한 가장 혹독한 시험이다. 우리가 인종의 벽을 뛰어넘는 것이 그렇게 간단명료하다면 좋겠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그것은 고통스럽고 복잡한 과정이다. 바로 거기에 신앙이 개입돼야 한다.” 이제 미국 대통령 선거의 결선이 다가오는 시점에서 오바마는 그 복잡한 자신의 신앙 전부를 동원해야 할 것이다. 대통령 선거전의 막바지만큼 어렵고 복잡한 시기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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