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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품만 챙기고 “반품해 주세요”

경품만 챙기고 “반품해 주세요”

30대 남성 A씨는 홈쇼핑에서 노트북을 구입한 뒤 배송 예정일을 하루 넘겨 물건이 도착하자 구매의사를 취소하고 업체에 100만원의 보상을 요구했다. 그가 제시한 보상액의 근거는 택배 물건을 받기 위해 월차휴가를 낸 데 대해 연봉 1억원의 하루 치에 해당하는 금액과 정신적 피해보상액을 합한 것이다. 인터넷쇼핑몰에서 핸드백을 구입한 20대 여성 B씨는 자신이 산 물건과 똑같은 제품이 다른 쇼핑몰에서 더 싸게 판매되는 것을 알고 일부러 핸드백에 흠집을 낸 뒤 반품을 요구했다. 제품에 하자가 있을 경우 구매자가 배송비를 물지 않아도 되는 규정을 악용한 상습 반품이었던 것. 제품이나 서비스 하자를 빌미로 과도하게 보상을 요구하거나 경품만 챙기고 구매한 물건은 반품·환불하는 디지털 얌체 고객들 때문에 관련 업체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 지난 3월 대한상공회의소는 국내 대기업과 중소기업 300개사를 상대로 ‘기업의 소비자 관련 애로실태와 개선과제’에 대한 설문조사를 벌였다. 그 결과 소비자로부터 부당한 요구를 경험한 업체가 87.1%에 달했다. 이는 전년의 61.1%보다 증가한 수치다. 판매자와 고객이 직접 얼굴을 보지 않고 거래가 이뤄지는 인터넷쇼핑몰과 TV홈쇼핑에서 상습적 반품요구와 무리한 보상 등을 요구하는 일명 ‘디지털 얌체족’은 ‘소비자의 천국’이라는 미국에서도 골칫거리다. USA투데이 보도에 따르면 크리스마스나 추수감사절 같은 쇼핑시즌 후 반품으로 인한 미국 기업들의 비용부담액이 2007년 한 해만 37억 달러에 이르렀다. 대표적인 예가 매년 1월 열리는 미국에서 가장 큰 스포츠 행사인 수퍼보울(미식축구챔피언십) 대회를 앞두고 대형TV를 구입한 사람들이 시즌이 끝나면 텔레비전을 반품하는 것이다. 조은정 삼성전자 글로벌마케팅연구소 소장은 지난 4월 삼성경제연구소를 통해 디지털 얌체족과 관련한 동영상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디지털 얌체족은 얼리어답터형, 경품형, 행사형, 알뜰형으로 구분된다. ‘얼리어답터형’은 신제품을 남들보다 빨리 써 보고 싶어 서둘러 구입한 뒤 일단 사용해 보고 곧바로 환불이나 교환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경품형’은 경품을 주는 제품만 골라 구입한 뒤 경품에 당첨되지 않으면 주문한 물건을 모조리 반품하는 유형이다. 이들 가운데는 당첨 확률을 높이기 위해 여러 개의 가명을 사용해 경품이 걸린 제품을 한꺼번에 구매하는 사람도 있다. 이뿐만 아니라 구매 취소가 쉬운 현금구매를 애용하는 것도 이들이 즐겨 쓰는 수법이다. ‘행사형’은 특정 행사가 있을 때 잠깐 필요에 의해 제품을 구입한 뒤 행사가 끝나면 반품이나 환불을 요구하는 유형이다. 동창회나 연말파티 등의 행사를 앞두고 날짜에 임박해 고가의 귀금속이나 모피코트 등을 구입해 사용한 뒤 반품 기한을 넘기지 않고 반품하는 얌체족들이 대표적이다.
반품 기한을 넘기지 않는 이유는 제품에 특별한 하자가 없음에도 반품할 경우 반품에 따른 배송비를 구매자가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업계에 따르면 이런 유형의 얌체족은 줄어드는 추세다. ‘알뜰형’은 주머니 사정이 얄팍한 학생들에게서 주로 나타나는데 이들은 DVD나 CD, 도서 등을 구입해 내용물을 자신의 파일로 만든 뒤 본래 제품을 반품하는 유형이다. 조은정 소장은 “이 경우 저작권 침해 소지가 있다”고 경고했다. 조 소장에 따르면 얄미운 고객은 오프라인 업체보다 인터넷쇼핑몰이나 홈쇼핑에서 더욱 활개치고 있다. 최근 유통채널별 반품 비율을 보면 백화점 0.3%, 대형할인점이 2.5%인 데 비해 인터넷쇼핑몰은 5%, 홈쇼핑은 10% 선이다.
물건에 흠집 내고 보상 요구
디지털 얌체족이 많은 이유는 첫째, 고객이 물건을 직접 보지 못한 채 사는 점 둘째, 구매한 물건을 들고 교환이나 반품을 하러 직접 가야 하는 백화점 등 오프라인 업체보다 인터넷쇼핑몰이나 홈쇼핑이 상대적으로 반품이 편리하고 쉽다는 점 셋째, 소비자 구매 후기가 다른 고객의 물건 구입에 결정적 역할을 하기 때문에 판매자가 반품요구를 거절하기 어렵다는 점 때문이다. CJ홈쇼핑 박영신씨는 “식품을 사서 절반 이상 먹고 난 뒤 맛이 없다며 반품을 요구하는 등 골치 아픈 상습 반품 고객이 종종 있는데, 이는 전화 자동응답서비스(ARS)를 이용하는 홈쇼핑의 경우 제품주문과 구매취소 과정이 매우 쉽고 간편하게 이뤄지는 것도 한 원인”이라고 말했다. 대한상의 조사에서 나타난 얌체 고객 유형을 보면 적정수준을 넘어서는 과도한 보상요구(53.7%), 규정에 없는 환불·교체 요구(32.4%), 보증기한이 지난 후 무상 AS 요구(13.9%) 순으로 많은 비중을 차지했고, 이 가운데 금전적 보상을 요구하는 경우가 절반 이상이었다. 이러한 조사결과를 뒷받침하는 디지털 얌체족 사례를 찾기란 어렵지 않다. 한 20대 여성은 홈쇼핑을 통해 10만원대 속옷세트를 구입해 1년 동안 입고 여러 차례 세탁한 뒤 제품에 문제가 있다며 반품을 요구했다. 또 다른 40대 주부는 제사를 목전에 두고 인터넷쇼핑몰에서 제기를 구입해 사용한 뒤 반품기한 마지막 날 반품했다. 이뿐 아니라 추가 구성품만 챙기고 본 제품은 반품하는 얌체도 있다. ‘추가 구성품’이란 예를 들어 화장품 샘플, 노트북 가방, 의류를 구입하면 주는 벨트, 카메라를 사면 주는 삼각대와 가방 등을 일컫는다. 현대홈쇼핑 오형주씨는 “본 제품을 반품하면서 추가 구성품은 잃어버렸다거나 아예 배송 때부터 빠져 있었다고 우기며 돌려주지 않는 고객이 적지 않다”고 밝혔다. 그에 따르면 황당한 사례도 있다. “한 남성이 에어컨을 한꺼번에 27대 구매하면서 신용카드 결제 대신 무통장입금을 하겠다고 해 놓고 주문을 취소한 경우가 있었다. 신용카드로 결제하면 환불절차가 현금구매에 비해 까다로우니까 무통장입금을 선택한 것이다. 무계획적인 충동구매의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디지털 얌체족 중에는 ‘악성 고객’도 적지 않다. 1년 전 구입해 사용한 가전제품을 다시 꺼내보니 곰팡이가 피었다며 환불을 요구하고 나아가 정신적 피해보상까지 요구한 경우, 집들이를 앞둔 신혼부부가 고가의 가구를 구입했다가 집들이가 끝나자 반품한 경우도 있었다. 기업들은 갈수록 영악해지고 실속 차리기의 명수인 일명 ‘체리 피커(cherry picker)’를 포함한 디지털 얌체족 대응 방안 마련에 골몰하고 있다. CJ홈쇼핑 박영신씨는 “과거에 비해 악성고객이 많이 줄어든 편이지만 그래도 상습반품 고객이 있다. 이들이 ARS로 주문해도 최대한 숙련된 상담원과 자동으로 전화가 연결되도록 조치하고 있다. 노련한 상담원과 통화하면서 고객이 신중하게 구매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선량한 소비자에 피해 끼쳐
이런 고객이 상담원과 자동 연결이 가능한 이유는 고객이 배송지 주소, 전화번호 등 기본 정보를 입력하면 이전의 구매정보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박씨는 “고가 화장품의 경우 요즘은 일주일 치 샘플을 함께 보내준다. 샘플을 써본 뒤 맘에 안 들면 본 제품을 뜯지 말고 반품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것이다. 과거 비싼 화장품을 절반 이상 쓴 뒤 자기 피부에 맞지 않는다며 반품을 요구하는 고객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롯데닷컴은 지난해부터 의류에 반품방지 태그(Tag)을 붙여 배송하고 있다. 고객이 태그를 떼면 옷을 착용한 걸로 간주해 반품·환불하지 않는다. 이러한 방법을 시행한 후 반품률이 4.5% 줄었다. 홈쇼핑의 경우 고가 화장품을 판매할 때 제품에 홀로그램을 부착해 개봉 시 반품이 불가능하도록 하고 있다. 백화점들은 경품행사 때 무더기 반품 사태를 줄이기 위해 반품 기한이 지난 뒤 당첨자를 발표한다. 디지털 얌체족을 상대하는 홈쇼핑과 인터넷쇼핑몰 업계의 공통된 의견은 “말도 안 통하고 막무가내로 나오는 악성 고객은 회사 입장에서 가능한 한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고소·고발이나 언론 유포, 구매 후기 등을 무기로 내세우면 고객 상대 서비스업인 업계가 약자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조 소장에 따르면 그동안 쉽게 반품이 가능했던 미국도 아예 반품처리 비용을 소비자에게 부과하거나 반품허용 기간을 줄이는 추세다. 미국 소매협회 조사에 따르면 전체 소매업체의 40%가량이 반품 규정을 과거보다 훨씬 까다롭게 바꿨다. 예컨대 e베이는 경매 물건 낙찰 후 구매거부 횟수나 대금 미결제 횟수에 따라 등급을 하향조정하고 최하등급 고객이 다시 구매에 나서면 판매를 거부하고 있다. 심할 경우 영구제명까지 가능하다. 베스트바이는 소비자에게 제품가의 15%를 반품비용으로 물리고 있다. 코스트코는 전자제품 반품기한을 6개월에서 90일로 축소했다. 조 소장은 “디마케팅 활동을 통해 디지털 얌체족을 걸러내는 데 좀 더 신경 쓸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디마케팅(demarketing)’은 제품판매를 억제하는 마케팅 기법을 일컫는다. 조 소장은 “반품으로 발생하는 비용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것보다 신중하게 구매하도록 소비자를 유도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다. 예를 들어 홈쇼핑이나 인터넷쇼핑몰에서 물건을 과도하게 판매하려 하면 필요 없는 소비자까지 충동구매를 할 수 있다. 이 경우 결국 반품 비율이 높아져 업체나 소비자 둘 다 손해”라고 지적했다. 이상경 대한상의 기업정책팀 팀장은 “최근 일부 소비자의 악성 클레임은 해당 기업의 애로사항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제품가격에 전가돼 선량한 소비자까지 피해를 보게 된다”고 강조했다. 다시 말해 디지털 얌체족의 상습반품에 따라 발생하는 부대비용이 결국 제품가격을 올리는 요인이 된다는 것이다. 이 팀장은 “기업도 고객중시경영을 보다 충실하게 실천해야겠지만 막무가내 식 소비자 행동도 더불어 개선돼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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