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oul Serenade] 추억 속으로 가슴 찡한 여행
[Seoul Serenade] 추억 속으로 가슴 찡한 여행
1970년대 초 나는 4년 동안 한국의 농촌직업훈련소에서 교사로 일했다. 우리가 속한 K-22는 최초로 한국에서만 연수를 받았다. 미 평화봉사단으로 우리보다 먼저 한국에 온 브라이언 베리(현재 한국에서 탱화를 그리며 살아간다)와 캐시 매튜스(현재 뉴욕주에서 농장 운영)가 우리를 가르쳤고, 게리 렉터(현재 뉴스위크 한국판 네이티브 체커로 근무한다)도 간간이 우릴 찾아왔다. 서상수, 주염돈, 송양 등 한국인 교사 3명은 우리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다. 연수 기간에 우리는 한국의 언어, 관습, 문화, 역사를 배웠다. 71년 9월 말 한국에 도착한 우리는 서울의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연수를 받았다. 약 한 달 뒤엔 전주시의 가톨릭센터로 이동했다. 연수 도중 우리는 앞으로 각자 일할 곳과 명승지, 고아원, 가족, 그리고 ‘와인 하우스’(막걸리 집)도 사전답사 했다. 연수 프로그램이 끝난 뒤엔 소형 버스 한 대를 빌려 부산으로 단체관광을 갔다. 전주로 돌아온 뒤엔 각자 일하고 싶은 직업훈련소를 선택했다. 평화봉사단 선서는 72년 3월 3일 당시 미 평화봉사단 한국 책임자인 돈 헤스(나중에 미 평화봉사단장이 됨)가 지켜보는 가운데 엄숙한 분위기 속에 진행됐다. K-22는 모두 6명이었다. 남자 단원 4명은 한국의 여러 곳에 있는 농촌직업훈련소에서 일했다. 수전은 보건소에서 물리치료를 담당했고, 마거릿은 이화여대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선서를 한 뒤 남자단원에겐 각기 직업훈련소 이름이 적힌 봉투가 주어졌다. 모두 자신이 배속된 곳에 만족했다. 헨리는 경기도로, 래리는 논산으로, 데이브는 전남 광주로, 그리고 나는 전북 이리(지금은 익산)시 외곽의 익산군 농촌직업훈련소로 발길을 옮겼다. 평화봉사단은 모두 소중한 경험을 했다. 아직도 당시 경험이 우리들의 삶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그 시절 이후 이미 오랜 시간이 경과해 그때의 경험이 마치 끊어진 필름처럼 기억나지만 무엇보다도 한국에서 만난 동료들과 친구, 그리고 낯선 사람들과 함께 보낸 시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더 나이 든 분들과 보냈던 시간도 기억 난다. 그분들은 대체로 관대하고, 유머 감각이 있었다. 게다가 현명했을 뿐 아니라 생각을 표현하는 방식도 독특했다. 이들로부터 배운 교훈 중 하나는 인간은 자신이 변화시킬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만 걱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것들에 대해 고민하면 오히려 건강을 해치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그분들은 말했다. 젊은이들이 나이 든 분들을 존경하는 태도도 생생히 기억 난다. 그들은 연로한 분들과 생각이 다를 때도 변함 없이 예의와 존경을 표했다. 나는 직업훈련소에서 한국의 젊은이들과 함께 열심히 일했다. 당시 내가 근무한 훈련소에서 농촌 학생과 지역사회를 돕던 한국인 교사와 행정 담당자들은 너무도 헌신적으로 일했다. 특히 그들이 자신과 자녀의 발전을 위해 기울이는 노력은 눈물겨울 정도였다. 우리는 학생들을 교육하는 것 말고도 농촌지도계와 함께 농민들에게 보다 현대적인 영농기술을 가르치려 애썼다. 우리와 함께 일한 사람들은 우리의 도움에 감사했으며 그 감사를 독특한 방식으로 표시했다. 막걸리는 당시 누구나 손쉽게 활용하던 매개체였다. 요즘 시장에서 파는 막걸리보다 훨씬 맛이 좋았다. 나는 한국인 교사들을 돕는 데 주안점을 뒀다. 내가 떠난 뒤에도 그들 스스로 자원과 기술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훈련소 직원들과 가까워지면서 자연히 그들이나 그들의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도 늘었다. 우리는 주말엔 하이킹을 떠나고, 함께 식사를 하고, 시골의 ‘와인 하우스’에서 여유를 즐기며 서로의 문제를 상의했다. 야간근무도 생생히 기억 난다. 덕분에 나의 막걸리 주량과 화투, 장기, 한국어 실력이 부쩍 늘었다. 그 시절에도 소주는 있었지만 막걸리보다 비쌌기 때문에 우리처럼 돈 없는 사람들은 주로 막걸리를 마셨다. 그 모든 소중한 경험은 한국인들의 친절과 다정함 덕분에 가능했다. 당시 한국의 농촌지역은 대도시에서 볼 수 있던 TV나 오락거리가 거의 없었다. 컴퓨터도 없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놀이문화라고 해봐야 가족이나 친구들끼리 모여 음식을 나눠 먹거나, 술을 마시거나, 이야기를 하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여러 가지 게임을 하는 게 전부였다. 내가 병이 난 적은 거의 없었지만 간혹 그런 소문이 퍼질 때면 마을 주민들이 병문안을 하려고 나를 찾아와 걱정해 줬다. 내가 살던 집의 주인과 친구, 직장 동료들이 내가 편히 지낼 수 있게 해 준 배려는 뜻밖이었다. 처음엔 일종의 의무감 때문에 그러려니 했다. 그러나 곧 그들의 행동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며 나의 한국 생활을 보다 쉽고 보다 기억에 남도록 하기 위한 배려임을 알았다. 그들은 나의 평화봉사단 활동에 대한 감사를 늘 그런 식으로 표시했다. 오늘날까지도 평화봉사단 시절은 힘든 때로 기억되지 않는다. 이 시기의 경험은 오히려 내 인생에서 멋진 모험이었다. 그 모험을 통해 나는 다른 누군가를 조금이라도 돕고 인생에 대한 나 자신의 비전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할 수 있었다. 덕분에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던 76년 봄 나는 멋진 한국 여성과 결혼했다. 그러곤 이듬해 미국으로 귀국했다. 77년 한국을 떠난 뒤 여러 차례 한국을 찾았다. 가장 최근인 2007년 봄엔 아내와 함께 한국을 방문했다. 우리는 한국에 사는 평화봉사단 친구와 가족들을 다시 만나 이 모든 변화가 불어 닥치기 전의 한국을 기억하려 애썼다. 하지만 77년 초 한국을 떠나 15년 만에 처음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이미 엄청난 변화에 깜짝 놀랐다. 대중교통은 여전히 널리 이용됐지만 자동차가 엄청나게 늘었다. 대중교통 수단은 훌륭하고, 믿을 만했으며, 깨끗하고, 요금 수준도 높지 않았다. 헬스클럽이 도처에 생겼고, 공공장소에서의 흡연도 제한됐다. 공항(인천과 김포 모두)에서 주요 도시를 오가는 리무진버스도 생겨났다. 고속버스나 시내버스와 달리 다리가 긴 서양인을 고려해 의자 사이의 간격도 넓었다. TV에선 영어채널이 생겨났고, 영어와 한국어로 된 CNN 채널과 현대적인 서구음악, 최신 패션, 최신 가전제품이 넘쳐났다. 얼마 전 나와 아내는 중국을 거쳐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우리가 인천공항 근처의 한 게스트하우스에서 묵을 수 있도록 조카가 미리 예약한 방이었다. 알고 보니 호스텔형 숙박시설이었다. 매우 깨끗하고, 방이 많으며, 방마다 화장실·샤워시설·냉장고·TV, 간단한 가구가 있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현대적인 호텔은 아니었다. 그래도 평화봉사단 시절에 비하면 거의 궁전이었다. 70년대만 해도 우린 어딜 가나 여관에서 잠을 잤다. 당시 여관은 하룻밤을 묵기에 편하고, 경제적이며, 깨끗했다. 요즘 여관은 한국에선 퇴물이 돼 여관 중 다수가 평판이 나쁘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구식 다방도 마찬가지다. 다방은 한때 사람들이 쉬고, 친구를 만나며, 사업 얘기를 하거나 TV를 보는 곳이었다. 요즘엔 스타벅스, 인터넷 카페, 음악 감상실 등이 도처에 생겼다. 게다가 각 나라의 음식이 넘쳐난다. 이제 소주는 많은 사람이 즐기는 술이 된 것 같다. 막걸리도 있지만 맛은 예전만 못하다. 한국 의료서비스의 질은 이제 세계적인 수준에 올랐으며 사실 일부 서구 나라보다도 낫다. 게다가 한국인들은 세계를 많이 여행하며 다수는 휴가 때 다른 나라를 찾는다. 사실 그런 추세가 너무 심해 지난번 중국을 방문했을 때 한국의 원화가 미국 달러화나 일본 엔화와 거의 똑같이 취급되는 것을 보았다. 내가 만난 많은 중국인은 영어보다 한국어를 더 잘 구사했다.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한국이 매우 현대적인 나라로 변모한 사실에 깜짝 놀란다. 특히 젊은이들은 컴퓨터와 기술을 매우 중시하며 사람들도 대개 예전처럼 친절하고 다정다감하다. 그러나 이 모든 변화에도 불구하고 가족 간의 관계는 여전히 끈끈하며 전통도 계속 존중된다. 내가 한국에서 겪은 경험이 내 인생에 어떤 영향을 줬느냐고 누가 물으면 “더 좋은 방향으로 나를 이끌었다”고 답한다. 만일 한국에 가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멋진 아내도 만나지 못했으리라. 이 사실만도 77년 한국을 떠난 이래 내가 해 온 일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게다가 내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방식, 매일 내리는 선택, 그리고 타인에 대한 배려 등 그 어디서도 얻을 수 없는 소중한 경험과 지식을 한국에서 얻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데 조그만 기여를 했다는 추억과 함께 말이다. 우리 부부는 올가을 한국에서 열릴 미 평화봉사단 재회 행사에 참가할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부부는 빛 바랜 사진을 보며 옛 기억을 더듬는다. 지난 30년간 우리는 콜로라도주 덴버 교외에서 살아왔다. 나는 현재 한 대기업에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일한다. 내겐 대학을 갓 졸업하고 약 40년 전의 나처럼 새로운 세계를 찾아 도전하는 아름다운 두 딸이 있다. 큰딸은 결혼해 우리 집 근처에서 살고, 둘째딸은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 곧 우리를 닮은 손주까지 보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필자 스티브 니센은 미국 평화봉사단(Peace Corps) 22기로 1970년대 초 한국의 농촌에서 46개월 동안 봉사활동을 펼쳤다. 평화봉사단 출신인 캐슬린 스티븐스(55) 미 국무부 동아태 선임고문의 주한 미 대사 임명을 계기로 당시 한국에서 근무했던 평화봉사단원들이 올가을 서울에서 재회할 날을 손꼽으며 옛 시절을 회고한 글을 본지에 영문으로 보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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