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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그룹도 안전지대 아니다

10대 그룹도 안전지대 아니다


98년 외환위기 당시 희망퇴직 실시 통보를 읽고 있는 직장인들.

"3분기 실적까지는 미국발 금융위기가 반영되지 않았다. 이제 10월 실적이 발표되니까 기업들이 현실감 있게 받아들인다. 모든 기업이 인력 감축에 대한 컨틴전시 플랜(비상계획)을 마련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시점의 문제일 뿐이다. 11월, 12월 실적은 더 악화될 가능성이 크다. 늦어도 내년 3월이면 모든 기업이 구조조정 단계에 들어간다고 봐야 한다.”

한 외국계 경영컨설팅사 임원의 얘기다. 그는 “이번 위기를 ‘내년만 견디면 되겠지’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라고 덧붙였다.

“97년 외환위기가 맹장염이라면 지금은 암이다. 맹장염은 별것 아니지만 고통스럽다. 그러니 처방도 빨리 한다. 반면 암은 더 중증이지만 증상이 더디게 나타난다. 서서히 고통을 받다가 치료할 시기를 놓칠 수 있다. 10대 그룹에 포함된 기업을 포함해 상당수 기업이 구조조정 플랜을 마련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언제 시작할 지가 문제일 뿐이다. 지금 상황에서 구조조정을 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기업이 있겠는가? 없다. 그리고 빠를수록 좋다. 2~3년 가는 문제니까….”

냉정하지만, 불편한 진실이다. 감원 관련 언론 보도를 ‘호들갑’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그렇게 보기엔 실물경제가 너무 빠르게 나빠지고 있다. 상당수 기업은 이미 구조조정 모드로 돌입한 상태다. 드러내지 않았을 뿐, 일부 대기업도 비용절감과 자산 매각, 계열사 정리, 감원 등 전방위적인 비상경영 체제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사실을 공표했을 경우 회사가 어렵다는 등의 루머가 나돌까 봐 쉬쉬하며 구조조정 플랜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감원 칼바람이 중소기업·한계기업·비정규직으로 시작해 중견·대기업, 정규직으로 옮겨갈 것으로 보고 있다.



3개월 새 임시직 24만 명 줄어

이미 고용 지표는 나빠질 대로 나빠져 있다. 지난 10월을 기준으로 일자리 증가 수는 전년 대비 70%나 급감했다. 10월 신규 취업자는 9만7000명. 2005년 2월 이후 3년 8개월 만에 가장 적었다. 특히 임시직·일용직 지표가 좋지 않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8~10월에 임시직은 24만 명이나 줄었다.

일용직의 경우 같은 기간 18만 명 가까이 급감했다. 실업급여 수급 대상자도 늘었다. 노동부에 따르면 올 9월까지 실업급여 누적 수급자는 78만 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3% 증가했다. 실업급여는 도산, 폐업, 정리해고 등 비자발적으로 직장을 그만둘 때 받는다. 물론 실업급여 대상자가 아닌 실직자를 포함하면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직장을 그만둔 수는 더 늘어난다.

익명을 요구한 노동부 사무관은 “현재 추세라면, 올해 비자발적 이직자는 200만 명에 달할 수 있다”고 말했다. 현실적인 얘기다. 올 9월까지 비자발적 퇴사자(또는 이직자)는 130만6000명이었다.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해 16%나 늘어난 수치다. 일반적으로 고용 지표는 경기 후행의 성격을 갖는다.

기업은 내년 장사가 어려울 것을 예상해 인력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장부(실적)가 나빠진 후에 인력을 조정한다. 실물경제가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기도 전인 9월까지의 고용 사정이 이 정도라면, 올 4분기와 IMF 체제 이후 가장 낮은 경제 성장이 확실한 내년 상반기가 걱정이다. 갈수록 실직자 증가폭이 늘어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 11월 12일 “이번 겨울이 국민에게 얼마나 길고 혹독할지 걱정”이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문제는 고용 쇼크가 이제 시작일 뿐이라는 점이다. 최근 대기업 총수들이 모여 “현 고용수준을 유지하겠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고 하지만, 그것은 ‘대기업 사정이 아직까지는 그렇다’는 것이다.

민간경제연구소의 한 연구원은 “불안 심리를 차단한다는 차원의 수사 정도로 본다”고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 연구원은 “대기업 오너들이 감원은 없을 것이라고 했지만, 노사 고통분담을 거론했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구조조정 직전에 항상 나오는 수사가 고통분담”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임태희 한나라당 정책위 의장은 최근 “국내 기업들이 구조조정을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 왔다는 것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성장률 1% 떨어지면 5만~6만 명 고용 줄어

얼어붙는 고용시장
■ 10월 신규취업자 9만7000명, 3년8개월 만에 최저
■ 올 8~10월 임시직 일자리 24만 명, 일용직 18만 명 감소
■ 1~9월 실업급여 수급자 78만 명, 전년 대비 13% 증가
■ 1~9월 비자발적 이직자 130만6000명, 전년 대비 16% 증가
■ 내년 경제성장률 1% 하락 시 5만~6만 명 고용 감소
한계 상황에 도달한 기업의 직장인은 생존의 갈림길에 서 있다. 아직까지는 부도, 희망퇴직 등으로 인한 실직 공포가 중소 제조업, 건설·금융 기업 등에서 도드라지지만, 자동차·반도체·조선·IT·석유화학 분야 등으로 빠르게 확산될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현재로선 이런 가능성을 부정할 만한 단서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소비가 줄고, 재고는 쌓여가고, 수출 길은 막히고, 경제성장률은 떨어지는데 인력 구조조정이 없을 것이라는 것은 순진한 기대에 불과하다. 국내 국책연구기관이나 민간경제연구소가 내놓은 내년 경제성장률 예측치는 3.3(KDI)~3.9%(현대경제연구원)다. 외국 기관이 내놓은 전망은 훨씬 혹독하다.

10월 말을 기준으로 해외 투자은행이나 경제 기관이 내놓은 전망치는 UBS 1.1%를 비롯해 메릴린치 1.5%, 무디스 2.2%, JP모건 3.0% 등이다. 아직 하향조정 발표를 하지 않은 모건스탠리나 골드먼삭스의 전망치는 3.8~3.9%다. 이와 관련, 강만수 장관은 지난 ‘11·3 대책’을 발표하면서 “현재의 추세가 이어진다면 내년 성장은 3% 내외에 그칠 가능성이 있고, 세계경제 상황이 추가로 악화하면 3%대 유지가 어려울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최근 전국 531개 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최근 경제상황에 대한 기업인식 조사’ 결과에서도 응답기업의 44.1%가 내년 경제성장률 예상치를 3% 미만으로 전망했다. 기업이 아무리 감원만은 피하려 노력해도, 경제성장률 하락에 따른 인력 조정은 불가피하다. 배민근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이 지난 4월 발표한 ‘경제성장률 1%의 의미’라는 보고서에 따르면 GDP 1%가 추가로 늘 때 고용탄성치는 0.2% 늘어난다.

취업자 수로 따지면 5만6000명이 순증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경제성장률이 1% 떨어지면 고용이 5만∼6만 명 줄어든다. 일부에선 내년 경제성장률이 2% 중반 이하로 내려가면 40만 명 이상의 인력 구조조정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주장도 한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경기 하강이 본격화하면 내년 신규 취업자 증가폭이 마이너스로 돌아설 수도 있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경제성장률 하락이 불 보듯 뻔한 상황에서 신용 경색마저 계속될 경우 흑자 부도기업이 속출하면서 고용 쇼크가 더 심각해질 것을 우려한다. “돈이 돌지 않는 원화 유동성 악화가 기업 도산 증가로 이어지고, 대량 실직을 유발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국고용정보원 인력수급전망센터 권우현 박사는 “현재는 비정규직 분야 사정이 나빠지고 있는 상태지만, 내년에는 정규직 고용 조정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실직 공포가 현실이 되느냐를 가늠할 수 있는 시기는 4분기 실적 발표 즈음이 될 것 같다. 현재로선 전망이 어둡다. 생산 부진과 소비 위축이 겹치면서 지난 9월 제조업 재고율(재고/출하)은 115%를 찍었다. 한국은행이 2127개 제조업체를 대상으로 조사한 11월 기업경기실사지수(BSI)는 1998년 4분기 55 이후 가장 낮은 65로 나타났다.

6개월 후 업황을 비관적으로 보는 기업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96년 명예퇴직 바람, 97~98년 대량 정리해고·부도 사태 때처럼 수많은 기업과 직장인이 ‘공포의 도미노 라인’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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