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자본 “500억대 오피스빌딩 관심”
일본 자본 “500억대 오피스빌딩 관심”
A중소기업은 지난해 직원교육센터 용도로 건립한 오피스 빌딩을 팔았다. 서울 알짜배기 땅에 위치한 6층 규모의 그럴싸한 빌딩이다. 이 회사는 ‘돈맥경화’를 해소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고 매각 배경을 밝혔다. 1000만원짜리 어음 한 장을 막지 못해 부도를 내는 불황기.
빌딩마저 팔리지 않으면 자칫 ‘죽음이 예정된’ 바다로 빠져들 수 있다. ‘미소지움’ 브랜드로 유명한 신성건설은 유동성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강남 사옥을 매물로 내놨지만 팔리지 않았다. 신성건설은 결국 법정관리 신세를 지게 됐다. B중소건설업체는 최근 돈 가뭄에 시달린 끝에 사옥을 팔기로 했다.
알토란 같은 빌딩이 매물로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사냥꾼이 몰려들었다. 이 회사 관계자는 “일본·싱가포르 연합 자본에 최근엔 유럽계 자본까지 군침을 흘리고 있다”고 전했다. 이 빌딩이 팔리면 B사로선 큰 고비를 넘길 수 있다. 반면 자신의 상징을 잃어버린다. 그래서 사옥을 매물로 내놓은 B사 사람들의 속내는 복잡하기 짝이 없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실물경제로 옮겨 붙자 기업의 유동성 위기가 한층 가중되고 있다. 금융 경색과 실물경제 추락이 서로 영향을 끼치며 한국 경제를 불황의 깊은 소용돌이로 빠뜨리고 있다. 너나 할 것 없이 현금 마련에 혈안인 상황. 하지만 은행 대출의 벽은 여전히 높다. 신규 대출은커녕 만기연장만 돼도 다행이라는 소리가 곳곳에서 나온다.
오피스 빌딩이 매물로 등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금융시장이 경직되자 오피스 빌딩 등 보유자산을 매각해 유동성을 확보하려는 기업이 늘고 있는 것이다. 비단 중소기업만 그런 것은 아니다. 대기업의 상황도 크게 다를 바 없다. SK건설은 서울 종로구 관훈동 사옥을 시장에 내놨다.
유동성 위기를 겪는 대기업 C사도 건물 매각을 신중히 검토하고 있다. 대한전선의 회현동 사옥, 금호생명 사옥은 이미 팔렸다. 기업의 상징이 현금 마련의 수단으로 전락한 셈이다.
외환위기 시절 굴욕적 빌딩 매각
어쩌면 이는 새삼스럽지 않은 일이다. 한국 경제는 10년 전 똑같은 일을 경험했다. 외환위기 한파로 기업의 유동성에 경고등이 켜지자 너나 할 것 없이 오피스 빌딩을 매각했던 것이다. 당시 국내 기업의 오피스 빌딩을 사냥한 주인공은 싱가포르투자청, 모건스탠리, 골드먼삭스, 론스타, 그리고 네덜란드의 로담코 등 외국계 자본이었다.
1998년부터 2001년까지 이들 외국계 자본에 팔려나간 국내 빌딩은 금액 기준으로 2조2500억원에 달한다. 싱가포르투자청은 당시 유진관광 소유의 서울 광화문 파이낸스센터 빌딩을 3550억원에 매입해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잠실 소재 33층짜리 주상복합 ‘한라시그마타워’ 1~11층도 330억원에 사들였다.
삼성동 스타타워를 9000억원에 매입한 곳도 싱가포르투자청이다. 론스타는 쌍용그룹이 보유했던 1000억원대 부동산을 일괄 매입했다. 외국계 자본의 힘으로 몇몇 기업은 유동성 위기를 극복했지만 뼈아픈 기억도 남겼다. 국내 빌딩이 외국계 자본에 팔리는 것을 둘러싸고 ‘국부유출’ 논란이 일기도 했다.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 상황은 어떨까? 부동산 업계 일각에선 ‘외환위기의 재판’이라며 우려의 시각을 보낸다.
한국 빌딩 겨냥한 사모펀드 1조원 훌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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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계 자본이 그동안 사들인 국내 빌딩을 잇따라 매물로 내놓고 있는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일례로 GE캐피털의 GE리얼에스테이트가 강남과 분당 소재 빌딩 3곳을 매물로 내놓았다.
파산보호신청을 한 리먼브러더스의 명동 유투존, 동대문상가의 쇼핑몰 라모도, AIG의 서울 여의도 국제금융센터도 매각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호주계 맥쿼리그룹의 ㈜맥쿼리센트럴오피스 기업구조조정 부동산투자회사는 회사 청산에 맞춰 서울 충무로 극동빌딩을 매물로 내놓은 지 오래다.
주목할 점은 일본계 자본이 국내 빌딩을 사냥할 채비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9월 미국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 파산 이후 일본계 자본이 한국 진출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리먼브러더스의 빈자리를 꿰차겠다는 심사다. 일본 부동산 개발회사 가운데 상위 3위권 업체 모리빌딩이 한국에 본격 진출할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모리빌딩은 건축가들의 필수 탐방코스로 각광받고 있는 롯폰기 힐스를 건설한 업체다. 최근 매각된 금호생명 사옥에도 일본계 자금이 대략 30% 정도 투자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계 자본이 꿈틀거리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일본 엔화에 대한 원화 가치가 지난 1년 사이 두 배 가까이 하락했기 때문이다.
2006년 초 100엔당 838원이던 원-엔 환율은 1월 30일 현재 1544원까지 치솟았다. 2006년 상반기와 비교하면 절반 정도의 돈으로 서울의 오피스 빌딩을 거머쥘 수 있게 된 셈이다. 일본 최대 벤처캐피털 업체 일본아시아투자(JAIC)코리아의 야마모토 히로히 사장은 “지금이 한국에 투자하는 데 적기”라며 “주변에 100엔이 2000원까지 치솟을 것으로 예상하는 사람도 무척 많다”고 말했다.
일본계 자본이 한국으로 유입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다. 기관투자가가 직접 들어오는 게 첫째 방법이다. JAIC코리아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 회사는 2월 24일 일본 기관투자가들을 모아놓고 한국 기업 투자 관련 세미나를 개최할 계획이다. 야마모토 사장은 “일본 기관투자가에게 한국에 투자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기관투자가가 직접 움직이는 사례는 많지 않다는 게 야마모토 사장의 말이다. 대부분 개인투자자들이 사모펀드를 결성해 들어온다. 부동산업계에 따르면 현재 일본에서는 가격 이점이 높아진 한국의 오피스 빌딩을 매입하기 위해 투자펀드가 만들어지고 있다. 사모펀드는 각각 규모가 대략 100억~200억원 정도이고, 총 규모는 1조원을 훌쩍 넘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신영에셋 홍순만 이사는 “일본계 자본은 대개 100억~500억원대 오피스 빌딩을 노리고 있다”며 “일본 내 빌딩 가격이 40~50% 정도 하락했지만 버블 경제로 혼쭐이 났던 일본인들은 자국 매물보다는 서울의 핵심지역 빌딩을 더 탐내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계 자본의 진출에는 긍정적 측면도 물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회오리에 휘말려 있는 미국계 자본의 이탈로 인한 충격을 일본계 자본이 완화해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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