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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상권’ 되살린 성동 랜드마크

‘죽은 상권’ 되살린 성동 랜드마크


왕십리 민자역자 비트플렉스의 야경. 타워 꼭대기에서 빛나는 기업 로고 39B39에는 사방으로 통한다는 의미도 있다.

#1. 2월 10일 오후 6시. 왕십리 민자역사 복합쇼핑몰인 비트플렉스 4층의 커피 전문점을 찾았다. 두 중년 여성이 자리에 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젊은 커플들 사이로 중년 여성이 여럿 눈에 띈다. 15분 정도 거리의 아파트에 산다는 김정숙(47)씨는 “일부러 친구를 만나려고 하면 번거로운데 이곳에 오면 이마트에서 장보고 커피숍에서 만나 수다를 떨 수 있어 좋다”며 “예전에는 주로 강남 쪽으로 나가는 편이었는데 요즘에는 친구들에게 왕십리로 오라고 한다”고 말했다. 친구 우상희(46)씨는 “집이 강남인데 성수대교를 지나면 금방이고 주차도 강남보다 편해 자주 찾는다”고 덧붙였다.

#2. 2월 11일 오후 9시 30분. 늦은 시간인데도 2층 이마트 입구는 쇼핑 카트를 끌고 들어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주로 퇴근 후 자녀와 장을 보러 온 가족 단위 고객들이다. 마장동에서 온 직장인 이종현(36)씨는 “집에서 가까워 평일에도 아이들과 놀이공원 오듯 찾는다”며 “주말에는 좀 쉴 수 있다”고 웃었다.

#3. 2월 12일 오후 4시 비트플렉스 지하 1층에 있는 쇼핑몰 엔터식스의 여성 전용 흡연실. 몇몇 여성이 쇼핑백을 옆에 두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여성 전용이긴 하지만 남성 흡연자가 여자친구를 따라 들어오기도 했다. 대학생 김진아(22)씨는 “쇼핑몰 인테리어가 독특하다는 소문을 듣고 남자친구와 미니홈피에 올릴 사진을 찍으러 왔다”고 말했다.

“화장실도 무척 예쁘게 꾸며져 있다”고 하자 옆에 있던 남자친구가 “남자 화장실도 재미있는 벽화가 인상적”이라고 했다. 둘은 한 시간 정도 쇼핑하고 4층 CGV에서 영화를 볼 계획이란다. 지난해 9월 문을 연 왕십리 민자역사 복합쇼핑몰 비트플렉스의 모습이다. 오픈한 지 6개월 만에 지역 주민은 물론 소문을 듣고 온 ‘몰링족(쇼핑, 놀이, 공연을 한곳에서 해결하는 쇼핑 계층)’으로 붐벼 화제다.

회사 측에 따르면 왕십리역의 하루 유동인구가 25만~30만 명이고 이 중 2만8000여 명이 비트플렉스에 들른다. 이곳을 찾는 이들은 젊은 대학생 커플, 유모차를 끄는 아기 엄마, 양복 차림의 회사원, 중년 여성, 노부부 등으로 다양하다. 주로 행당동, 마장동, 옥수동, 답십리, 중곡동에서 오는데 최근에는 강남권이나 경기 구리에서도 찾는다고 한다.

이곳에는 이마트, CGV, 패션쇼핑몰인 엔터식스 외에도 돔형 골프연습장, 패밀리 레스토랑(VIPS) 등이 갖춰져 있어 ‘원 스톱(One Stop)’으로 쇼핑, 여가생활을 즐길 수 있다. 올해 3월에는 4~8층에 9917㎡(3000평) 규모의 포시즌 워터파크를 개장할 계획이다. 류필열 비트플렉스 마케팅 팀장은 “물놀이, 사우나, 찜질 등을 즐길 수 있는 워터파크를 언제 개장하느냐는 문의전화를 많이 받는다”고 말했다.

주말 방문자 수는 이마트가 2만 명, 엔터식스 1만5000명, CGV가 7000명 정도다. CGV는 지난해 12월 24일 오픈 당일 6시에 표가 매진되고 크리스마스인 다음날 1만여 명이 몰렸다고 한다. 유혜진 CGV 마케팅 파트장은 “별도로 오픈 행사를 하지 않았는데도 한 달 만에 예상치의 110% 매출을 달성했다”고 말했다.



푸드코트와 전문 식당가도 인기


이마트는 성수, 황학, 자양점, 홈플러스까지 주변에 경쟁 상대가 많다. 이마트 관계자는 “아직 다른 점포보다 뒤처지지만 양호한 편”이라며 “재개발이 진행되면 더 크게 성장할 것”이라고 기대감을 드러냈다.

헤어전문점인 준오헤어는 한 달 만에 1억원 매출을 돌파했다. 민석 준오헤어 왕십리역점 원장은 “아기부터 할머니까지 고객층이 다양하고 저녁에는 압구정, 청담 등 강남에서 근무하는 직장인이 퇴근 후 많이 찾는다”고 말했다.

최악의 불황이라는 패션업계도 선전하고 있다. 이상욱 엔터식스 상무는 “일일 매출은 평일이 7000만원, 주말이 1억3000만원 정도”라고 밝혔다. 푸드코트와 전문 식당가도 인기다. 식사시간을 벗어난 오후 3시쯤에도 출출한 배를 채우는 쇼핑객으로 북적였다. 문기영 불고기브라더스 왕십리역점 점주는 “복합몰에 맞게 메뉴를 간소화하고 가격을 낮춰서 테이블 회전율이 높고 점심, 저녁 시간대에는 매장 밖에 줄을 설 때도 많다”고 말했다.

푸드코트 종업원은 “평일에는 대기 번호가 800~900번, 주말에는 두 배 정도 많다”고 알려줬다. 평당 매출이 높은 매장으로 꼽히는 베스킨라빈스에는 평일 230명, 주말 450명 정도가 찾는단다. 지하나 스카이 라운지가 아닌 3, 4층에 식당을 둔 것은 조준래 대표의 아이디어였다.

발길이 쉽게 닿는 곳에 먹을거리가 갖춰져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무엇보다 분양률 100%가 비트플렉스의 성공을 말해준다. 류 팀장은 “불황기에 분양 광고도 내지 않았는데 100% 분양됐다”며 “분양 후 입점하지 않은 몇몇 매장과 경기 탓에 분양을 취소한 증권사 지점 외에는 공실이 없다”고 했다.

기존 민자역사 쇼핑몰도 불황의 한파를 피하지 못하는 때 ‘신참내기’가 주목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큰 요인은 왕십리역이 여러 지역을 이어주는 교차지점이기 때문이다.

1983년 지하철 2호선이 들어서면서 역세권이 형성됐고 현재 5호선, 국철까지 세 노선이 이 지역을 가로지른다. 또 성수대교를 통하면 강남에서 10분 이내에 오갈 수 있어 강남상권도 욕심 낼 법하다.

여기에 2010년 분당선 연장선이 개통되면 청담역까지 5분, 선릉역까지 15분이면 갈 수 있다고 한다. 이뿐만 아니다. 2017년에 경전철 동북선까지 연결되면 5개 노선이 이어지는 요지가 된다.

강남과 강북을 잇는 대표 상권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또 왕십리 뉴타운, 서울숲 등 주변 지역의 개발 호재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타고난 입지만으로는 성공하기 어렵다. 비트플렉스가 들어서기 전 왕십리역 주변에는 한양대생들을 위한 술집, 식당밖에 없었다. 아무리 잘나가는 브랜드도 왕십리에 오면 망한다고 할 정도로 ‘죽은 상권’으로 여겨졌다.

또 곱창 골목, 59년 왕십리 같은 이미지 때문에 낡은 거리라는 인식이 강했다. 비트플렉스는 이런 소비 심리를 역이용해 그동안 억눌린 소비 욕구를 마음껏 분출하게 한 것이다. 골프, 스파, 레스토랑, 영화관, 대형 마트 등 한 곳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도 큰 경쟁력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다른 복합쇼핑몰도 모두 ‘원스톱 체제’이기 때문이다. 비트플렉스의 비밀은 차별화된 매장 구성(MD·Merchandizing)에 있다. 요즘 쇼핑몰에서 전자기기를 잘 사지 않는다는 소비 경향에 따라 휴대전화 등 전자기기 매장은 최소화했다. 그러면서도 잠재적인 전자기기 소비자를 놓치지 않으려고 소비자가 많이 찾는 애니콜 AS 센터를 입점시켰다.

패션몰에서는 과감하게 보세 브랜드나 아웃렛 매장을 배제하고 1등 브랜드만 고집했다. 조 대표는 “15~29세가 선호하는 브랜드 중에서 매출 상위 브랜드 100여 개를 골라 입점시켰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오픈 후에 매장 구성을 바꾸느라 혼란을 겪는 쇼핑몰이 많은데 비트플렉스는 오픈 전에 완벽하게 매장 구성을 마쳤다”고 강조했다. 또 고급스러운 중세 유럽풍 인테리어로 젊은 층의 만족도를 높였다.



내년부터 청담역에서 5분이면 도착

쇼핑객 이유정(31)씨는 “천장의 조명, 거리 표지판, 바닥의 맨홀 등 중세 유럽 도시의 거리를 그대로 재현한 것 같다”고 만족스러워 했다. 기존 패션몰처럼 캐주얼, 청바지, 신발 등 제품별로 매장을 배치하지 않고 플라워(여성캐주얼, 코스메틱)·다운타운(영캐주얼)·가든(휴식 공간)·플랫폼(진 캐주얼)·스카이(등산용품)·그린 애비뉴(스포츠 용품) 등 테마별로 거리를 만들어 그에 맞게 제품을 구성했다.

실용적인 쇼핑몰에 ‘문화’를 입힌 것은 비트플렉스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왕십리역에서는 지하철을 기다리는 동안 ‘윈도 쇼핑’이 가능하다. 지하철 역사 벽에 쇼윈도를 설치했기 때문이다. 이 ‘플랫폼 갤러리’는 타워 외벽의 LED 조명 등과 함께 소비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특히 쇼핑몰의 외부 시설에 공을 들인 것은 비트플렉스의 자랑이다. 동서남북 사방에 진입로를 만들었고 대합실과 광장은 다양한 공연 장소로 이용할 계획이다. 조 대표는 이 모든 것이 고객과 ‘소통’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주변 상인들의 반응은 어떨까? 비트플렉스 근처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한 사장은 “심리적인 기대가 몹시 크고 주민 모두가 쇼핑몰 운영에 긍정적이다”고 하면서도 “분당선과 경전철이 개통될 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선종필 상가뉴스레이다 대표는 “비트플렉스는 유통 경쟁력이 없어 실패한 기존 몰의 시행착오를 잘 반영해 매장 구성을 차별화했다”며 “지역 낙후성을 벗어난 후에 안정적인 성장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5년 후면 강남·명동 누른다”
인터뷰 조준래 비트플렉스 대표

대기업도 성공하기 어려운 민자역사 사업에 거침없이 뛰어든 이가 있다. 바로 조준래 비트플렉스 대표다. 조 대표는 건국대 법학과와 행정대학원 부동산학과를 졸업하고 신세계백화점에서 물류팀장, 총무부장 등을 맡았다.

비트플렉스가 뛰어들기 전 왕십리 민자역사 개발사업은 주체가 두 번이나 바뀌었다. 1991년에 사업권을 획득한 삼미유통이 2년 만에 부도가 났고, 이어 개발사업에 나선 청구마저 1997년에 부도를 맞았다. 멈춰버린 개발사업은 부동산 디벨로퍼로 활동하던 조 대표가 1999년 사업주관자가 되면서 다시 활기를 찾았다.



>> 모교인 건국대 상권을 두고 왜 왕십리 개발에 나섰나?
“(웃음)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이 있지 않나. 개구리도 많이 웅크릴수록 더 높이 뛸 수 있다. 지정학적으로 성동구는 서울의 중심, 왕십리는 성동구의 중심에 위치하면서도 서울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 중 하나로 손꼽힌다. 과거에는 강남구가 성동구에 속해 있었다. 강남·송파·서초구 모두 성동구가 낳은 자식인 셈이다. 이렇게 역사적으로 중요한 성동구를 개발하려면 왕십리를 개발해야 한다. ‘흙 속의 진주’를 캔다는 생각으로 사업을 벌였다.”



>> 사업을 진두지휘한 것 같다. 화제가 된 쇼핑몰 ‘엔터식스’의 인테리어도 직접 관여한 것인가?
“중세 유럽 분위기를 내고자 했다. 기존의 복합 쇼핑몰들은 분양에 급급하고 트렌드를 신경 쓰지 않았다. 비트플렉스는 광고나 프로모션을 줄이는 대신 고유한 컨셉트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패션몰 브랜드는 15~29세의 니즈(needs)에 맞게 구성했고 그 외 외부 조경, 문화 행사 등도 A부터 Z까지 직접 챙겼다.”



>> 공을 들인 여러 곳 중에서 특별히 자랑하고 싶은 게 있나?
“쇼핑몰을 둘러싼 ‘걷고 싶은 거리’다. 서울 숲과 청계천을 잇는 2km 정도 구간인데 지역 주민의 건강을 고려한 시설이다. 쇼핑몰이지만 내부뿐 아니라 외부 시설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문화·체육 시설에만 200억원을 투자했다.”



>> 벤치마킹한 곳이 있는가?
“일본 롯폰기 미드타운, 영국 헤롯 백화점 등 외국의 여러 유명 쇼핑타운을 다녀봤다. 하지만 그대로 베껴서는 성공하지 못한다. 유학 시절 공부만 하지 않고 주말이면 도시 곳곳에 다니며 문화와 양식을 배웠다. 그때의 경험이 모두 비트플렉스를 구성하는 아이디어가 됐다. 비트플렉스는 세계 어디에도 없는 창작 예술품이다.”



>> 바둑·클래식·미술 등에 조예가 깊다고 들었다. 쇼핑몰에도 문화적 감성을 강조한 것인가?
“바깥에서 건물 정면을 바라보면 매장마다 테라스가 있다. 안팎이 소통하라는 뜻에서 설계한 것이다. 보통 쇼핑몰은 외부와 단절돼 있는데 ‘소통 문화’를 만들고 싶었다. 3개 동(棟)에는 철학적 의미도 담았다. 가운데 심벌 타워를 중심으로 왼쪽 건물은 남성, 오른쪽은 여성, 가운데는 아이를 상징한다. ‘가족이 한 곳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는 비트플렉스의 컨셉트를 나타낸다.”



>> 오픈한 지 6개월이 되어간다. 앞으로 계획은?
“비트플렉스에 들어온 점포는 성공한다는 인식을 심어주고 싶다. 5년 후면 왕십리가 강남, 명동 못지않은 서울의 중심 상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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