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끝 아우성 “제발 돈 좀…”
벼랑 끝 아우성 “제발 돈 좀…”
지난 2일 오전. 과천 정부청사 지식경제부 5층에 위치한 ‘실물경제종합지원단’ 사무실 전화는 끊임없이 울렸다. 그 울림은 아우성이었다. 생사의 벼랑에 선 중소기업이 마지막으로 정부에 보내는 ‘SOS’였다. 지원단 소속 박태환 사무관은 “한계에 몰린 기업들의 민원이 하루 7~10건 접수된다”고 말했다. 접수조차 되지 않는 전화상담은 훨씬 더 많다.
중소기업은 얼마나 힘든가? 무엇 때문에 어려운가? 중소기업이 간절히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이코노미스트는 이를 알아보기 위해 실물경제종합지원단이 출범한 지난해 12월 1일 이후 지난 3월 30일까지 접수된 765건의 기업 민원 현황 자료를 지경부로부터 건네 받아 분석했다.
어려운 중소기업 사정이 언론을 통해 토막 토막 소개되지만 ‘민원 리스트’에는 중소기업이 겪는 온갖 어려움이 담겨 있었다. 애끊는 토로도 있었다. 참고로 지원단 출범 후 50일간 접수된 민원은 146건이었다. 그 후 50일 동안엔 398건이 들어왔다. 정부가 기업 지원단을 운영한다는 것이 홍보된 이유도 있지만, 시간이 갈수록 중소기업이 더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가장 심각한 것은 역시 ‘돈 문제’였다. 765건 중 정책자금 지원 요청이나 지원 프로세스 개선 요구가 31%인 240건이었다. 민간자금 지원과 관련된 민원은 18%, 138건 접수됐다.
전기요금도 못 내는 곳 수두룩
정책자금과 관련된 240건 중 73%인 174건이 긴급 운전자금 지원, 상환 유예 요청, 대출을 위한 보증서 발급 등 ‘당장 돈이 급하다’는 것이었다. 정책자금 대출 요건 완화 및 절차 간소화, 기술신보 검증시스템 개선 등 제도 개선을 요구한 것은 64건이었다. 환헤지 손실 보전 요구, 엔화대출 상환 애로 등 직접적으로 외환과 관련된 민원은 5건이었다.
그렇다면 중기가 겪는 돈 문제는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일단 사례를 먼저 보자. 인천 남동공단의 S사는 지난해 수출물량이 급격히 줄면서 올해 원자재를 구입할 자금을 마련하지 못했다. S사는 모 은행에 패스트 트랙(Fast-track: 일시적으로 자금난을 겪고 있는 중소기업을 살리기 위한 유동성 지원 프로그램)을 요청하고 기술신용보증에 특허기술 가치평가 연계보증을 신청했지만 지난해 저조한 매출과 높은 부채 비율로 모두 거절당했다.
S사는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지원단에 도움을 요청했다. 지원단은 S사가 80여 건의 기술특허를 보유한 점과 올해 수주 실적을 감안해 줄 것을 은행 측에 요청하면서 결국 S사는 2억원을 지원받았다. 모 산업단지에 위치한 A시행사는 시공사이자 프로젝트 파이낸싱 대출 연대보증인인 B건설사가 파산하면서 은행으로부터 대출금 만기 연장 불가통보를 받았다.
연장하려면 연대보증인 동의가 있어야 하지만, 이미 파산한 뒤였다. 이에 대해 지원단은 A사가 개발 중인 사업이 마무리 단계고 지자체에서 준공 허가 협조를 얻어낸 점을 은행에 피력해 지난 2월 대출이 연장되도록 했다. 조선 기자재를 납품하는 C사는 “생산단가는 올랐지만 수주 단가는 변동이 없고 지난 2~3년간 조선 기자재 하청업체가 난립해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자금 부족에 직면했다”며 SOS를 친 경우다.
C사는 지난해 원청업체가 어음 만기 일수를 늘리고, 금융회사는 어음 할인을 거부하면서 설상가상의 상황에 몰렸다. 이에 지원단은 원청업체에 기존 4~6개월이던 어음 만기 일수를 2~3개월로 단축하는 협의를 진행하면서 C사의 주거래 은행에도 어음 할인을 해 줄 것을 요청해 합의를 끌어냈다.
지난해 700만 달러를 수출한 D사는 수출이 급감하고 재고가 늘어나면서 대출 이자를 갚는 것이 부담스러운 상황에 직면했다. D사의 무역금융 대출 금리는 9%대였다. D사 사장은 이를 지원단에 호소했다. 지원단은 거래 은행에 “한국은행이 지속적으로 금리를 인하 중이고, 대출에 대한 담보가 충분한 점”을 설득했고, 해당 은행은 대출 연장을 하면서 금리를 0.8% 인하했다.
대전시 대덕구에 위치한 E사는 28억원의 전기요금을 미납해 지난해 말 한전으로부터 전기공급 계약 해지 통보를 받았다. 이 업체는 지원단의 도움으로 ‘전기를 먼저 공급하고, 나중에 체납요금을 분할 납부한다’는 합의를 해 위기를 넘겼다.
가동을 멈춘 공장. |
비 올 때 우산 뺏는 은행
이 밖에도 중소기업은 다양한 이유로 자금난을 겪고 있었다. “원자재를 구입할 돈이 없으니 운전자금을 지원해 달라” “대출을 받아야 하니 수출보험공사에서 보증서를 발급해 달라” “기술보증기금 구매카드 보증 5억원을 운전자금으로 전환하게 해 달라” “긴급 자금 1억~2억원을 신용 대출받을 수 있게 도와 달라” “중진공 정책자금 원금 상환을 유예해 달라” “키코 문제로 소송을 하고 있는데 여신 만기를 연장할 수 있게 해 달라”….
제도 개선에 대한 목소리도 많았다.
“정책자금 지원 절차를 간소화하고 대출조건도 완화해야 한다” “정책자금 대출 보증서를 신속하게 발급해 달라” “상장업체에도 정책자금 지원해 달라” “근로자 고용장려금 지급 기준을 완화해라” “은행이 수출신용장 네고를 거부한다” “중소기업 해외특허 출원비용 지원을 상향해 달라” “세금 체납에 따른 신용보증 제한 기준을 완화해라”
“정책자금에 담보 또는 보증서 요구가 지나치다”…. 이에 대해 한 자동차 2차 벤더 회사의 사장은 “지금 중소기업이 정부에 바라는 것은 그동안 해결되지 않은 숙원과도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민간 자금과 관련해서는 ‘이기적인 은행’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민간자금과 관련된 민원 138건 중 60%인 82건은 ‘은행이 신규 대출은커녕 대출 연장도 안 해 주고, 금리는 너무 높고, 무리한 담보를 요구한다’는 토로였다.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이렇다.
“은행이 어음할인을 해 주지 않고 단기차입금 연장 불가를 통보해 와 자금회전에 어려움이 있다” “일방적인 대출 연장 불가로 자금난이 가중되고 있다” “주거래 은행에서 비정상적인 담보를 요구한다” “외화차입금에 대한 금융기관의 조기상환 요구와 가산 금리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금리가 많이 내렸는데, 은행이 대출 인하 조정을 해 주지 않는다”.
엔화상승, 키코(KIKO) 문제, 환율 안정 등 외환시장과 관련해 직접적인 어려움을 호소한 민원은 17%, 22건이었다. 이와 관련해서도 정부가 주목해야 할 얘기가 많았다. “공장 신축을 위해 엔화대출을 받아 자금 사정이 어렵다” “KIKO 피해액이 80억원 정도인데 확실한 지원책을 수립해 달라” “수출환어음 수수료를 인하해라” “환율상승으로 제품 수입을 위한 자금 부담을 감당하지 못한다”.
부도 직전에 몰린 중소기업
이 밖에 기술·판로 지원, 세제·제도 개선도 중소기업들의 큰 바람인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765건의 민원 중 ‘기술·판로’ 지원은 17%, 126건, 세제·제도와 관련된 민원은 13%, 100건이었다. 공장부지 확보 등 입지 문제 관련은 54건, 인력난 지원은 38건, 기반시절 확충에 대한 민원은 26건으로 조사됐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2월 기업대출 연체율은 2.31%다. 중소기업 연체율은 0.97%포인트나 급등한 2.67%로 2005년 5월 이후 3년9개월 동안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지난해 국내 은행이 중소기업에 대출한 돈은 45조원. 전년 대비 20조원 줄었다. 또 지난해 4분기 중 부도가 난 중소기업은 649개로 전년 같은 기간보다 50% 급증했다.
올 1월 부도 중소기업은 184개로 작년 1월보다 49개 늘어났다. 지난해 법원에 파산 신청을 한 법인은 전년 대비 45% 늘어난 191개였다. 문제는 지금부터라는 데 있다. 정부의 한 당국자는 “1월 부도율이 0.04%에 머물렀고, 부도업체 수도 2월 들어 줄기 시작했다”고 했지만, 중소기업 현장 사정은 지표보다 더 나쁘다.
지경부의 한 관계자는 “도움을 요청하는 기업 중 도저히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곳이 많다”며 “한시적으로 정부가 지원한다 해도 결국 한계를 넘지 못하고 넘어가는 기업이 늘어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일부에선 5% 이자 특판상품에 돈이 몰리고 대기업 계열 B등급 회사채가 팔리자 “이제 시장에 돈이 돌기 시작했다”고 앞서 진단하고 있다. 하지만 백방으로 떠돌다 정부를 찾은 중소기업 사장들에게 악몽의 시간은 지금부터인 것 같다.
이래서 중소기업은 힘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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