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nt

한 맺힌 ‘철원별곡’에서 희망을 듣다

한 맺힌 ‘철원별곡’에서 희망을 듣다

쇠락의 분기점은 한국전쟁이었다. 한반도의 중심이었던 철원은 동족끼리 쏴댄 총탄과 포탄을 맞고 위용을 잃었다. 비극이 끝난 지 60여 년. 철원은 옛 영화를 되찾기 위해 안간힘이다. DMZ 개발과 녹색성장이 희망의 끈이다. 하지만 제약도, 한계도 많다. 100%에 육박하는 군사시설보호구역은 이들의 의지를 단숨에 꺾는다. ‘DMZ는 살아 있었네’ 8탄 철원 경제편이다.

경계 : 보이는 적과 보이지 않는 적을 향해, 경계는 24시간 365일 이어진다. ⓒ조우혜

새끼 고라니 한 마리가 목을 축인다. 포탄 때문인지 아니면 자연의 힘으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는 웅덩이에 고개를 박고 연방 꼬리를 흔든다. 물맛이 꽤나 달콤한 모양이다. 웅덩이 옆엔 이름 모를 나무들이 곧추서 있다. 바람에 꺾였는지 70도가량 기운 나무는 그래서 더욱 인상적이다.

숫자로 본 철원
면적 898.3㎢
인구 4만8066명(2008년 말)
휴전선 전체의 28.1%(70.2㎞) 관통
예산규모 2333억원
재정자립도 12%
경지면적 1만3373ha, 가구당 294a
쌀 생산량 연 5만5000t, 전국 생산량의 1%
농가 수 전체 가구 중 24%
주택보급 1만6536가구, 보급률 143%
군사시설보호구역 99.5%
사업체 수 3256곳
- 5명 미만 2918곳, 90%
- 100명 이상 4곳, 0.01%
나무를 둘러싸고 있는 습지는 녹색 향연을 이룬다. 철원 평화전망대에서 바라본 DMZ의 풍경은 입을 벌어지게 한다. 왜 이곳을 세계적 생태공간이라고 부르는지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더구나 이곳엔 장관의 ‘옥의 티’ 철책선(군사분계선)도 없다. 대신 표지판이 남과 북을 조용히 나눈다.

자연의 위대함이 이곳을 관통하는 이념갈등을 잠재우는 듯하다. 그러나 아름다움만 있는 것은 아니다. 긴장이 함께 흐른다. 지금은 정전이 아닌 휴전상태. 언제 어디서 도발이 감행될지 모른다. 이곳을 지키는 초병이 북녘 땅을 뚫어지게 노려보는 까닭이다. 절경을 무색하게 할 만한 철통경계다.

철원 DMZ는 이처럼 이중적이다. 아름다움 밑에 비수가 깔려 있다. 흥망성쇠로 점철된 철원의 역사와 너무도 닮았다. 철원은 한반도에서 손꼽히는 선진도시였다. 1939년 인구가 2만 명에 이르고, 음식점 수가 100곳을 훌쩍 넘었을 정도다. 여기서 질문 하나. 한국에서 수돗물을 처음 먹은 곳은 어디일까?

서울일까? 부산일까? 아니다. 바로 철원이다. 상수도 시설이 완벽하게 갖춰져 있었던 도시, 그것이 철원의 옛 모습이다. 운명은 한순간에 바뀌게 마련이다. 영원한 중심도, 영원한 변방도 없다. 한국전쟁은 철원의 영화를 송두리째 앗아갔다. 수를 헤아릴 수 없었던 음식점은 자취를 감췄고, 일터를 잃은 사람들은 정든 둥지를 떠났다.

155마일 휴전선 중 28%가 에워싸고 있는 지금의 철원도 다르지 않다. 철원 경제 성적은 강원도에서도 중하위권이다. 재정규모는 2333억원에 불과하고, 자립도는 12% 남짓이다. 규제도 다른 지역보다 많다. 이런 이유로 오는 이보다 떠나는 사람이 더 많다. 2006년엔 971명(전입 6197명, 전출 7168명), 2007년엔 777명(전입 6016명, 전출 6793명)이 철원을 떠났다.

인구는 2004년 5만 명 밑으로 떨어진 후 계속 감소하고 있다. 현재는 4만8000여 명. 그중 65세 이상 노령인구는 15%에 달한다. 일할 사람이 부족하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일할 곳이 많은 것도 아니다. 2007년 현재 이곳의 사업체 수는 3300여 개. 그중 90%가 5명 미만이다. 100명 이상은 전체의 0.12%인 4곳에 불과하다.




근세 최고 선진도시의 몰락

역설적이지만 철원 경제의 중심은 기업이 아니라 군(軍)이다. 군대가 없으면 철원 경제는 없다. 무엇보다 군인 수(2개 사단 3만여 명)가 철원 군민 수에 버금간다. 군인 가구도 많다. 이들이 철원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상당하다. 이를 엿볼 수 있는 사례 한 토막. 철원은 한반도의 대표적 곡창지대다. 연 5만5000t의 쌀이 생산된다. 전국 생산량의 1%, 강원도의 26%가량이다.

그런데 농가가 많지 않다. 1만8097가구(2007년 현재) 중 24%뿐이다. 군사 관련 가구로 인해 비농가 비율이 높기 때문이다. 더구나 군사시설보호구역이 무려 99.5%에 이른다. 남은 땅 0.05%로 싸움을 벌여야 하는 게 철원의 숙명이자 애환이다. 철원군이 ‘민(民)과 군(軍)은 이웃이고 가족’이라는 슬로건을 내건 이유는 여기에 있다.

다행스럽게도 철원은 군군(郡軍) 협조가 원활하게 이뤄지고 있다. 군관 협의회가 지속적으로 운영되고, 최근엔 정례화도 추진하고 있다. 철원군청이 직접 나서 외출외박 장병을 위한 영화관람 및 온천욕을 지원하고, 모범장병 초청행사도 연다. 군부대 정화사업도 군청이 앞장서 진행한다.

이에 대한 화답으로 군(軍)은 민통선 내 관광지 활성화 계획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군군 협력으로 지역경제를 조금이나마 되살리겠다는 취지다. 하지만 이것만으론 턱없이 부족하다. 옛 영화를 되찾기 위해선 색다른 컨셉트가 필요하다. 철원군이 내세운 기치는 한국전쟁의 상흔을 관광자원으로 십분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철원은 한국전쟁을 통틀어 가장 참혹한 전투가 벌어졌던 지역 중 한 곳이다. 중부전선의 심장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흘 동안 고지의 주인이 24번이나 바뀐 백마고지, 군민 수탈의 본거지인 노동당사 등 전적지가 유독 많다. 이를 관광자원으로 만들어 남북화해와 협력의 기능적·공간적 중심으로 거듭나겠다는 게 철원군의 구상이다.

철원군청이 군비를 투입해 노동당사 주변 3만6306㎡를 공원으로 조성하는 사업을 진행하는 것은 대표적이다. 철원군은 2010년까지 노동당사 주변을 ‘통일의 장’ ‘분단의 장’ ‘화합의 장’으로 꾸미고, 평화공원도 조성할 계획이다.

군(郡) 관계자는 “광복 이후 지역주민에 대한 착취와 고문 등으로 악명 높았던 노동당사가 한국전쟁의 역사를 알려주는 안보교육의 장이 되고 있다”며 “노동당사뿐 아니라 주변 근대문화유적 활용을 통해 평화안보관광의 주요 거점으로 만들겠다”고 했다. 철원평화문화광장 조성사업도 눈길을 끈다.

강원도는 국비와 도비 등 259억원을 들여 21만6595㎡ 부지에 평화기념관(1841㎡), 평화의 광장(3만8853㎡), 시간의 정원(4만4374㎡) 등을 갖춘 평화문화광장을 만들어 2011년 준공할 계획이다. 평화기념관은 한국전쟁의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지역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꾸미고, 시간의 정원엔 전쟁유물 등을 전시한다. 평화광장은 화합과 평화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조성할 방침이다.



철원 郡軍 협조로 부활 나래


김진선 강원지사는 “평화문화광장 조성사업은 남북 협력모델을 제시할 수 있는 철원을 통일 한국의 일번지로 만들기 위해 디딤돌을 놓는 것”이라고 했다.

철원평화문화광장은 올 8월 개관하는 고성 DMZ박물관, 인제 평화생명동산과 함께 DMZ관광의 3대 구심점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이 광장 조성 계획은 안보 전적지 위주의 기존 관광 패턴에 생태적 가치를 담는다는 의미도 있다.

철원군이 나노·플라스마 등 21세기형 녹색산업 육성에 적극적인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면 쉽다. 한국전쟁 이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형성된 천혜의 자연환경을 지키기 위해 친환경 산업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이미 2006년 49만6000㎡ 규모의 철원플라스마 종합연구 및 산업단지 조성에 들어간 철원군은 플라스마 허브단지까지 구축할 방침이다. 군에 따르면 2016년 이후 플라스마 관련 기업이 100여 개 입주할 전망이고, 이에 따라 3000여 명의 고용창출, 연간 8000억원의 매출이 기대된다.

지식경제부의 지역혁신산업기반구축사업으로 선정된 철원 첨단전자빔산업기술이용센터 조성사업 역시 총 178억원을 투입해 추진하고 있다. 이 센터가 완공되면 철원은 전자빔 산업의 성장도시로 거듭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군 관계자는 “지금의 철원은 낡은 철책선이 휘감고 있는 형태”라며 “하지만 DMZ 생태개발, 친환경 산업 육성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면 친환경의 거점으로 떠오를 것”이라고 말했다.



철원 ‘친환경 도시’로 거듭날까

하지만 철원이 넘어야 할 산은 높고 가파르다. 이들 앞엔 한계도, 제약도 많다. 관건은 다름 아닌 평화유지다. 남북관계가 경색되면 철원의 야심 찬 구상은 일장춘몽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철원은 여전히 군사적 요충지. 남북 접경 지역 가운데 확전 가능성이 가장 큰 곳으로 분류된다.

평화와 갈등 사이에서 철원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긴장이 한껏 고조되는 상황에서 군사적 요충지를 관람하겠다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런 곳에 입주하겠다는 기업인은 또 얼마나 있겠는가?
우리는 지금 중부지역 최북단에 서 있다.

이름 하여 성재산 관측소다. 서울과 100㎞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남북 GP 사이의 거리도 650m에 불과하다. 눈앞에 보이는 북녘 오성산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역시 녹색 향연을 방불케 한다. 언뜻 보면 자연의 은혜를 온몸으로 품고 있는 모양새지만 실상은 완전 딴판.

이 산의 중턱엔 북한군이 만들어 놓은 벙커가 가득하다. 벙커가 열리면 대포가 나오고, 자연과 평화는 속절없이 무너질 게 뻔하다. 김진선 지사가 수년간 외쳤던 ‘철원중심론’이 힘을 받지 못하는 이유도 어쩌면 여기에 있다.

그렇기에 이곳에서 새어 나오는 ‘철원별곡’이 유독 절절하게 들리는지 모르겠다. 옛 영화를 그리워하는 한 맺힌 곡소리처럼…. 한반도 해빙 소식을 기다리는 기약 없는 희망가처럼….

용어설명
플라스마란? 기체 상태의 물질에 열을 가하면 이온핵과 자유전자로 이뤄진 입자가 만들어진다. 고체, 액체, 기체와 함께 이를 제4의 물질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플라스마다. 플라스마가 내는 빛을 이용한 플라스마 표시장치는 산업에 폭넓게 사용된다. PDP TV가 대표적이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에클스턴 전 F1 회장 내놓은 69대 경주차 매물 ‘8866억 원’ 추산

2세계 전기차 업계 한파 매섭다…잇단 공장 폐쇄·직원 감축

3'삼성동 집 경매' 정준하..."24% 지연손해금 상식적으로 말 안 돼"

4‘연구원 3명 사망’ 현대차 울산공장·남양연구소 11시간 압수수색

57조 대어 LG CNS, 상장 예심 통과…“내년 초 상장 목표”

6윤 대통령 “백종원 같은 민간 상권기획자 1000명 육성할 것”

7삼성전자, 반도체 위기론 커지더니…핫 하다는 ETF 시장서도 외면

8롯데 뒤흔든 ‘위기설 지라시’…작성·유포자 잡힐까

9박서진, 병역 면제 논란…우울·수면 장애에 가정사까지?

실시간 뉴스

1에클스턴 전 F1 회장 내놓은 69대 경주차 매물 ‘8866억 원’ 추산

2세계 전기차 업계 한파 매섭다…잇단 공장 폐쇄·직원 감축

3'삼성동 집 경매' 정준하..."24% 지연손해금 상식적으로 말 안 돼"

4‘연구원 3명 사망’ 현대차 울산공장·남양연구소 11시간 압수수색

57조 대어 LG CNS, 상장 예심 통과…“내년 초 상장 목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