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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금강산! 고성 717관측소에서 본 낯선 산하

아, 금강산! 고성 717관측소에서 본 낯선 산하

민통선 여섯 번째 기행은 고성으로 가는 길이다. 이제까지 갔던 여행 중 가장 먼 길이다. 마지막으로 파주 지역을 남겨놓긴 했지만, 강화에서 시작한 여행은 어느새 우리를 동해 바닷가 고성에 다다르게 했다.

해금강 지나 금강산으로 717OP에서 건너다 보이는 해금강의 풍광이다. 기암괴석으로 이뤄진 낯설고 기묘한 봉우리들이 보는 이의 눈을 놀라게 한다. ⓒ조우혜

고성으로 떠날 준비를 하면서 새삼 서쪽에서 동쪽으로 휴전선을 따라온 여정을 돌아보게 됐다. 휴전선과 비무장지대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고, 지역에 따라 서울에서 반복해 찾아간 셈이었다. 자유로를 타기도 했고, 3번 국도와 43번 국도를 이용하기도 했고, 경춘고속도로를 달리기도 했다.

길이란 근대의 상징이다. 근대 이전에도 길은 물론 있었다. 하지만 신작로가 열린 이후 길은 근대 문명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길을 통해 인간과 상품과 문명의 교류가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여행을 떠나기 전 길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늘어놓는 것은 이번 기행이 비무장지대와 민통선을 새롭게 발견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길의 의미도 다시 발견하게 했기 때문이다.



진부령을 넘어 고성으로

길이란 인간과 문명을 실어 나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삶이 진행되는 그 자체이기도 하다. 계획한 경로를 조금씩 이탈하면서 삶은 돌연 다른 길 위에 서 있기도 하고, 그 길 위에서 뜻밖의 동행들을 만나게 되는 행운을 누리기도 한다. 필자에게는 이번 민통선 기행이 그랬다.

여행을 더하면서 비무장지대 탐방이라는 본래의 목표 이외에 많은 다른 것을 생각해 보게 됐을 뿐만 아니라, 좋은 선후배들을 만날 수 있었다. 몇 번의 여행을 통해 어느새 우리는 서로의 취향과 어법을 어느 정도 눈치 채기 시작했고, 이제는 얼굴만 봐도 제법 정겨운 사이가 됐다.

고성으로 가기 위해 이른 새벽에 경춘고속도로에 올랐다.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다시 44번 국도를 이용해 홍천과 인제로 내달렸다. 원통에서 아침을 먹은 후 단숨에 진부령에 올랐다. 진부령은 태백산맥 향로봉과 마산봉 사이에 있는 고갯길이다. 금강산, 향로봉, 설악산으로 이어지는 여기 태백산맥 준령은 백두대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금강산과 설악산이 그러하거니와 향로봉 또한 마찬가지다. 최근 백두대간 종주의 출발점을 이루기도 하는 이 향로봉 북쪽에는 휴전선이 지나고 있다. 이 산을 따라 이어지는 고진동 계곡, 진부령 계곡 등은 특히 가을 단풍으로 그 이름이 높을 뿐만 아니라, 건봉산으로 이어지는 계곡 안에는 고찰 건봉사가 있기도 하다.

해발 529m의 진부령은 태백산맥에서 그렇게 높은 고개가 아니다. 하지만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멀리 동해가 훤히 보인다. 한계령, 대관령과 마찬가지로 진부령에서 동해안 바닷가로 내려가는 길은 말 그대로 구곡양장(九曲羊腸)을 이루고 있다. 끝없이 굽이치며 내려가면서 지켜보는 태백산맥의 풍광은 더없이 아름다웠다.

하지만 여기 진부령 지역 역시 한국전쟁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그 흔적의 하나가 진부령 정상에 있는 향로봉지구 전적기념비다. 이 비는 1951년 봄과 여름에 설악산과 향로봉 지구 전투에서 이 지역을 지킨 젊은 무명용사들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전방 지역 어디를 가도 전쟁의 흔적은 이렇게 남아 있다.



동해와 어머니의 추억


1. 금강산 구경은 언제나 고성에서는 금강산이 남의 땅, 남의 동네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아직 금강산 가는 길은 다시 열리지 않았고, 고성은 이 때문에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입고 있다. ⓒ조우혜 2. 민통선 안쪽으로 가는 길 대부분의 지역에서 민통선은 좁은 길의 끝에 세워진 초소로 확인된다. 하지만 동해안 7번 국도의 끝에 있는 민통선은 대형 아치를 방불케 한다. 끊어진 것도 아니요, 이어진 것도 아닌 길이 7번 국도다. ⓒ조우혜
진부령을 다 내려와 바닷가에 닿자 이내 거진항이 눈에 들어왔다. 화진포 해수욕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화진포 해수욕장은 강릉 경포대 해수욕장, 양양 낙산 해수욕장과 함께 동해안을 대표하는 해수욕장 중 하나다.

바다와 연이어 있는 호수도 장관이지만 울창한 송림 앞에 펼쳐진 백사장과 푸른 동해는 언제 봐도 시원함을 안겨준다. 동해의 풍광은 서해 또는 남해의 풍광과 사뭇 다르다.

서해의 풍경에는 수평선 위에 크고 작은 섬들이 아기자기하게 떠 있다면, 동해의 풍경에는 짙고 푸른 물결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언제부턴가 동해 하면 먼저 떠오르는 이가 있다.

가수이자 시인인 하덕규다. 그는 ‘한계령’ ‘사랑일기’ 등을 만들고 부르기도 한 동시에 시집을 출간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그가 부른 ‘내 고향 동해바다’를 특히 좋아해 젊은 시절 무한 반복해 들은 적도 있었다.

“내 고향 바다에는 고기도 많지 / 아주 예쁜 물고기 / 내 고향 바닷물은 깊기도 하지 / 너무너무 파랗지 / … / 내 고향 바닷물은 눈물이지 / 내 어머니 눈물이지 / 철없이 어린 아들 떠나보낸 / 슬픈 눈물이지 / 언제나 돌아갈까 내 고향 / 언제나 찾아가나 내 고향 동해바다.”

이 곡의 백미는 단연 푸른 동해 바닷물이 어머니의 눈물이라는 비유다. 많은 이가 그러하듯 나 역시 10대와 20대 초반 어머니에게 적잖이 반항했던 것 같다. 반항이라기보다 무관심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정작 20대 중반에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나서야 어머니의 존재와 사랑을 새삼 깨닫게 됐다.

하덕규 노래의 멜로디를 마음속으로 따라가면서 7번 국도를 쫓아 올라갔다. 대진항을 지나고 통일전망대를 옆에 둔 채 산길로 들어가 717관측소(OP)를 향했다. 몇 달 전 첫 취재여정에서 김포 애기봉 전망대에 오를 때 동행한 플래닛미디어 김세영 사장은 비무장지대 인근의 전망대 중 가장 인상적인 곳은 아마도 양구 가칠봉 전망대와 고성 금강산 전망대일 거라고 했다.

당시에는 그리 주의 깊게 듣지 않았지만, 지난번 양구 가칠봉 전망대에 올라섰을 때 새삼 김 사장의 말이 옳았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유엔사령부 관할에 있는 717관측소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직하게 말하면, 717관측소는 이곳에 대한 나의 막연한 상상을 뛰어넘었다. 금강산 전망대라고도 불리는 이 관측소에서 바라본 풍경은 이제까지 본 풍경들을 단숨에 압도했다.

왼편으로 멀리 놓여 있다는 비로봉을 포함한 금강산 연봉들은 안타깝게도 날씨가 흐려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정면과 오른편에 펼쳐진 해금강의 풍경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그리 높지 않은 암산들이 줄지어 있고, 나무꾼과 선녀 전설이 깃들어 있다는 호수 감호와 해안가에 우뚝 솟은 구선봉을 마지막으로 산줄기가 바다에 잠기면서 금강산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수려한 풍광을 있는 그대로 펼쳐 보이고 있었다.

구선봉과 감호 717OP에서 본 구선봉과 감호의 모습이다. 선녀와 나무꾼 전설이 어린 호수로 멀리서 보기에도 이 일대의 경관은 장관이다. ⓒ조우혜



717관측소에서 본 금강산

저 구선봉 너머에는 관동팔경의 하나인 삼일포가 있고, 고성군의 주요 도시인 ‘고성’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해안선을 따라 올라가면 저 멀리 원산과 흥남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감회가 새롭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그 마지막 자락이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금강산을 여기 717관측소에 와서야 나는 제대로 보게 된 셈이다.

금강산의 이름은 여럿이다. 봄에는 금강산(金剛山), 여름에는 봉래산(蓬萊山), 가을에는 풍악산(楓岳山), 겨울에는 개골산(豈骨山)으로 불린다. 계절이 여름인지라 봉래산이란 이름으로 불릴 수 있겠지만 내 눈앞에 펼쳐진 해금강의 모습은 잎이 모두 떨어져 바위가 그대로 드러난, 골격이 그대로 보이는 개골산의 이미지였다.

금강산에는 우리의 많은 역사가 깃들어 있다. 수많은 이가 금강산을 찾아갔으며 시, 그림, 그리고 기행문을 남겼다. 조선 시대 겸재 정선과 김홍도의 작품은 물론 지난 20세기 소정 변관식이 그린 금강산 풍경들을 보면 왜 금강산이 해동의 명산으로 불리었는가를 일깨워준다.

이 산에는 금강의 화려함, 봉래의 신비함, 풍악의 아름다움, 그리고 개골의 신선함이 모두 담겨 있다. 개인적으로 금강산 하면 우선 떠오르는 인물은 율곡 이이다. 지식사회학을 부전공으로 하는 필자에게 우리 역사상 가장 문제적인 지식인을 들라면 나는 서슴없이 이이를 가장 앞자리에 놓는다.

삼국 시대에 원효가 있었고, 고려 시대에 지눌도 있었고, 조선 시대에는 퇴계 이황과 다산 정약용도 있었지만, 지식인과 정치가로서의 이이의 영향력은 결코 이들 못지않았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어머니 신사임당이 돌아가자 이이는 삶의 무상함을 느껴 금강산으로 출가했다고 한다.

그리 오래 머무르지 않고 바로 속세로 돌아온 그는 과거시험을 보고 관리이자 학자의 길을 걷는다. 이황과 함께 주자학의 쌍벽을 이뤘고, 사계 김장생과 우암 송시열로 이어지는 기호학파를 열었던 이이에게 출가는 매우 이례적인 삶의 경험이었다. 이러한 그의 행적은 서인과 노론으로 이어진 그의 제자들에게 적잖이 곤혹스러운 경력이었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의 인간적인 풍모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이의 철학인 이기일원론은 주자학의 토착화를 모색한 사상이었다. 또한 그는 현실 정치에도 지속적으로 참여해 사회개혁과 통합을 모색했으며,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으나 이른바 십만양병설을 제시하는 등 부국강병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다.



금강산과 율곡 이이


1. 신종플루 비상 군 부대도 신종플루에 바짝 긴장했다. 취재진이 고성에 가던 날부터 모든 부대 출입 인원을 대상으로 감염 여부 확인을 위한 체온검사가 실시되기 시작했다. ⓒ조우혜 2. 717OP에서 이번 취재와 연재를 맡은 3명의 필진. 왼쪽부터 김호기, 강석훈, 김환기. 봄부터 시작된 이번 특별취재도 여름의 끝자락에 이르러 막바지에 도달했다. ⓒ조우혜
그가 남긴 책들 가운데 나는 특히 『석담일기』를 좋아한다. 당대의 현실과 사상, 그리고 동시대 인물들에 대한 엄정한 평가를 담고 있는 이 일기는 조선 시대라는 시간적 구속을 넘어 국가와 사회, 이론과 현실의 관계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를 일깨워준다.

그래서 마음이 답답하거나 울적할 때면 이 책을 서가에서 꺼내 읽어 보곤 한다. 철학자이자 정치가인 이이가 내게 던진 질문 중 하나는 다름 아닌 애국주의 문제였다.

사회학적으로 애국주의 또는 민족주의는 전쟁 및 국민국가의 형성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사회학자 찰스 틸리가 강조했듯이, 전쟁을 준비하고 대비하는 과정은 국민국가 건설의 핵심적 문제들인 물리적 강제력의 축적과 독점, 자원추출 능력의 신장, 권력의 정당성 제고, 영토의 확정, 국민 개념의 성장, 중앙집권화, 국가조직의 공식적 자율성 확보 등에 크게 기여했다.

애국주의는 바로 이런 전쟁과 국민국가의 형성과 궤를 같이하는바, 국민국가 구성원들에게 문화적 동질성을 부여한다. 우리 역사를 돌아봐도 애국주의와 민족주의 형성에 적잖이 기여한 것은 거시적으로 보면 고려 시대 대몽항쟁과 조선 시대 임진왜란, 그리고 일제 식민지 시대 독립운동이었을 것이다.

이이는 바로 십만양병설 같은 전략을 통해 다른 국가의 침략을 대비하고자 했으며, 각종 부국강병 정책을 통해 조선사회의 개혁을 모색했다. 오늘날과 같은 세계화 시대에도 애국주의는 여전히 뜨거운 쟁점을 이룬다.

인간이 태어나서 교육을 통해 자연스럽게 내면화하는 것 중 하나는 자신이 속한 나라에 대한 사랑, 다시 말해 애국주의다. 나라를 세운 이야기를 듣고, 민족의 역사를 배우며, 국기(國旗)와 국가(國歌) 등 나라를 상징하는 것들을 학습하게 된다.



민통선에서 생각하는 애국주의

대다수 사람에게 나라의 이름은 결코 단순한 호칭이 아니다. 예를 들어 2002년 월드컵에서 전국에 메아리 친 ‘대~한민국’에는 언어로 전달하기 어려운 나라에 대한 사랑이 고도로 응축돼 있었다. 그렇다면 이런 애국주의를 과연 어떻게 봐야 할까. 애국주의는 이른바 세계시민주의와 조화할 수 있을까.

그것이 조화하지 못한다면 애국주의와 세계시민주의 가운데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까. 애국주의는 우리나라만의 이슈가 아니다. 미국에서도 1990년대 초반 애국주의를 둘러싸고 일대 토론이 있었다. MIT대 철학·정치학 교수인 조슈아 코언이 편집한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For Love of Country)』(우리말로는 2003년에 옮겨졌음)은 바로 이 애국주의를 정공법으로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원래 1994년 잡지 ‘보스턴 리뷰’의 애국주의 논쟁에 참여한 11편의 글에 새롭게 쓰인 5편을 덧붙인 것이다. 오늘날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인문학자·사회과학자가 대거 참여한 이 논쟁은 점증하는 세계화 속에서 애국주의의 위상을 다각도로 검토하고 있다. 논쟁의 출발은 시카고대 법학·윤리학 교수인 마사 너스봄이 주창한 세계시민주의다.

그녀에 따르면 우리에게 가장 고귀한 충성의 대상은 인류 공동체며, 우리의 실천적 사고의 제1원칙은 인류 공동체 모든 구성원의 가치를 동등하게 존중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애국주의는 결국 대외 강경주의나 배타적 국가주의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그 대신 세계시민주의가 우리 삶의 일차적인 가치 기준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는 게 그녀의 주장이다.

너스봄의 문제 제기에 대한 대응은 애국주의를 지지하고 세계시민주의를 비판하는 입장, 세계시민주의를 제한적으로 지지하는 입장, 애국주의 대 세계시민주의를 양자택일의 문제로 보지 않는 입장 등 세 흐름으로 나뉘었다. 애국주의 문제가 결코 간단치 않은 것은 너스봄이 말하는 세계시민주의가 실체 없는 현실적 추상이나 보증할 수 없는 낙관주의에 가까운 것이라는 반론 또한 만만치 않았다는 점이다.

세계화가 강제하는 국민국가 간의 비대칭적인 권력 관계를 고려할 때 특히 비서구사회에서는 민족주의 또는 애국주의가 여전히 유효하다고 볼 수 있다. 한 걸음 물러서 생각할 때, 세계화 시대에 애국주의와 세계시민주의 가운데 어느 하나를 지지할 게 아니라 새로운 시각과 생산적 절충이 필요할 것이다.

나라를 무조건 사랑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게 새삼 중요한 과제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관측소에서 오른편 아래쪽을 굽어보니 동해선 남북연결도로가 눈에 들어왔다. 2004년 12월 개통된 이 도로를 통해 금강산 육로관광이 이뤄진다고 한다.

문득 지난번 성재산 관측소에서 굽어본 5번 국도가 떠올랐다. 5번 국도는 막혀 있지만, 7번 국도는 저렇게 이어져 있다. 끊어진 5번 국도 역시 저렇게 7번 국도처럼 다시 이어지게 되면 통일은 그만큼 가까워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717관측소에서 내려와 통일전망대로 향했다.

1984년 문을 연 이 통일전망대는 일반 국민이 쉽게 금강산과 해금강을 구경할 수 있는 곳이다. 전망대에 올라서니 북쪽으로 해금강이 선명히 그리고 수려하게 펼쳐 있었다.

금강산 건봉사 우리나라 4대 가람 중 하나이자 호국의 성지였던 건봉사에서는 지금도 매월 넷째 주 일요일마다 6·25전사자 및 호국영령들을 위한 위령제가 봉행된다. ⓒ김환기



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본 금강산

여름방학인 탓인지 아이들과 함께 구경 온 가족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전망대에 오르고 내리면서 표정을 지켜보니 나이 든 이들은 감회가 깊은 듯하고, 젊은 세대들은 신기해 하며, 아이들은 즐거워하는 듯했다. 한국전쟁의 비극과 분단현실에 대해 세대에 따라 서로 다른 생각들이 표정이 담겨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비록 한국전쟁을 체험하지 못했지만, 동행한 우리들의 마음은 젊은 세대보다 오히려 나이든 세대에 가까운 듯했다. 민통선 기행에서 한두 번 본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북녘 산하의 풍경은 언제나 복합적인 감정을 갖지 않을 수 없게 했다. 전망대에 있는 식당에서 간단히 점심을 한 다음 고진동 계곡으로 가기 위해 건봉사에 가까운 군부대를 찾아가기로 했다.

아침부터 흐린 날씨는 어느새 비를 뿌리고 있었다. 다시 거진항을 거쳐 건봉사 입구까지 왔을 때 빗줄기는 이미 굵어져 있었다. 동행한 이들은 지프로 갈아타 고진동 계곡으로 향하고, 나는 다른 약속 때문에 서울로 돌아와야 했기에 간성으로 향해야 했다. 강석훈 교수가 먼저 돌아가는 내게 아쉬움을 표했다.

생각해 보니 그동안 몇 번의 민통선 기행에서 강 교수는 언제나 함께 있었다. 나이 들어 만난 탓인지 서로 나누는 이야기는 제법 점잖았지만, 정은 이미 상당히 들어 있었다. 예기찮은 길 위에서 만난 따듯한 벗이었다. 간성 버스정류장에서 서울로 오는 고속버스를 탔다.

진부령을 넘고 원통을 지나 소양강 부근의 한 휴게소에 잠시 버스가 멈췄다. 커피를 마시면서 쉬고 있는데, 어디선가 익숙한 ‘소양강 처녀’가 흘러나왔다. 소양강 인근에서 듣는 ‘소양강 처녀’는 남달랐다. 순간 이 노래를 가끔 부르시던 어머니가 떠올랐다.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의아하게 생각한 것은 두견새와 동백꽃이었다. 산새인 두견새는 호수에 없고 추운 소양강변에는 동백꽃도 피지 않기 때문이다.



‘소양강 처녀’를 들으며


1. 긴장 혹은 호기심 최전방 비무장지대 근처에서는 멧돼지가 도처에서 발견된다. 천적이 없는 멧돼지는 인근의 농가에 피해를 준다. ⓒ조우혜 2. 통일전망대 이날 통일전망대에는 유난히 많은 사람이 몰렸다. 통일전망대는 최북단 전망대이자 해금강의 풍광을 만끽할 수 있는 최고의 관광 전망대다. ⓒ조우혜
하지만 어떠랴. 반야월이 쓴 가사가 다소 어설프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노래를 부르시던 그리운 어머니의 모습과 목소리가 지워지지 않는 도장의 붉은 인주처럼 내 기억 속에 선명히 그리고 소중히 남아 있다. 어머니가 부르시던 ‘소양강 처녀’의 멜로디에 어머니를 여의고 금강산으로 들어가던 이이, 고향 바닷물이 어머니의 눈물임을 깨닫는 하덕규의 모습이 겹쳐졌다.

다시 어머니의 모습에 이 땅 산하의 풍경이 중첩되고, 그 위에 지난 몇 개월간 찾아다녔던 민통선과 비무장지대 풍경이 겹쳐지고 있었다. 이 땅의 산하를 사랑하는 것은 다름 아닌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지 않겠는가. 44번 국도의 한 작은 휴게소에서 나는 마음속에 잠자고 있던 애국주의와 만나고 있었다.

호두과자와 콜라를 사서 버스에 올랐다. 이내 소양강 끝자락이 보였다. 푸른 물결, 더없이 짙은 녹음, 창을 두들기는 빗줄기, 덜컹거리는 버스 소리,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바로 자기 자리에서 존재의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존재의 위용은 내게 존재에의 사랑을 일깨우고 있었다.

두고 온 이들이 떠올랐다. 강석훈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이코노미스트 허의도 대표에게 여기 홍천에는 비가 제법 온다는, 서울로 먼저 돌아가게 돼서 미안하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그곳 고진동 계곡에도 비가 많이 온다는, 하룻밤을 같이 보내지 못해 아쉽다는 답신이 이내 돌아왔다. 창을 두들기는 빗줄기가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고성 취재 여행을 안내해 주신 22사단 신지운 중위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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