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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경제에 떠도는 ‘금박 시대’의 유령

미국 경제에 떠도는 ‘금박 시대’의 유령

미국은 건국 초기부터 권력이 막강한 금융 부문을 제어하려고 애썼다. 헌법 제정자들은 자력으로 살아가는 농민들과 소도시 상인들로 구성된 공화국을 꿈꿨다(알렉산더 해밀턴 만 생각이 달랐다). 그들은 뉴욕이 ‘신세계의 런던’이 되는 경우를 철저히 경계했다.

금융 수도와 정치 수도가 합쳐져 부와 재력을 숭배하는 거대도시를 탄생시켜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중앙은행 설립에 그만큼 강하게 반발했고, 두 차례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영국 중앙은행인 뱅크 오브 잉글랜드에 맞먹는 ‘뱅크 오브 유나이티드 스테이츠’가 아직 없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최초의 글로벌 공황인 1873년의 경제 붕괴 후 금본위제의 채택을 둘러싸고 비난이 거셌고, 1913년 연방준비제도 체제가 확립되면서 많은 의심을 받았으며, 대공황부터 1970년대까지 정부가 월스트리트를 엄격히 규제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금융 사상 최악 중의 하나로 꼽히는 위기가 발생한 지 1년이 채 안 된 지금, 미국은 은행가들이 국가 경제를 쥐고 흔들던 19세기 말의 ‘금박 시대’(Gilded Age: 대륙 횡단철도가 개설되고 산업화가 급진전되던 시기로 은행과 독점 재벌의 전성기를 말하며 ‘도금 시대’로 불리기도 한다)로 되돌아간 듯하다.

다름 아닌 JP모건이 이끄는 소수의 월스트리트 거대 금융사가 다시 엄청난 수익을 올리고 수백만 달러의 보너스를 지급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바로 그 소수의 월스트리트 거대 금융사가 일으킨 위기 때문에 미국의 서민 수십만 명이 매달 주택 차압과 정리해고를 당한다. 미국 서민들을 진짜 화나게 하는 것은 소규모 채무자와 대규모 채무자에게 적용되는 법이 완전히 다르다는 점이다.

만약 보통 사람이 직장을 잃고 주택담보대출 상환금 월 1500달러를 못 내면 아무도 구제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시티그룹은 지난해 277억 달러나 적자를 낸 뒤 구제금융으로 450억 달러를 받았다. 100년 전 금융 재벌가인 ‘하우스 오브 로스차일드’는 촉수로 미국 경제를 휘감은 거대한 문어와 비유됐다.

지금은 골드먼 삭스가 ‘거대한 뱀파이어 문어’에 견줘질 차례다. 왜 그럴까? 바로 12개월 전으로 돌아가보면 이해가 된다. 지난해 9월 15일 리먼 브러더스 홀딩스가 무너지면서 뉴욕시의 역사에서 가장 손실이 큰 날이 9·11(2001년의 테러)에서 9·15로 바뀌었다. 아울러 리먼 사태는 1931년 이래 충격파가 가장 큰 미국 은행의 파산이었다.

리먼의 파산은 사실상 한 시대의 종말을 예고한 7개 사건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 사건들은 19일이라는 단기간에 연쇄적으로 발생했다. 가장 먼저, 2008년 9월 7일 양대 국책 주택담보 대출회사인 연방저당협회(FNMA: 일명 ‘패니 메이’)와 연방주택대출저당회사(FHLMC: 일명 ‘프레디 맥’)가 국유화됐다.

둘째, 9월 14일 메릴 린치가 뱅크 오브 아메리카에 인수됐다.

셋째, 9월 15일 리먼이 파산했다.

넷째, 같은 날 머니마켓펀드(MMF)의 대표격인 리저브 프라이머리 펀드가 리먼에서 사들인 무담보 기업어음(CP)의 손실 때문에 순자산 가치가 주당 1달러 아래로 떨어졌다(“broke the buck”).

다섯째, 9월 16일 거대 보험회사 AIG가 연방준비제도의 구제금융 850억 달러를 받았다. CDS(신용부도스와프: 은행 등이 보유한 채권의 발행 기업이나 국가의 부도위험에 대한 노출을 없애기 위해 사는 보험 성격의 파생상품) 시장의 치명적인 연쇄 반응을 막으려는 조치였다.

여섯째, 9월 22일 골드먼 삭스와 모건 스탠리가 은행 지주회사로 전환하면서 투자은행이라는 부류의 금융기관이 멸종했다.

마지막으로 일곱째, 9월 25일 미국 최대의 저축대부조합인 워싱턴 뮤추얼이 미 연방예금보험공사(FDIC)에 인수됐다. 2007년 이후 세계 경제에서 잘못된 일 전부를 리먼의 파산이나 이 7개 사건의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미국 증시는 2007년 10월의 최고점에서 2009년 3월까지 50% 하락했다.

그중 약 5분의 1이 지난해 9월 일어난 사건들 때문에 발생했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금융 피해의 규모는 다른 지표에서 더 잘 드러난다. 리먼 파산 후 24시간 안에 런던은행간금리(LIBOR: 영국 런던에서 우량은행끼리 단기자금을 거래할 때 적용하는 금리)가 3.33%포인트 올라 6.44%가 됐다.

기업어음 시장은 얼어붙었다. 그에 따른 신용경색이 연쇄 반응을 일으켰다. 기업들이 주문을 취소하고 감원하기 시작했다. 국제 무역이 붕괴했다. 마찬가지로 극적이면서도 더 오래 지속되는 여파는 그 위기가 미국 정부 정책에 미친 영향이었다. 9·15 이전엔 미국 의회가 월스트리트에 대규모 구제금융을 승인할 가능성이 희박했다.

헨리 폴슨 재무장관은 리먼 브러더스의 인수를 유도하려고 “정부 자금을 제공하는 일”은 없다고 선언했다. 리먼이 파산한 뒤에도 두 차례의 시도 끝에야 7000억 달러 규모의 부실자산구제프로그램(TARP: 다시 말해 구제금융)이 겨우 의회를 통과했다. 그 이후 우리는 국가 재정에서 댐 붕괴와 유사한 일을 목격했다.

그 결과 미국의 새로운 연방 부채는 10년 뒤 9조 달러에 달할 전망이다. 9·15 이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리먼의 “불안정한 자산” 인수가 불가능하며 “우량 담보”에 한해 대부가 가능하다고 공표했다. 그러나 바로 한 주 뒤 FRB는 사상 최초로 증권을 담보로 받겠다고 발표했다.

다른 조치에는 모든 은행 부채를 FDIC가 보증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그 6개월 전 미 재무부와 FRB는 파산 위기에 처한 베어 스턴스를 JP모건 체이스가 인수토록 중재해 살려냈다. 그 결과 주주들과 채권 소유자들이 손실을 입었지만 완전히 깡통을 차지는 않았다. 그러나 리먼의 경우는 달랐다.

당국이 파산을 막지 않음으로써 금융계에서 대마불사의 환상은 깨졌다. 그러나 불과 하루 뒤 AIG 구제를 시작으로 당국은 엄청난 비용을 들여 그 환상을 원상 복구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제 ‘몸집이 너무 커서 도산시켜선 안 된다’는 발상은 더 이상 환상이 아닌 아주 위험한 현실로 굳어졌다.

4월이 되자 제2차 세계대전 이래 가장 긴 경기침체가 공식화됐다. 국제통화기금(IMF)은 미국 경제가 올해 2.6% 마이너스 성장을 하리라 예측했다. 실업률은 10%에 육박한다. 그런 지표를 보면 아주 급진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러나 현실은 딴판이다. 미국과 유럽에서 금융 규제 강화에 관한 말이 무성하지만 금융 시스템의 가장 중대한 결함은 해결되지 않을 공산이 크다. 오히려 1년 전에 취한 비상 대책들이 그 결함을 더욱 키웠다. 한마디로 말해 “몸집이 너무 커서 도산시키기가 불가능한(too big to fail)” 은행들이다.

그 은행들을 TBTF라고 부르자. 월스트리트의 노련한 시장분석가 헨리 카우프먼에 따르면 1990년과 2008년 사이에 미국 10대 금융사가 국가 전체의 금융자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0%에서 50%로 높아졌다. 은행의 수가 1만5000개 이상에서 대략 8000개 정도로 줄었지만 자산은 더 늘어났다는 의미다.

2007년 말 총 8570억 달러의 주주자본(자기자본)을 가진 15개 금융사가 실질 자산 13조6000억 달러와 부외 자산 5조8000억 달러를 소유했다. 총 차입 비율(leverage ratio: 자산 대 자기자본 비율)이 23 대 1이었다. 아울러 그들은 상정원금(想定元金, notional amount) 216조 달러 규모의 파생상품을 보유했다.

이런 회사들은 한때 월스트리트의 ‘1군 투자은행(bulge bracket)’으로 불렸다. 증권인수단을 주도하는 은행들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 금융사들은 그 정도로 만족하지 못했다. 너무나 비대해진나머지 그중 하나만 무너져도 금융 시스템 자체가 위태로운 상황이 됐다.

지난해의 위기는 이 문제를 두 가지 면으로 악화시켰다. 첫째, 금융사 빅15 중 3개사를 파산시켰다. 베어 스턴스, 메릴 린치, 리먼이 사라졌다. 둘째, 리먼의 파산이 경제적으로 너무나 큰 피해를 끼쳤기 때문에 과거에 의심만 하던 전제가 기정 사실이 돼버렸다. 다시 말해 살아남은 금융사들은 TBTF라는 사실이다.

정부의 전적인 신뢰로 보증된 금융사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동전 던지기를 해서 앞면이 나오면 당연히 그들이 이기고 뒷면이 나오면 오히려 납세자들이 진다. 그 대가로 서민들은 직불카드로 당좌대월 계정에서 1달러만 초과 지출하면 30달러의 수수료를 물어야 한다. 반면 JP모건과 골드먼 삭스의 경영진은 수백만 달러의 상여금을 받는다.

지금까지 제안된 어떤 규제 개혁도 TBTF의 핵심 문제를 다루지 않았다. 티머시 가이트너 재무장관이 지난 여름 동안 무엇을 제안했는지 살펴보자.

• “FRB는 금융 시스템에 중요한 금융사들(다시 말해 TBTF)을 관리하는 시스템 위험 규제자가 돼야 한다.” 하지만 그게 FRB의 원래 임무 아닌가?

• “증권화된 상품을 만들어내는 기관은 적어도 판매하는 증권의 5%를 직접 투자로 보유해야 한다.” 아니, 베어 스턴스와 리먼이 그랬던 것처럼 말인가?

• “소비자금융보호청(CFPA)을 신설해야 한다.” 그렇다면 다른 규제기관들은 무얼 했나? 물론 그렇지, TBTF를 보호하느라 정신이 없었지.

• “파산하는 은행을 신속히 폐쇄하는 ‘결정권’이 신설돼야 한다.” 하지만 그런 권한은 이미 존재하며 1984년 레이건 대통령 당시 컨티넨털 일리노이 은행이 파산했을 때 사용됐지 않은가?

• “연방 규제당국은 금융사 경영진의 보상 규정이 장기적인 주주 가치를 감안하도록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하지만 그게 도대체 뭘까?

최근 열린 G20 재무장관 회의 결과에서도 별다른 대책은 나오지 않았다. 한가지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면 “경기회복이 확실해지면” TBTF는 자본금을 더 확보해 차입금을 줄여야 한다고 명문화했다는 사실이다. 그 정도의 제안에도 금융사들은 반발했다.

G20 공동성명서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JP모건은 제안된 규제로 독일의 도이체방크, 미국의 골드먼 삭스, 영국의 바클레이스의 투자은행 사업 수익이 3분의 1 정도 줄어들지 모른다고 경고하는 보고서를 냈다. 사실 경영진 보상 문제는 관심을 딴 데로 돌리려는 술책일지도 모른다.

정치인들이 금융사 경영진의 상여금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골드먼 삭스의 CEO 로이드 블랭크페인이 ‘배관공 조’(지난해 대선 당시 존 매케인 공화당 후보가 오바마의 세금 정책을 비판하려고 동원한 평범한 서민)가 받는 보수의 2000배를 상여금으로 챙긴다는 사실을 거론하면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지기 때문이다.

상여금 문제는 뿌리 깊은 문제의 증상일 뿐 원인이 결코 아니다. TBTF가 천문학적인 상여금을 지급할 여력이 있는 이유는 자기 비용을 한 푼도 들이지 않은 채 파산을 감수하며 위험한 사업을 벌였기 때문이다. 한번 생각해보라. 골드먼 삭스가 지난 2분기에 34억 달러라는 수익을 어떻게 냈나?

차입금을 높여 더 많은 위험을 감수했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이 대형 은행을 더욱 단단히 휘어잡겠다고 말만 하는 제스처 게임은 더는 먹히지 않는다. 사실 그들은 애초에 패니 메이와 프레디 맥을 규제하는 임무를 띠었던 사람이었다. 지금 필요한 일은 금융 서비스 부문에 독점 금지법을 실질적으로 적용하고, ‘몸집이 너무 커서 파산시키기가 불가능하다’는 환상을 깨뜨리는 조치다.

특히 연방 보증이 은행 저축에만 적용되며 은행 채권 보유자들은 보호 대상에서 제외된다고 못을 박아야 한다. 은행이 파산하면 채권자들이 타격을 받아야지 납세자들이 피해를 봐서는 안 된다. 이런 조치 중 하나라도 제대로 시행될까? 현재로서는 가망이 없다고 본다.

정치적 의지가 신속히 수그러들고, 건강보험 개혁이 풀기 힘든 난제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금융사가 최대의 로비스트며 최대의 정치자금 기부자인지 생각해보라. 다름 아닌 TBTF다. 하지만 현 상태가 지속되면 금융기관과 정치인을 향한 대중의 분노만 커질 뿐이다.

미국 역사에서 그런 반발이 한 차례 이상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은행 전쟁’이다. 1816년 설립된 제2차 미합중국은행은 ‘금권’에 반발한 거센 정치 운동의 대상이 됐다. 메릴랜드주가 위헌 소송을 제기했지만 살아 남았던 그 은행을 앤드루 잭슨 대통령이 폐쇄했다. 잭슨은 ‘거대한 괴물’ 공격이 표심을 잡는데 큰 도움이 된다는 점을 간파했다.

제2차 미합중국은행의 니컬러스 비들 행장이 1832년 은행사업 인가의 갱신을 신청하자 잭슨은 “이 은행이 나를 죽이려 들지만 내가 이 은행을 죽이겠다”며 거부권을 행사했다. 비들은 그 보복으로 금융 공황을 일으키려 했지만 잭슨이 결국 이겼다. 1836년 그 은행은 공공 기관의 지위를 잃었다. 정부의 지원이 끊기자 오래 못 갔다.

1836년 10월 지불 중단을 선언했고 1841년 완전히 문을 닫았다. TBTF여, 조심하라. 하지만 잭슨이여, 미국이 필요로 하는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나?

[필자는 하버드대의 경제사 교수로 뉴스위크 기고자다. 그의 신저 ‘세계의 금융 역사(The Ascent of Money: A Financial History of the World)’가 곧 펭귄 프레스의 보급판으로 나올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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