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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구전략은 시기상조다

출구전략은 시기상조다

미국 역사상 가장 오래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직을 역임했던 윌리엄 맥체스니 마틴은 FRB의 역할이 “파티가 달아오르기 시작할 때 술잔을 치우는 것”이라고 농담조로 말한 적이 있다. 요즘 세계 지도자들은 그의 말을 너무 충실히 따르지 않나 싶다.

이들은 지금 신음하고 있는 경제보다 미래의 비이성적 열광에 더 신경을 쓰는 듯하다. 최근 페어 슈타인브뤼크 독일 재무장관은 지난 1년 시장에 풀렸던 수십조원의 경기부양 자금을 회수하는 ‘출구전략’을 마련하기 위해 전 세계 지도자가 공조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러자 호주와 한국이 공동으로 “위기 대책을 해제하는” 구체적 방안을 제시했다.

정도는 다르지만, 미국과 영국, 프랑스를 비롯한 주요 국가도 지난해 펼쳤던 저금리와 소비자 신용 확대 등의 팽창 정책 종결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두 우려되는 발언이다. 경기부양책을 지나치게 빨리 중단할 경우, 파티는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술잔을 치우는 격이다.

정책 입안자들이 서둘러 돈줄을 죄려는 가장 큰 이유는 인플레이션의 발생 위험 때문이다. 1970년대 세계 경제를 괴롭혔던 인플레이션은 80년대 들어서야 진정됐고, 그 이후 각국 중앙은행과 경제 정책입안자들은 인플레이션 재발을 막으려고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지난 12개월 동안은 불경기와 싸우려고 정책 기조를 바꿔 금리를 큰 폭으로 인하하고 시중에 돈을 풀어 경기를 부양했으며, 통화 발행량을 늘려 금융산업의 신용 경색을 완화하는 데 집중했다. 그러다 보니 통화량과 부채 급증으로 세계 경제가 70년대로 후퇴할지 모른다는 우려 섞인 전망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려면 먼저 수요가 급증해야 한다. 벤 버냉키 FRB 의장이 불경기의 종식을 선언할 태세고, 미국과 유럽의 실업률 급등세도 점점 안정되지만, 단기 혹은 중기적으로 인플레이션 발생 가능성이 있다고 보기엔 선진국의 경기가 아직 불안하다. 물가 상승은 수요가 너무 많은데 공급이 따라가지 못할 때 발생한다.

그러나 현재 상황은 어떤가? 공장은 놀고 창고엔 재고가 가득하며, 정리해고 후 일자리를 찾지 못한 근로자들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구직 사이트 대신 TV 앞에서 드라마를 보며 시간을 때운다. 블룸버그 보도에 따르면 미국의 제조시설 가동률은 8월에 70%밖에 되지 않았다.

장기 평균치 80%보다 낮으며, 심지어 지난 불경기 때보다 낮은 수치다. 캐나다의 경우 공장 가동률은 미국보다 낮고, 프랑스와 영국, 독일은 미국보다 조금 높은 수준이다. 노동 시장 또한 침체되어 있다. 이번 경기침체로 미국에서만 74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1991년 이후 불경기 때마다 실업률이 정상 수준으로 회복되는 속도가 느려진 점을 감안할 때, 침체된 노동 시장이 활기를 되찾기까지는 수 년 이상이 걸릴지도 모른다. 인플레이션의 경우, 기대심리가 중요하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연간 10%의 비용 상승을 예상하는 공장주는 가격을 그만큼 인상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물가도 덩달아 뛰게 된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그런 조짐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금값을 온스당 1000달러로 끌어 올린 최근의 ‘골드 러시’ 현상도 투자자의 인플레 우려 때문으로 해석하기엔 무리다. 물론 금이 인플레이션에 대한 도피처가 되어주기도 하지만, 다양한 불확실성에 대한 방어 수단도 함께 되기 때문에 투자자가 금을 매입하는 진짜 이유가 인플레이션 때문이라고 단언하기 힘들다.

금보다는 채권 가격이 더 정확한 기준을 제공하는데, 이를 분석하면 향후 10년간 평균보다 낮은 연1.85%의 물가 상승률이 예상된다. 초보운전자라면 다 알겠지만 액셀보다는 브레이크를 밟는 게 훨씬 쉽다. 경기부양을 위해 FRB가 즐겨 사용하는 방법은 금리 인하다. 경제학자인 폴 크루그먼이 지적한 대로, 금리는 0% 이하로 떨어질 수 없다.

그 이하로 떨어지면 빌려준 사람이 빌려간 사람에게 돈을 갚아야 하는 이상한 상황이 발생한다. 그런데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많은 선진국에서 금리는 이미 바닥을 쳤다. 각국의 중앙 은행은 화살통의 화살을 이미 다 써버렸다. 인플레이션과 싸운다는 명목으로 금리를 조기 인상하면 지금까지의 노력이 다 허사가 되고 정작 중요할 때 쏠 화살은 하나도 남지 않는다.

슈타인브뤼크 독일 재무장관과 그의 동료들이 멀리 내다보고 미래에 대비했겠지만, 자신들의 발언이 세계 경제에 미칠 영향을 좀 더 신중히 생각해야 한다. G7 국가의 올해 GDP는 축소될 전망이며, 그 폭이 매우 큰 국가도 있을 것이다. 이들 국가에서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가능성은 거의 없거나 전무하다. 아직은 파티 참가자들이 칵테일에 취할까 봐 두려워할 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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