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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 ‘위기 후 로드맵’ 마련할 때

한국경제 ‘위기 후 로드맵’ 마련할 때

이번 금융위기는 외풍 탓이 컸지만, 위기 전(pre-crisis) 한국 경제 시스템은 그 골을 깊게 했다. 그렇다면 바꾸는 게 당연하다. 돈을 풀어 경기를 일으키는 것만큼 ‘위기 후(post-crisis)’를 대비하는 것이 지금 당장 중요하다.

지난 1년간 한국 정부는 GDP 대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돈을 신속하고 집중적으로 경기 부양에 쏟아부었다. 덕분에 올해 경제성장률은 예상과 달리 ‘마이너스’를 면하게 될 가능성이 커졌다. 겨울은 가고 봄이 오는가? 확실치가 않다. 설령 봄이 온다 해도 평년 기온보다 낮은 봄이 오래 이어질 가능성에 많은 경제 전문가가 무게를 둔다.

그 와중에 위기는 다시 찾아올 수 있다. 그래서 지금 정부가 해야 할 ‘그 무엇’이 중요하다. 바로 금융위기 이후를 대비한 전략 마련이다. 전략 수립의 방향은 크게 두 가지여야 한다. 첫째는 위기 극복을 위해 정부가 쓴 비상조치를 거둬들일 때 나타날 수 있는 후유증을 최소화하는 전략이다.

또 하나는 외생 변수에 너무 쉽게 출렁거리는 우리 경제의 체질과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다. 첫 번째 전략은 출구전략과 관련이 깊다. 현재 진행 중인 유동성 회수 작업을 시작으로 중소기업 지원 정상화, 종국에는 기준금리 인상과 재정건전성 강화 정책을 펼칠 시점을 잘 판단해야 한다.

가령 출구전략 시행 과정에서 가계 및 중소기업 등 취약해질 수 있는 부분에 대한 선제조치를 마련해 둬야 한다. 정부는 “출구전략 논의 자체가 시기상조”라고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정부 내에서 이미 다각적인 정책을 마련 중이다.



위기가 끝나도 위기는 또 온다

정말 중요한 것은 두 번째다. 외부 충격에 출렁이는 외환시장 시스템, 지나치게 높은 대외의존 경제, 부실한 금융 시스템, 효과 없는 민간 투자 및 고용 정책, 빈약한 사회안전망…. 이번 위기는 그동안 동어반복됐던 경제 체질과 시스템 개선이 왜 절실한지 여실히 보여줬다.

금융위기 발생 직후 우리나라는 순식간에 ‘고위험군 국가’로 전락했다. 이번 위기를 계기 삼아 당장 바꾸고 고치고 중장기 전략을 마련하지 않으면, 외풍이 불 때마다 한국 경제는 추풍낙엽 신세를 면키 어렵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다. 우리나라가 국제사회에서 경기 회복의 모델 국가로 찬사를 받고 있다지만, 지금 한국 경제 스트레스 테스트(stress-test)를 한다고 가정해 보자.

지난해 8~9월과 비슷한 상황을 현재 한국 경제에 적용해 보자는 것이다. 미국의 대형 금융기관이 파산하고, 동유럽 은행이 무너지고, 세계 경제가 더블딥에 빠진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단기외채를 비롯한 달러는 썰물처럼 빠져나갈 것이다. 외국인이 증시에서 이탈하면서 주가는 폭락할 것이다. 환율은 요동칠 것이다.

일부 기업은 키코(KIKO)의 악몽에 빠질 수 있다. 수출 시장은 얼어붙고, 파산하는 기업이 늘고 실업자가 늘어날 것이다. 정부 당국자들은 또 여기저기 달러를 꾸러 다니고, 한국의 CDS 프리미엄은 치솟을 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3월 위기설’이 불거질 것이다. 그렇다면 지난 1년 동안 우리 정부는 무엇을 했나?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얼마 전 한 방송사가 주최하는 강평에 출연해 “과도한 대외의존도와 취약한 내수시장 등 우리 경제의 구조적 문제점에 인식을 같이한다”고 말했다. 중요한 것은 인식을 같이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정부는 무엇을 할 것인가다. 이와 관련해 정갑영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최근 열린 한 경제 심포지엄에 패널로 참석해 이런 말을 했다.

“정부는 출구전략 전에 할 일이 많다. 위기 속에 정부는 단지 돈만 풀었지 제도 개선은 하지 않았다. 가령 민간 자율투자가 늘 수 있도록 제도를 바꾸는 것이 기업 구조조정보다 먼저다. 이것은 돈 안 들이고 할 수 있는 경기 부양책이다.”
▎국내 외환시장은 위기 때마다 출렁인다. 지난 10월 8일 원-달러 환율은 지난해 9월 이후 처음으로 1160원대에 거래됐다. 올 3월 초에는 1590원대였다.

▎국내 외환시장은 위기 때마다 출렁인다. 지난 10월 8일 원-달러 환율은 지난해 9월 이후 처음으로 1160원대에 거래됐다. 올 3월 초에는 1590원대였다.

정 교수의 말 속에 위기 후 한국 경제를 대비하는 해법이 담겨 있다. 우리 정부는 올 상반기에만 170조원의 재정을 풀었다. 전년 대비 60%나 늘어난 것이다.

중소기업에 100% 신용보증을 하는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정책도 펼쳤다. 그러나 정작 위기 전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내놓은 것이 별로 없다. 말의 성찬뿐이었다.

외환시장만 봐도 그렇다. 외환위기 이후 원-달러 환율은 쏠림 현상의 반복이었다. 이번 금융위기에도 그랬다. 지난 3월 장중 1597원을 찍었던 달러당 원화가치는 지난 10월 중순에 1164원까지 급등했다.

왜 환율 쏠림 현상이 반복될까? 이유는 정부도 알고 기업도 안다. 주식·채권시장은 들고 나가는 외국인 비중이 너무 높다. 막무가내로 끌어다 쓰는 단기외채는 외부 충격이 올 때마다 ‘위기설’을 부른다. 경제 규모에 비해 외환시장 거래는 미흡하고, 그나마 거의 대부분 달러로만 거래된다.

그렇다면 바꿔야 한다. 개선안은 아마도 금융당국자 책상에 수북이 쌓여 있을 것이다. 몇 가지만 보자. 일단 단기외채를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부터 마련해야 한다. 지난 5년간 단기외채는 2.6배나 증가했다. 총외채나 외환보유액 대비 단기 외채 비중도 너무 높다. 단기 외채는 ‘위기설’의 배후였고, 그 자체로 ‘위기의 원인’이었다.

그 때문에 “단기외채 총량제를 도입하고 은행별로 외화부채 비율 상한을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컸다. 외국계 은행 지점의 외화유동성을 관리감독할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하다는 점도 외환 전문가들이 오래 지적해 온 문제다.

이와 함께 헤지펀드 등 핫머니에 대한 규제, 지난해 기준으로 0.8%에 불과한 수출 시 원화결제 통화 비중(달러는 82%, 유로는 8%) 확대, 현재 원-달러 직거래 시장만 개설돼 있는 외환시장에 엔화, 위안화, 유로화 등 다른 통화 직거래 시장 개설 및 육성도 지금부터 대책을 마련해야 할 문제다.



시장 예상 넘는 서비스산업 육성책 내놔야동시에 전체 외환거래의 절반을 외은 지점이 차지하는 현실을 감안할 때, 국내 금융권이나 개인의 외환거래 시장 참여를 확대 유도할 방책도 필요하다. 외환보유액을 점진적으로 증대하고, 상시적인 국제 통화 스와프를 확대하기 위한 준비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정부 내에 ‘외화유동성 규제=후진적 정책’이라는 인식이 팽배하다는 게 걸림돌이다.

재정부 측은 “정부 내에 외환제도 개선을 목표로 태스크포스팀이 구성돼 있다”며 “11월 중 결과가 발표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시장은 큰 기대를 하지 않는 분위기다. 한 민간경제연구소 관계자는 “내년에 G20 의장국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정부가 외은 지점 규제나 외환시장에 대한 대폭적인 감독 강화 정책을 내놓기는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과도하게 개입해서도 안 되지만, 외환시장을 시장에만 맡겨서는 곤란하다는 것이 숱하게 증명됐다. 금융당국이 국내 은행에 “장기외채 비중을 늘리라”고 주문하자, 366~371일짜리 외화차입금 규모를 대폭 늘리는 게 국내 은행이다(백재현 민주당 의원). 단기외채 통계에는 잡히지 않지만 사실상 무늬만 장기외채인 편법을 쓴 것이다.

문제는 이런 행태가 외화건전성 착시를 불러일으켜 정부의 정책 판단에 혼선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정부가 전향적인 정책 연구를 통해 단기외채와 외화유동성을 관리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지긋지긋한 ‘3월·9월 위기설’은 되풀이되고, 한국 경제는 그때마다 헐떡거릴 것이다.

대외 의존 경제는 또 어떤가? 경제 예측이란 것이 원래 맞히기 힘든 것이지만, 한국 경제 전망은 특히나 어렵다. 유가나 환율, 세계 경기 같은 외생 변수가 미치는 영향이 워낙 크기 때문이다. 대외의존도가 높은 탓이다. 해답은 진작에 나와 있다. 자원 빈국에 내수기반이 취약한 우리나라가 수출주도형 성장을 포기하기는 어렵다.

그 때문에 일본은 물론 중국보다도 낮은 외화가득률(상품수출가액에서 수입원자재 가액을 뺀 금액)을 높이기 위해 부품소재 산업 육성에 파격적인 대안을 내놓고, 여전히 60%에 달하는 수출 상위 10개국에 대한 비중을 낮추면서 수출시장 다변화를 위해 정부가 기업을 지원할 일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외환위기 때 체질 바꾼 대기업이 교훈동시에 내수시장은 키울 수 있는 만큼 키워야 한다. 핵심은 서비스 산업이다. 정부 생각도 그렇다. 하지만 지난 9월 중순 정부가 내놓은 내수 확충 방안을 보면 실망스럽다. 고소득층의 해외 소비와 외국인의 국내 소비를 활성화한다는 것이 골자인데, 핵심이 없는 백화점식 나열이었다는 평을 받았다.

이와 관련해 아누프 싱 IMF 아시아·태평양 담당 국장은 최근 열린 아시아지역 경제 전망 콘퍼런스에서 “한국은 소비만 늘리는 데 그치지 말고 투자를 늘리고 노동생산성과 서비스 부문 향상에 노력해야 한다”며 “생산성이 제조업은 높지만 서비스업이 낮아 자원 재분배를 통해 노동시장, 중소기업 등 다양한 개혁정책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많은 경제 전문가는 “서비스산업 육성을 내수 진작뿐 아니라 전략적 수출품목으로 키우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를 위해선 시장의 예상을 뛰어넘는 서비스업 육성 정책이 마련돼야 한다. 일단 정부는 의료와 교육 분야의 획기적인 규제완화를 약속해 놓은 상태다.

산업 금융을 살리는 정책도 시급하다. 특히 은행 대출에 대한 의존도가 절대적인 중소기업이 쉽게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간접금융시장을 대폭 손질해야 한다. 지역금융 육성이 그중 하나다. 이 밖에도 ‘다시는 위기에 쉽게 꺾이지 않는 경제’를 위해 정부가 할 일은 너무 많다.

경제 전문가들은 이참에 정부가 포괄적인 ‘포스트 크라이시스 로드맵’을 만들 것을 주문한다. 연말까지로 연장된 청와대 비상경제대책회의가 그 역할을 해도 좋을 것이다.

급한 불은 껐지만, 불씨를 살려두면 또 대형 화재로 번질 수 있다. 숙취를 아침 해장술로 달래면 건강에 독이 되듯, 위기 때마다 막대한 재정지출로 막는 것은 한계가 있다(김경원 CJ경영연구소장은 이를 ‘해장술 사이클’이라고 표현했다). 우리는 외환위기 때 눈물을 머금고 체질을 바꾼 국내 대기업이 이번 위기를 얼마나 잘 버티고 있는지 지켜봤다. 한국 경제도 그렇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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