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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회생 몸부림인가, 대재앙의 전주곡인가

경제회생 몸부림인가, 대재앙의 전주곡인가

▎북한의 5000원권 새 지폐.

▎북한의 5000원권 새 지폐.

#1 북한에 김정일 비판 전단을 공기주머니에 넣어 바람에 실어 보내는 일을 해 온 박상학 자유북한운동연합 대표는 요즘 큰 고민거리가 생겼다.

자신이 보관해 온 북한 돈 400만원이 모두 휴지조각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박 대표는 그동안 대북 전단이 북한 주민들에게 보다 잘 전달되도록 북한 지폐를 함께 넣어 날려 보냈었다.

하지만 북한 당국이 예고 없이 화폐개혁 조치를 전격적으로 시행함으로써 새 돈을 구해야 할 처지가 됐다. 지금 보유한 북한 5000원권 지폐 800장 다발은 무용지물이다. “나는 북한 화폐개혁으로 피해를 본 유일한 한국인”이라고 그는 말했다.

#2 지난해 12월 24일 남포시 천리마제강연합기업소 노동자 식당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들어섰다. 평양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이 곳은 한국의 포스코에 해당하는 북한의 대표적 철강생산 공장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공장의 가동상황에 만족스러워했던 그의 안색이 갑자기 달라졌다.

김 위원장은 “식당이 추운 데서는 아무리 영양가가 높은 식사를 해도 소용이 없다”고 공장 지배인을 나무랐다. 그러고는 “식당 식사 칸의 온도를 정상 상태로 올려놓으라”고 지시했다.

김정일 현지지도 후 이곳에서는 간부들이 노동자에게 ‘사죄’하는 일이 벌어졌다고 북한 방송은 전했다. 이 에피소드는 국가대표급 제철소 식당 난방문제까지 최고지도자가 직접 챙겨야 하는 북한 경제의 한계상황을 보여준다.

#3 평양에서 발간되는 경제이론 전문 계간지인 ‘경제연구’ 최근호(2009년 제3호로 가을호에 해당)는 “화폐 숭배주의 사상의 잔재가 되살아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돈만 아는 낡은 사상을 없애기 위한 투쟁”을 벌여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러면서 “화폐유통에 대한 계획화 사업”의 필요성을 부각시켰다. 대북 정보 분석가들은 북한의 전격적인 화폐개혁 조치 직후 이 논문에 다시 주목했다. 화폐개혁에 대한 마지막 경고를 담았던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왔다.

김정일 위원장이 전격 단행한 화폐개혁의 후폭풍이 북한 전역을 거세게 뒤흔든다. 17년 만에 이뤄진 화폐개혁 조치로 북한은 적지 않은 혼돈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게 정부 당국자들의 전언이다.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 김정일 체제 들어서 처음 맞는 경제 대변혁이다.

한 정부 당국자는 “핵 실험보다 북한 주민이나 내부에 미칠 충격파가 크게 느껴질 사안”이라고 말했다. 좀처럼 체제 내부 문제에 부정적 언급을 하지 않는 북한도 혼돈스런 분위기를 부분적으로 인정했다. 북한 중앙은행 조성현 책임부원은 4일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하루 이틀 정도는 혼란이 조성될 수 있다는 것을 예견했다”고 말했다.

이번 조치의 파장이 적지 않으리라는 예상을 북한 당국도 했었다는 얘기다. 한국 정부도 화폐개혁의 향배를 예의주시한다. 북한 경제는 물론 김정일 체제 전반에 미칠 영향이 적지 않으리라는 판단에서다. 국가정보원은 북한의 화폐개혁 징후를 시행 일주일 전에 미리 감지해 분석과 대응책을 세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정부가 북한의 화폐개혁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음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현재까지 파악된 북한의 화폐개혁 내용은 네 가지 정도로 정리된다. 첫째로 화폐의 교환은 시행 당일인 11월 30일부터 12월 6일까지 7일간으로 했다. 이미 시한이 지나 더 이상 구권을 바꾸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다만 일부 지역의 경우 신권 도착이 늦어져 ‘도착 후 1주일’로 수정된 곳도 있다고 한다. 교환은 세대 단위로 했고 거주지 화폐교환소에서 이뤄졌다. 둘째, 구권과 신권 교환은 100대 1의 비율로 이뤄졌다. 단, 은행에 예금된 돈은 10대 1의 비율로 해 국가를 믿고 돈을 예치했던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도록 했다.

셋째, 세대당 구권 기준 10만원 선으로 교환 한도액을 제한했다. 새 돈 1000원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여기에 세대 인원수 1인당 500원을 무상 지급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한도 초과금액은 교환증서를 발행했다.

▎지난해 열린 ‘제11차 평양 봄철 국제상품전람회’ 전경.

▎지난해 열린 ‘제11차 평양 봄철 국제상품전람회’ 전경.

넷째, 외화의 사용을 전면 금지했다. 그동안 외화상점이나 식당뿐 아니라 일반 주민이 드나들 수 있는 호텔 등에서 달러나 위안화, 유로 등을 사용했지만 이젠 외국인도 북한 돈을 바꿔서 사용해야 한다.

국가가 달러화 통제를 강화한 것이다. 북한이 화폐개혁이라는 극약처방을 내린 것은 김정일 시대 들어 본격화한 경제부문의 문제점을 더는 방치하기 어렵다는 판단에 따랐다고 볼 수 있다. 2002년 이른바 7·1 경제관리 개선조치 이후 심화된 인플레이션이 가장 심각한 문제였다.

7·1조치는 물가와 임금을 인상하고 식량과 생필품의 배급제를 단계적으로 폐지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획기적인 경제개혁 조치였다. 당시 임금은 평균 18배 올랐고 달러당 북한 돈 2원대이던 환율이 150원 수준으로 조정됐다.

2001년 10월 김정일 위원장이 당과 경제기관 간부들에게 “사회주의 원칙을 고수하면서 최대의 실리를 도모하고 변화하는 현실에 맞게 경제관리 방식을 혁신하라”고 지시한 데 따른 결정이었다. 하지만 걷잡을 수 없는 부작용이 생겼다. 100원 대이던 근로자 평균 월급이 3000원 수준으로 뛰어올랐지만 물가도 덩달아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쌀 1kg이 개인시장에서 2200원까지 오를 정도였다. 암달러는 달러당 3800원까지 뛰어올라 월급이 1달러 정도에 해당하는 이상현상이 나타났다. 실제로는 월 4만~5만원이 있어야 한 가구가 생활을 할 수 있는 상황이 됐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주민들이 너도나도 장사판에 뛰어들었다.

민간경제가 번창하면서 주민들이 공장이나 협동농장에서 일하기보다 개인장사에 골몰하는 광경이 벌어졌다. 국가가 시장을 통제하기 어려워진 상황으로까지 치달았다. 2007년 10월부터 장마당에서 불법적 상거래 행위를 단속하고 50세 이상 부녀자에게만 장사를 허용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지만 모두가 허사였다.

북한 당국이 화폐개혁 조치를 하면서 주요 타깃으로 정한 이들은 신흥자본가 그룹으로 간주되는 속칭 ‘돈주’ 계층이다. 이들은 장사는 물론 제조, 유통업에까지 뛰어들면서 떼돈을 벌어들여 새로운 권력집단으로 떠오르고 있다. 심지어 유력 공장이나 기업소를 장악해 국가가 정한 품목 대신 자신들이 장사하는 데 필요한 물품을 생산케 하는 일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북한의 거대기업인 조선부강회사 전승훈 사장은 부강무역과 부강오토바이 등 8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다. 연간 매출이 1억5000만 달러에 이른다. 50대 초반인 전 사장은 김일성종합대에서 영어교수를 지낸 엘리트에 전명수 전 중국대사의 아들로서 배경도 좋다. 동생 전영훈은 노동당 재정경리부 산하 회사의 사장으로 북한 디젤유 수입을 독점하고 있다.

전 사장 형제처럼 좋은 가문과 학벌을 배경으로 엄청난 부를 쌓은 특권층이 늘고 있다고 정부 당국은 분석한다. 결국 7·1조치 이후 나타난 이런 문제점들을 보고 받은 김정일 위원장이 최종결심을 하면서 화폐개혁이란 극한 처방이 나왔으리란 게 정부 당국과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이번 화폐개혁은 “시장 세력에 대응해 국가 통제체제 회귀를 위한 북한 정권의 금융계엄령”이라고 조봉현 기업은행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말했다. 하지만 이런 충격적인 처방책으로 식량과 원자재, 달러 부족 등 이른바 ‘3난’(難)으로 대표되는 북한 경제가 회생할지는 아직 미지수다.

무엇보다 갑작스런 조치로 억척스레 일해 모은 돈을 날려버린 개인장사꾼이나 주민들의 민심이반 현상이 변수다. 두 달 치 생활비에 해당하는 10만원만 바꿔주고 나머지는 사실상 몰수조치를 취했다는 점이 문제다. 정광민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연구위원은 “시장에서 민간이 축적한 부를 국가가 약탈하는 행위”라고 이번 조치를 평가했다.

주민 불만을 무마하려고 1인당 쌀 7kg을 배급했다는 이야기도 나오지만 앙금은 쉬 가라앉지 않을 듯하다. 달러 등 외화의 전면 사용금지는 화폐개혁 조치의 무풍지대인 외화축재 특권층을 겨냥했다고 볼 수 있다. 달러화 등 해외 화폐 사용금지 결정은 자연스레 장롱 밖으로 돈이 나오도록 유도한 것이다.

이런 결정으로 손해를 보게 될 외화보유 노동당 간부나 군부 고위층의 불평도 불을 보듯 뻔하다. 물론 이번 조치를 지지하는 계층도 있을 수 있다. 중앙은행 관계자가 조선신보와의 인터뷰에서 “노동자, 농민, 사무원 등 다수의 근로자로부터 환영과 지지를 받는다”고 한 주장은 신흥자본가 계층에 대한 일반 주민들의 불만을 반영했다고 볼 수 있다.

과거 ‘다같이 못사는 건 괜찮다’는 균빈(均貧) 의식에 익숙했던 주민들이기 때문이다. 주목할 대목은 올해 67세인 김 위원장이 셋째 아들 김정은(25)으로 후계구도를 잡아가는 시점에서 이번 화폐개혁이 단행됐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번 조치가 북한 후계체제와도 관련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새로운 화폐 도안에 기존의 김일성 초상 이외에 김정일과 생모 김정숙의 생가가 새로 등장했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이른바 ‘백두혈통’을 내세워 3대 세습의 당위성을 주민에게 강조한다는 것이다. 특히 김정은의 권력 승계 시 필요한 경제적 토대를 마련하고, 시장을 기반으로 급성장한 신흥권력층을 견제하는 방편으로 화폐개혁이 나왔다는 분석도 가능하다.

화폐개혁 직후 한 북한 주민은 “머지않아 압록강에 휴지조각이 된 북한 구권 화폐가 둥둥 뜰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동안 개인장사 등을 통해 모은 재산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된 북한 주민들의 망연자실한 실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말이다. 하지만 공안기구 등을 동원한 불만 잠재우기로 북한 주민들의 반발이 수면으로 떠오르기는 쉽지 않으리라는 전망이다.

하지만 누적된 불만이 김정일 체제에 부담을 줄 가능성은 열려 있다. 경제회생의 ‘정상화’를 위해 내세운 긴급조치가 자칫 김정일 체제의 파국을 부를 전주곡이 될지도 모른다.

[필자는 중앙일보 정치부문 기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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