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 패권 다툼은 ‘휴화산’일 뿐
동북아 패권 다툼은 ‘휴화산’일 뿐
“한국의 황제 폐하와 일본의 황제 폐하는 양국 간 특수하고 친밀한 관계를 회고하여 상호 행복을 추진하며 동양의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고자 하는 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한국을 일본 제국에 병합함만 같지 못한 것을 확신하여 이에 양국 간 병합조약을 체결하기로 결(決)하고 일본국 황제 폐하는 통감 자작(子爵)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를, 한국 황제 폐하는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을 각기 전권위원으로 임명함…”
1910년 8월 29일 발표된 ‘한일병합조약(韓日倂合條約)’의 내용이다. ‘병합’이냐 ‘합방’이냐, 합법이냐 위법이냐에 대한 논란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지만, 전반적인 시각에서 보면 큰 차이는 없다. 실질적으로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삼겠다는 내용이며, 일본은 그렇게 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명실공히 일본은 식민지를 갖고 있는 ‘제국’으로 등극했고, 조선은 이 ‘아시아 신흥 제국’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우리는 이를 경술년에 국가적 치욕이라는 의미에서 ‘경술국치(庚戌國恥)’로 부르며 그 수치스러운 기억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내놓고 말은 안 해도.
하지만 2010년 올해는 다르다. 이제 역사의 치욕에 대한 기억은 무의식의 끈을 끊고 세상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 역사의 의미를 꼭 되짚어 보는 100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경술국치 100년. 우리는 치욕의 역사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가. 지금은 그때와 다른가? 세상은 달라졌는가? 우리는 달라졌는가?
1. 중국, 다시 ‘부(富)’의 블랙홀 되다
18세기 영국의 돈이 중국으로 몰려가던 것 돌아봐야중국이 세계의 ‘돈’을 싹쓸이하는 모습은 비슷하다. 중국 대륙에 공산당 정권이 들어선 지 89년. 온갖 시행착오를 겪던 중국이 다시 포효를 시작한 것은 1990년대다. 1995년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이 결정되면서 세계는 중국을 다시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1997년 홍콩을 돌려받고, 2년 뒤에는 마카오까지 돌려받으며 중국은 세계의 중심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지난 20년 동안 중국이 이룩한 경제성적표는 놀랍다. 연간 두 자릿수로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면서 세계의 돈을 쓸어갔다. 지난해 무역수지 흑자 규모는 2000억 달러로 세계적 불황을 겪고 있음에도 성장률은 9.2%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 이제 중국은 세계 최강 미국의 최대 채권국가가 됐다.
중국의 외환보유액은 얼추 2조 달러. 이 중 대부분이 미국의 달러와 채권 형태다. 13억의 인구는 세계 최대 시장으로 부상하며 세계의 달러를 쓸어 모으고 있다. “귀국의 대사도 직접 봤겠지만 우리에게는 없는 것이 없습니다. 귀국이 기묘하다고 하는 물건들은 우리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고 귀국의 제품들은 별 쓸 곳이 없습니다.”
1793년 영국의 조지 3세가 통상을 확대하자며 청의 여섯 번째 황제 건륭제에게 보낸 친서에 대한 회신이다. 한마디로 “그럴 필요 없다”는 내용이다. 이 같은 중국의 태도는 19세기 중반까지도 변화가 없었다. 두 차례 프랑스와의 전쟁을 통해 세계 식민지를 거의 싹쓸이하고 인도까지 손아귀에 넣은 영국이었다.
여간 자존심이 상할 일이 아니었다. 영국은 왜 중국에 매달렸던가? 영국의 국부가 중국으로 쏠려갔기 때문이다. 주범은 잘 알려진 대로 ‘차(茶)’였다. 18세기 초까지만 해도 귀족의 전유물이었던 차가 1784년 관세가 10분의 1 수준으로 떨어지면서 급속하게 대중을 파고들었다.
대부분 중국으로부터 수입에 의존한 관계로 영국의 국부가 급속하게 중국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1784~86년 1400만 파운드였던 영국의 차 수입액은 1834~36년 4100만 파운드로 3배 늘었다. 이게 다가 아니었다. 1830년대 인도 전역을 차지한 영국에는 또 하나의 걱정이 있었으니 바로 인도의 재정이었다.
파탄 난 인도 재정을 메우는 방법, 바로 중국에 아편을 수출하는 일이었다. 아편을 팔아 중국 인민을 망치고 중국의 부를 다시 되돌려 받는다. 영국으로서는 최상의 전략이었다. 이를 막기 위한 중국의 저항. 이것이 바로 1840년 ‘아편전쟁’으로 귀결된 것이다.
2. 경제위기가 동북아 변혁 부른다
1870년대 세계적 불황이 제국주의 촉발중국의 지나친 부의 축적은 세계경제에 위협적인가? 물론이다. 19세기 영국이 중국에 교역을 요구한 이유는 영국의 부가 지나치게 중국으로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런가? 물론이다. 미국의 부가 중국으로 이전되고 있다. 미국은 중국의 위안화 가치를 올리라고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다. 중국 책임인가? 그건 아니다. 중국은 별 책임이 없다.
열심히 일하고 좋은 제품을 싸게 만들어 파니 돈이 몰리는 것은 당연하다. 이 같은 상황은 계속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서구 열강들의 돈이 한 나라에 빨려 들어가고 자국은 가난해지는 것을 용납할 수 있는 나라는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힘이 있다면. 경제위기가 닥치면 ‘관용’은 더욱 사라진다.
자본주의는 팽창을 전제로 한다. 두 바퀴로 달리는 자본주의, 멈추면 넘어진다. 보통 순환적 의미에서 불황이 처음 왔던 것을 19세기 초로 본다. 이후 자본주의는 짧게는 3~10년, 길게는 50년에 한 번씩 찾아오는 불황에 시달리게 된다.
“넘쳐나는 물건으로 기업 숨 막힐 듯”최초의 세계적 불황은 1830년대 시작된 것으로 본다. 18세기 산업혁명과 함께 폭발적인 발전을 보인 면업은 이 무렵 영국 주도를 벗어나고 있었다. 비교적 단순했던 면업 기술은 19세기 초반을 넘어서며 더 이상 새로운 기술이 아니었다. 프랑스나 독일, 그 밖에 유럽 지역과 미국이 뛰어들었다.
면제품이 과잉생산 위기에 처하자 자본의 수익률은 떨어지고 시장을 둘러싸고 세계 강대국이 한판 승부를 벌여야 할 정도로 심각한 위기가 찾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 위기는 넘어갔다. 철도 때문에. 엄청난 신규 산업이 등장했던 것이다. 프랑스 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의 표현대로 “철도가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는 것이다.
문제는 1870년대 불황이었다. 아마도 자본주의 역사상 최초의 대공황으로 부를 만한 이 불황은 세계경제에 엄청난 파급효과를 불러일으키며 경제를 파탄으로 몰고 갔다. 당시 한창 발흥하던 전기·전자산업이 위기를 구해줄 것으로 봤지만 역부족이었다. 위기를 맞은 열강들은 해외 식민지 건설에 혈안이 됐다.
바야흐로 ‘제국주의 시대’에 돌입한 것이다. 그리고 세월을 건너뛰어 2010년, 위기는 끝났는가? 아니다. 낙관론도 좋지만 냉철할 필요가 있다. 1970년대 이후 세계는 과잉생산에 시달려왔다. 전후 미국 주도의 경제가 막을 내리면서 우선 유럽의 제품이 세계시장에 진입했고, 일본과 한국·대만이 그 경쟁에 참여했다.
1990년 이후 중국의 참여는 세계시장의 과잉을 한층 두드러지게 만들었다. “넘쳐나는 물건으로 기업은 숨이 막힐 듯하다.” 1970년대 말 지금은 세계적인 마케터가 된 잭 트라우트는 “기업은 포지셔닝 전략으로 위기를 넘겨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부족한 건 상품이 아니라 고객이다.”
1990년대 현대 마케팅의 하버지 필립 코틀러가 한 말이다. 과잉 아닌 게 무엇이 있는가. 1990년 이후 위기 극복 전략은 ‘빚’이었다. 기업도 가계도 빚을 내 투자하고 소비했다. 국가는 금리를 내리고 규제를 풀었다. 이것이 ‘거품경제’가 갖는 의미다. 그 최후의 결과는 국가부채로 드러났다. 천문학적인 국가부채는 언제까지 갈 것인가.
이제 거의 한계에 온 것 아닐까? 두바이에 이어 그리스, 동구유럽, 심지어 미국이나 일본까지 디폴트를 선언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달러가 폭락이라도 한다면 세계경제의 요동은 불을 보듯 뻔하고 동아시아도 혼란의 늪으로 빠져들 것이다.
3. 일본의 성공에서 배운다
일본은 이미 16세기 초반 중국에 파견한 사신이 폭동을 일으킨 이른바 ‘영파(寧波)의 난(亂)’ 이후 중국 중심의 조공-책봉체계로부터 축출당했다. 하지만 이후 일본은 중국 중심의 조공-책봉체계에 진입하기보다는 자국 중심의 사상과 체제를 키워나갔다.
‘국학(國學)’이나 ‘미도학(水戶學)’ 등 천황 중심의 사상이 성장했고, 자국 중심의 작은 ‘중화체계’를 구축해 나갔다. 현재 홋카이도로 불리는 에조지를 복속해 조공을 받았고, 이제는 오키나와가 된 류큐왕국으로부터도 조공을 받았다. 게다가 유럽과 문호를 닫으면서도 유독 네덜란드와는 소통의 문을 열어두었다.
19세기 들어 이 유산은 엄청난 힘을 발휘했다. 네덜란드 상관을 통해 아편전쟁에서 중국이 패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고는 구미의 선박을 자극하지 않으려 했다. 젊은 사무라이들은 바쿠후를 몰아내고 천황을 옹립했다. 스스로 자국의 운명을 끌고 간 것이다.
서양의 오랑캐를 물리쳐야 한다(양이·攘夷)고 외치다 ‘오랑캐’와 손을 잡고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킨 젊은 사무라이들은 자기 중심적 환경 적응력이 매우 뛰어났다. 메이지유신 때 영국과 손을 잡았던 이들은, 강화도조약 체결 뒤에는 미국으로부터 도움을 받았으며, 열강을 대신해 청과 한판 승부를 치렀다.
그리고 열강과 대립했던 러시아와의 전쟁에서는 열강의 도움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조선은 이와 매우 달랐다. 수백 년 동안 중국의 그늘을 벗어난 적이 없었던 조선은 마지막 순간까지 중국에 자신의 목숨을 의존했던 것이다. 북으로는 러시아, 남으로는 영국과 프랑스가 밀려오는 과정에서 중국은 조선을 최후의 완충지역으로 생각했다.
1878년 강화도조약은 중국의 ‘작품’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은 서구 열강보다는 일본을 더 가볍게 생각했던 것이다. “청과 조선은 순치상의(脣齒相依·입술과 이가 서로 의존함) 관계”라고 목소리를 높였던 이홍장은 결국 조선과 일본이 좋은 관계를 가져가는 것이 자국에 유리하다는 판단 아래 운요호 사건이 터지자 “작은 화를 참고 일본 사절을 예로 접대하거나 혹은 일본 선박을 공격한 이유를 밝혀 의심과 원한을 풀라”고 권했다.
조선은 왜 이 권유를 받아들인 것일까? 조선 왕실의 세자를 책봉 받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조선은 끝까지 무너져가는 ‘종주국’ 중국에 자신의 몸을 의탁하고 있었다.
4. 한국의 선택은?
중국과 일본의 동북아 패권 다툼 우려 지속세계적 혼란이 계속될 전망이다. 세계 유일 강대국이었던 미국은 사그라들고 있다. 달러가치는 떨어지고 빚은 너무 많고 물건은 안 팔린다. 미국은 이대로 ‘세계 중심’에서 퇴장할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세계의 헤게모니를 장악했던 스페인·포르투갈이 네덜란드에 세계 패권을 넘겨줄 때도, 네덜란드가 영국에 패권을 넘겨줄 때도 결코 그냥 넘긴 적이 없다.
게다가 미국은 이미 몇 차례 위기를 넘겼고 중국보다 강력한 군사력을 갖고 있다. 호락호락 넘어갈 것 같지가 않다. 아시아는 100년 전 그때와 마찬가지로 중국과 일본이라는 강국이 동북아 패권을 놓고 다툰다. 중국은 누구와 손을 잡고, 일본은 누구와 손을 잡을 것인가? 한국은 그때와 다르다.
100년 전 가난한 나라 한국은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보잘것없는 나라였지만 지금은 세계 10위권을 넘보는 경제권력을 쥐고 있다. 한국 역시 만만치 않은 ‘세력’을 형성한 것이다. 21세기는 새로운 변혁의 세기다. 어떻게 생존해야 하는가. 가장 중요한 것은 주체적 생각이다. 의존하지 마라. 그리고 발 빠른 적응능력이 필요하다.
상황에 맞게 처신해야 한다. 그리고 누군가와 손을 잡아야 한다. 그게 누구인가. 미국? 중국? 일본? 지금이야 모두와 좋은 관계를 가져가야겠지만 세계경제가 위기에 빠지면 얘기는 달라진다. 재깍 재깍. 온갖 글로벌 위기가 다가온다. 우리에게도 선택의 시점이 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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