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 해크먼‘성격 배우’아닌‘위대한 배우’
진 해크먼이 영화를 그만뒀다. 특종 기사는 아니다. 금시초문인 독자들도 있겠지만 따지고 보면 뉴스도 아니다. 해크먼은 2년 전 수중 고고학자 대니얼 레너헌과 함께 남북전쟁을 소재로 한 소설 ‘앤더슨빌 탈출기(Escape from Andersonville)’를 펴내고 책을 홍보하려고 미국 각지를 돌았다.
그리고 인터뷰를 통해 영화 일을 그만뒀다고 말했다.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발행되는 롤리 뉴스 &옵서버의 한 기자가 해크먼에게 그 결심을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계속 긴장하고 밀어붙이며 살고 싶지 않았다. 또 혹평의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까지 한 일에 만족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몇몇 웹사이트와 통신사를 통해서만 전해졌을 뿐 세간의 주목을 별로 끌지 못했다. 요즘도 미국의 가장 뛰어난 배우 중 한 사람인 그가 2004년 이후 영화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연기를 그만두겠다고 선언했다는 사실이 화제가 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해크먼의 한 측근은 마음에 드는 대본과 감독이 나타나면 그가 다시 영화에 출연하게 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해크먼이 다시 영화에 출연하게 된다고 해도(다른 많은 이와 함께 나도 그렇게 되기를 고대한다) 그의 은퇴 사실이 그토록 주목받지 못했던 점은 미국의 최근 문화사에서 특이한 일화로 남게 될 듯하다.
미국인들이 미국의 위대한 예술가들에게 얼마나 무관심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때마침 지금은 그 이유를 따져 보기에 적당한 때다. 해크먼이 1월 30일로 80세를 맞게 됐으니(믿기 어렵지만 사실이다) 그의 배우 인생을 평가해 볼 좋은 기회라고 여겨진다.
얼마 안 있어 아카데미상 후보가 최종적으로 발표되면 이 상을 둘러싼 떠들썩한 소동은 지금보다 더 뜨거워질 듯하다. 해크먼이 때때로 그에게 합당한 평가와 인정을 받지 못했던 이유를 짐작하게 해주는 일이다. 아카데미상을 보는 평가는 곤두박질쳐도 마니아들은 급증한다.
하루 24시간 계속되는 방송 덕분에 그 조그만 황금색 트로피가 미국인들의 시선을 사로잡으면서 그들이 영화를 생각하고 논의하는 방식에 큰 영향을 준다. 경마의 논리가 정치를 보는 시각을 왜곡하게 되는 방식과 흡사하다. 사람들은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 ‘가치’를 따지기보다는 누가 이기고 누가 지는지 ‘성공’ 여부에만 관심을 집중한다.
가치와 성공은 별개의 문제인데도 말이다. 해크먼이 더 많은 트로피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따지자는 게 아니다. 상이라면 그도 많이 받았다. ‘프렌치 커넥션’(1971)과 ‘용서받지 못한 자’(1992)로 아카데미상을 두 번이나 받았다.
영화상 시즌이 돌아오면 사람들은 어떤 한 역할로 대표되거나, 특정한 부류로 분류되거나, 아카데미상의 모호한 기준에 따라 가치 측정이 가능한 특성들에만 관심을 쏟게 된다.
그렇지 않은 특성들은 아무리 뛰어난 가치를 지녔어도 등한시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저절로 그 가치를 드러내는 이 뛰어난 특성들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것들이 어떤 모습인지는 분명히 알게 된다. (위 사진들을 보라.) 1960년대 이후 줄곧 해크먼에 따라붙은 ‘성격 배우(character actor)’라는 꼬리표도 그가 합당하게 평가 받지 못한 원인 중 하나다.
하지만 해크먼은 ‘성격 배우’가 아니라 ‘위대한 배우’다. [추상표현주의 화가 잭슨 폴록을 ‘그림 그리는 화가(painting painter)’라고 불러야 한다면 해크먼을 ‘성격 배우’라 지칭해도 좋다.] 꽃미남 배우들을 선호하는 할리우드의 편견 탓에 다양한 역할을 소화해 내는 배우들은 등한시돼 왔다.
해크먼은 폭넓은 연기에 탁월한 능력을 지녔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1967)의 전형적인 미국 남부인 벅 배로우. ‘수퍼맨’(1978)의 코믹하면서도 사악한 렉스 루터. ‘영 프랑켄슈타인’(1974)의 시각장애인 은둔자. ‘후지어(1986)’의 고교 농구부 코치. 이밖에도 성인군자 같은 카우보이, 공포에 질린 우주비행사, 바람둥이 제강소 직공, 여러 유형의 대통령 등 해크먼은 매우 다채로운 역할을 소화했다.
모든 배우가 그렇듯 그에게도 실패작이 있었고, 안 했으면 좋았을 법한 작품에 뛰어든 경우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메릴 스트립을 제외하면 현 시대의 미국 배우 중 해크먼처럼 다양한 역할을 훌륭히 소화해 낸 배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아카데미상은 매년 배우들이 특정 역할을 소화하려고 억지스러운 목소리와 특수분장을 얼마나 능숙하게 활용했는가를 기준으로 연기력을 평가한다.
하지만 해크먼은 그런 부자연스러운 수단에 거의 의존하지 않았다. 해크먼이 연기한 다양한 캐릭터를 나란히 놓고 비교해 보면 그가 각각의 역할에 이용한 표현 수단이 매우 제한적이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가끔 남부 사투리와 중절모를 이용한 경우는 있지만 대체로 자신의 원래 목소리와 외모를 있는 그대로 보여줬다.
‘프렌치 커넥션’에서 지나칠 정도로 외향적이고 불 같은 성격의 경찰 파파이 도일을 연기할 때는 감정을 최대한으로 드러냈다. 마음 내키는 대로 고함을 지르고 폭언을 하고 난리법석을 떨었다. 하지만 3년 후 ‘도청’(1974)에서 꼼꼼하고 내성적인 도청 전문가 해리 콜을 연기할 때는 정반대로 자신의 내면 깊숙이 파고 들었다.
한 배우가 완벽하게 변신한 모습을 본 뒤 다시 그 정반대의 모습을 보는 건 두 배로 감동적이었다. 대중들 사이에 해크먼의 존재감이 그다지 크지 않았던 이유는 또 있다. 다른 유명인사들과 달리 그의 일상생활은 블로그에 오르내릴 만한 가십 거리를 제공하지 않았다(그는 뉴멕시코주 산타페에서 부인과 함께 살면서 그림을 그리고 책을 쓴다).
또 젊음에 집착하는 미국 문화 풍토에서 해크먼은 비교적 늦은 나이에 대중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뉴욕의 연극 무대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후에야 영화에 자주 등장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그에게 맡겨지는 역은 주로 워런 비티·로버트 레드포드·알 파치노 등 젊은 남자 배우들의 나이든 친구 역할이었다.[알 파치노와 공연한 ‘허수아비’(1973)에서 해크먼의 연기는 특히 뛰어났다.]
하지만 이런 늦은 출발이 해크먼의 연기 인생에 오히려 이점이 됐다. 그가 맡았던 캐릭터들은 거의 전부 중년의 인물이었다. 그들은 실패와 상실감을 맛볼 만큼 나이가 들었지만 그렇다고 세상사를 모두 체념하고 편하게 생각할 만큼 오래 살지는 않았다. 해크먼은 명암이 교차하는 그들의 삶과 정신세계를 기막히게 표현해 냈다.
어쩌다가 선과 악이 묘하게 뒤섞인 복합적인 성격의 인물을 연기하고는 그 일을 자랑스럽게 떠들어대는 배우들도 있다. 하지만 해크먼은 오랫동안 자연스럽게 그런 연기를 해왔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의 연기에서는 현실 세계에서 그렇듯 착한 사람이 언제나 착하지만은 않다.
악당도 매력적이다(해크먼의 트레이드마크인 약간 사악한 느낌을 주는 목 안쪽에서 울리는 웃음소리는 이 두 가지 역할의 맛을 한층 더 살려줬다). ‘용서받지 못한 자’(1992)에서는 무자비하면서도 인간미가 엿보이는 서부의 보안관을 연기했다. 감옥에 갇힌 모건 프리먼에게 곧 고문을 동반한 조사가 시작되리란 사실을 알려주는 그의 표정은 위협적이라기보다 연민의 정이 묻어났다.
해크먼은 이런 역할들을 할리우드의 평범하고 밋밋한 ‘할아버지’ 역할과 바꿀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말했다. 따라서 그의 연기 본능이 다시 꿈틀대기 시작한다면, 그리고 새로운 도전을 즐기는 그의 마음가짐에 변함이 없다면, 해크먼은 처음 연기 생활을 시작했던 연극 무대로 돌아올 가능성이 있다.
그의 마음 속에 감춰둔 불 같은 정열과 회한의 분위기는 연극 ‘밤으로의 긴 여로’의 제임스 역에 제격일 듯하다. 또 사악한 듯하면서도 매력적이고, 코믹하면서도 지적인 분위기는 셰익스피어의 ‘윈저의 즐거운 아낙네들’ 과 ‘헨리 4세’에 나오는 희극적인 인물 팔스타프 역에 딱 들어맞겠다.
하지만 그의 연기 인생이 정말 끝났다면 그 끝은 정말 위대했다. 2004년 나온 형편없는 코미디 영화 ‘웰컴 프레지던트’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그에 3년 앞서 발표된 ‘로열 테넨바움 가족’은 해크먼의 연기를 총결산하는 결정판이라고 할 만하다. 괴짜 가족의 모습을 그린 웨스 앤더슨 감독의 이 블랙 코미디 영화에서 가족의 가장 역할을 맡은 해크먼은 작품에 생동감과 감동을 불어넣는다.
가장 재미있는 대목은 해크먼이 손자들과 함께 악동 짓을 저지르는 장면들이다. 이전의 40년 동안 해크먼이 연기한 캐릭터들이 저지른 심각한 악행들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해크먼이 손자들과 함께 가게에서 주스 박스를 훔치고, 지나가는 자동차에 물풍선을 던지고, 어린이용 놀이차를 타고 노는 장면은 그래서 두 배의 재미를 준다.
이 작품에선 특별한 영화적 기교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렇다고 꽃미남 배우들이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지도 않는다. 단지 한 위대한 배우의 절정에 오른 연기가 있을 뿐이다. 그의 연기가 어찌나 훌륭했던지 나는 처음으로 위대한 예술가들에게 그들의 업적을 감사하는 표시로 황금색 트로피를 수여하는 아카데미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됐다.
하지만 해크먼은 이 영화로 아카데미상을 받지 못했다.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리고 이 영화를 몇 번이고 다시 볼수록 그가 이 연기로 아카데미상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의아하고 당혹스럽게 느껴진다. 하지만 해크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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