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의 힘
이건희의 힘
밴쿠버에서는 빙상과 설상 말고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들이 묵는 호텔에서도 ‘총성 없는 전쟁’이 벌어진다. 올림픽 개회 직전에 열린 IOC 총회에선 2014년 제2회 유스올림픽(Youth Olympic Games) 개최도시 결정 투표에서 중국의 난징(南京)이 폴란드의 포즈난을 눌렀다.
2010년 제 1회 유스올림픽 개최도시 선정 투표에서도 싱가포르가 모스크바를 누르고 개최권을 거머쥐었던 전례에서 보듯 아시아 도시들이 잇달아 선전했다.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대한민국 선수단은 단연 돋보인다.
동계스포츠 강국으로 군림해온 독일, 미국, 러시아, 프랑스, 일본 등의 아성에 맞서 동계스포츠 신흥강국의 면모를 과시했기 때문이다. 동계올림픽을 유치하려면 경기력 또한 우선 고려대상이다. 따라서 한국 선수들의 선전은 곧 한국 스포츠 외교의 힘을 나타내는 척도이자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의 청신호라 보아도 좋다.
국제 스포츠계는 또 한 사람의 등장을 예의 주시했다. 바로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의 IOC 무대 복귀다. 지난 2월 8일(한국시간) 캐나다 밴쿠버에서 열린 IOC 집행위원회는 이 전 회장의 IOC 위원 자격을 회복시켰다. 지난해 12월 특별사면된 이 전 회장이 복귀 의사를 밝혔기 때문이다.
한국 출신 IOC 위원은 선수위원 출신 문대성 위원을 포함해 두 명으로 늘었다. 활동 재개에 들어간 이 전 회장은 곧바로 밴쿠버 IOC총회에 참석했으며, 2월 15일(한국시간)엔 IOC 위원 자격으로 쇼트트랙 남자 1500m 결승경기에서 우승한 이정수 선수에게 직접 금메달을 수여하기도 했다.
각국 IOC 위원들은 자국 선수들의 입상 가능성을 예측해 IOC 의전부서에 메달 수여 희망일자와 종목을 요청한다. 한국 선수단 첫 우승자인 이정수 선수의 목에 금메달을 걸어주면서 이 전 회장은 자신의 IOC 복귀를 전 세계에 알린 셈이다. 그의 복귀는 한국 스포츠 외교에 큰 힘을 실어준다.
먼저 IOC 위원에게 보장되는 활동 반경을 살펴보자. 각국 올림픽유치위원회 관계자들은 IOC 윤리규정에 따라 IOC 위원 방문은 물론 선물 배포를 해서는 안 된다. IOC 위원들의 표심을 잡아야 하는 유치위원회 관계자들과 스포츠 외교관들도 이 장벽 앞에서는 어쩔 수 없다. 하지만 IOC 위원에겐 실제로 이런 제한 규정이 특별히 적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올림픽 유치 도시를 지원하는 자국 IOC 위원 수가 많고 영향력이 클 경우 개최권을 따낼 가능성은 그만큼 커진다. 축구 경기에 비유하면 이렇다. 11명이 뛰는 축구경기에서 IOC 위원이라는 직함을 가진 선수는 다른 선수들과는 달리 오프사이드 적용을 받지 않는다. 가벼운 반칙행위도 그냥 넘어가준다.
상대편 골 문에 다가설 기회가 더 많이 주어지므로 골을 넣을 가능성도 덩달아 커진다. 앞으로 1년 4개월여 뒤엔 평창의 운명이 결판 난다. 2011년 7월 6일 남아공 더반에서 열리는 제 123차 IOC 총회에서 IOC 위원들의 전자 비밀투표로 2018년 동계올림픽 개최 도시가 결정된다.
대한민국 평창이 동계올림픽 개최 도시로 선정되려면 지금부터라도 강력하고 체계적인 유치활동이 뒤따라야 함은 물론이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하계올림픽 유치에 성공한 브라질이 주는 교훈을 눈여겨볼 만하다. 올림픽 유치 성공의 견인차는 브라질 출신의 IOC 위원이자 2016 하계올림픽 유치위원장 겸 브라질 올림픽위원장인 카를로스 누즈만이었다.
누즈만은 IOC 위원이란 직함을 십분 활용해 인간적으로 동료 IOC 위원들에게 접근해 승리의 표밭을 일궜다. 그가 이끄는 브라질 올림픽 유치팀은 IOC 위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들이 리우에 갖는 관심사가 뭔지, 그리고 진정으로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뭔가를 찾아내려고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다.
또 브라질팀은 IOC 위원들과 10년 넘게 교분을 쌓아왔다. IOC 위원들을 만나 단순히 ‘내가 누구인가’를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올림픽 관련 행사에 자리를 함께하고, 호텔 로비와 그들의 호텔 객실 밖을 서성일 정도로 거리감을 좁히려 애썼다고 한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이미 관록과 패기로 무장한 스포츠계 실력자들이 앞장섰다. 이번 동계올림픽 기간에도 한국의 스포츠 외교는 다양하게 발휘된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최다 득표를 얻은 선수자격 IOC 위원(2008~2016)인 문대성 동아대 교수는 조용하지만 실속 있는 지원 활동으로 입소문이 자자하다.
문대성 위원은 선배 IOC 위원들에게 깍듯한 자세와 공손함 그리고 항상 예의 바른 매너의 소유자로 통한다. 국제유도연맹회장과 IOC 위원을 역임한 박용성 대한체육회장도 국제스포츠계와 올림픽 운동을 두루 아우르는 인맥이 탄탄하다. 특히 IOC 위원 개개인의 특성을 잘 알아서 현장중심 스포츠외교 활동에도 크게 기여한다.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공동위원장을 맡은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또한 국제 스포츠 무대엔 처음 데뷔했지만 특유의 국제적 감각과 노하우로 IOC 위원들을 상대로 스포츠외교 활동에 열정을 쏟아 붇는다. IOC 위원들 사이에서도 ‘올림픽 도지사’(Olympic Governor)로 통하는 김진선 강원지사는 2018년 평창 유치위원회 공동위원장 자격으로 지난 2월 9일부터 일찌감치 밴쿠버 현지로 날아왔다.
IOC 본부 호텔인 웨스틴 배이쇼어(Westin Bayshore)호텔 로비와 커피숍 그리고 밴쿠버 올림픽 경기장 등을 오가며 맨투맨 스킨십을 발휘한다. 이런 노력에 이 전 회장까지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활동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다면 박용성 대한체육회장의 표현대로 ‘천군만마’에 비유될 만큼 그 기대효과가 엄청나리라 판단된다.
삼성은 이미 전 세계에 우수한 네트워크를 형성해 놓았으며 IOC의 글로벌 올림픽 파트너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자랑한다. 이 전 회장은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개회식 직전에 개최된 IOC 총회에서 한국의 두 번째 개인자격 IOC 위원으로 선출됐다. 당시 올림픽 헌장에 따르면 올림픽을 개최한 국가에 한해 최대 2명까지 IOC 위원을 선출할 수 있었다.
이 전 회장의 정년은 80세까지다.(IOC 위원의 정년은 70세, 80세, 종신 등 세 종류로 나뉜다. 1999년 IOC 개혁프로그램이 가동된 이후에 선출된 IOC 위원의 정년은 70세이며, 그 이전에 선출된 위원은 80세, 1966년 이전에 선출된 위원은 종신직이다.) 그는 1942년 1월 9일생이므로 오는 2022년 말까지 현역 IOC 위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그의 동기생들도 쟁쟁하다. 1996년 선출된 IOC 위원 중엔 IOC 집행위원과 부위원장을 역임했고, ANOC(세계 각국 올림픽위원회 총연합회)사무총장으로 활동 중인 스웨덴의 여성 IOC 위원 구닐라 린드버그(Gunilla Lindberg),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 110m 허들종목 금메달리스트이며, 프랑스 청소년 체육부장관을 역임한 기 드뤼(Guy Drut) 등이 눈에 띈다.
2000년부터 8년간 동계올림픽 종목 국제연맹연합회(AIWOF) 회장 자격으로 IOC 집행위원을 역임했던 현 국제빙상연맹(ISU) 회장인 오타비오 신퀀타(Ottavio Cinquanta) 이탈리아 IOC 위원, 영국 옥스포드 대학 출신인 샤히드 알리(Shahid Ali) 파키스탄 IOC 위원, 2009년 국제수영연맹 신임회장으로 선출된 줄리오 케사 마그리오네(Julio Cesar Maglione) 우루과이 IOC 위원, 그리고 국제태권도연맹(ITF) 총재인 북한의 장웅 IOC 위원 등도 있다.
이 전 회장은 IOC 집행위원도, 국제경기연맹회장 등 국제스포츠기구의 수장도 아니지만 IOC뿐만 아니라 세계 스포츠계에선 항상 귀빈 대접을 받는다. 삼성그룹 회장 시절 전 세계 각종 스포츠 이벤트에 삼성이 수많은 타이틀스폰서 역할을 하도록 배려했기 때문이다. 또한 학생시절 레슬링선수로 활약했던 그가 다국적 기업의 총수로서 스포츠를 아끼고 사랑하는 진정한 스포츠맨십을 국제 스포츠계에 널리 알려온 덕분이기도 하다.
이번 밴쿠버 동계올림픽 현장에선 평창 유치위원회를 긴장 시킨 일이 있었다. IOC 총회 마지막 날에 실시된 IOC 부위원장 선거에 단독 출마한 독일의 토마스 바하 IOC 부위원장이 80표(반대 14표, 기권 1표)라는 압도적인 지지로 IOC 부위원장(2010~2014)에 연임됐다.
문제는 토마스 바하 부위원장이 평창의 강력한 경쟁 후보인 뮌헨의 동계올림픽 유치위원회 위원장이라는 점이다. 그는 밴쿠버에서 IOC 위원들과 적극적인 물밑 접촉을 한다고 알려졌다.
특히 2018년 동계올림픽 유치와 관련해서는 우리 측과 벌써부터 신경전을 벌였다. 토마스 바하 IOC 부위원장이 이 전 회장의 IOC 복귀 문제를 논의하는 IOC 집행위원회에서 ‘이해상충’(Conflict of Interests)이라고 말한 뒤 회의도중 퇴장했다는 외신보도(Sport Intern)만 봐도 그렇다.
2018년 동계올림픽 개최도시를 놓고 평창과 표 대결을 벌일 독일 뮌헨의 유치전을 이끄는 수장인 그가 이 전 회장의 복귀를 달가워할 리 없다. 이렇게 관심과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는 와중에도 정작 이 전 회장의 밴쿠버 현지 활동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스포츠 외교와 유치 로비 활동이란 원래 김연아 선수가 기량을 한껏 뽐내는 그런 ‘갈라 쇼’가 아니다.
조용하고 은밀하면서도 실속을 챙기는 고품격의 사교ㆍ친교 활동이다. 공짜 점심도 없다. ‘주고 받기(Give and Take)’가 일반적이다. 단순히 여러 사람이 모이는 장소에서 인사를 나누고 악수나 포옹을 뻔질나게 해서 표가 생기고, 깊은 우정이 싹튼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국제 사회는 의전과 우정을 표방하지만 결국엔 약육강식의 원칙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스포츠 무대 또한 예외 아니다. 막강한 힘을 가졌거나 오랫동안 쌓인 믿음을 바탕으로 살아 움직이는 생물 그 자체가 바로 국제 스포츠 외교다. IOC 위원들과 함께 어울리며 친분을 넓히고 사교활동을 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진정한 설득작업은 늘 은밀하고 마음을 나누는 관계형성이 선행되어야 가능하다.
따라서 이 전 회장도 이미 밴쿠버 현지에서 많은 IOC 위원이나 국제스포츠계 지도자들을 상대로 막후에서 특유의 ‘정중동’식 스포츠 외교를 벌인다고 봐야 한다. 그 목표는 물론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다.
[필자는 대한체육회 국제담당 사무차장을 지냈으며 현재 국제스포츠외교연구원장으로 활동한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검은 반도체’ 김 수출 역대 최고기록 달성…10억달러 수출 청신호
2이복현 "상법 개정보다 자본시장법 개정이 합리적"
3롯데, 해외 부실면세점 철수 검토…케미칼, 자산매각 추진
411월 기록적 폭설에 車사고 60% 급증…보험료 인상 조짐
5대한항공-아시아나 합병 4년만에 승인…통합 LCC도 출범
6이재명 “‘국장’ 떠나는 현실...PER 개선하면 ‘코스피 4000’ 무난”
7롯데바이오로직스 설립 2년 만 수장 교체…신임 대표는 아직
8상법 개정 되지 않는다면 “국장 탈출·내수 침체 악순환 반복될 것”
9열매컴퍼니, 미술품 최초 투자계약증권 합산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