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이 아니라면 대체 어디서 영감을 얻을까
▎1937년 마드모아젤 샤넬의 모습.
진정한 성공은 운명적이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누구보다 화려한 삶을 살았으며, 여성의 의상을 바꾼 혁명가인 샤넬은 이렇게 말했다.
옷을 입고 디자인하는 데에도 거침이 없었다. 검은 옷은 장례식에서만 입는다는 고정관념을 바꿔 평상복으로 입었으며, 당시 스포츠웨어로만 활용되던 여성용 팬츠를 일상복으로 입은 거의 최초의 여자도 바로 샤넬이었다.
남성용 승마 재킷과 남성용 트위드 재킷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여성복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무엇보다 샤넬의 대담함은 ‘Less is More’라는 패션철학에서 드러난다.
심플한 블랙 드레스를 입은 코코 샤넬 앞에서 온갖 보석과 장식을 주렁주렁 달았던 당시 여자들은 오히려 초라해졌으니! 연인이었던 보이 카펠의 손에 이끌려 한 파티에 갔을 때 보석으로 치장한 여자들을 보고 샤넬은 기죽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마치 보석상을 통째로 들고 온 것 같네요!”프랑스의 소설가 콜레트는 이런 샤넬을 보고 ‘꺼질 수 없는 오베르뉴의 화산’이라고 불렀다.
비록 한 여인으로서 소시민적 행복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지만, 대담하고도 열정적이었던 샤넬의 삶은 그 자체로 하나의 드라마며 모든 여성이 한번쯤 동경했을 법한 로망이다. 이는 샤넬이라는 이름이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기도 하다.
고아원에 버려졌던 코코 샤넬배냇저고리부터 남달랐을 것 같았던 샤넬. 하지만 뜻밖에도 그녀의 출생은 불우했다. 샤넬은 1883년 8월 19일, 프랑스 오베르뉴 지역 소뮈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바람둥이 행상이었고 어머니는 가난한 처녀였다. 12년 후, 어머니는 가난과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고 샤넬과 그녀의 언니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고아원에 버려졌다.
1900년에 그들은 다시 물랭 지역에 있는 한 수녀원으로 옮겨졌고, 이후에는 근처에 사는 막내 이모 아드리엔과 함께 살게 되었다. 이처럼 어렸을 때 어머니의 불행한 삶을 목격한 샤넬은 평범한 가정을 갖는 대신 평생 독립적인 삶을 살게 된다. 1903년, 갓 20세가 된 샤넬은 한 혼수용품과 갓난아기 용품 회사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무대에서 노래를 했다.
당시 그녀가 부르던 노래 ‘누가 코코를 보았는가?’ 덕분에 코코라는 이름은 그녀의 애칭이 되었다. 25세가 되던 해, 부르주아 집안 출신의 젊은 보병 장교인 에티엔 발상을 만난다. 에티엔 발상은 샤넬을 데리고 말과 많은 친구에게 둘러싸여 한량 생활을 누리던 로얄리유로 떠났다.
그곳에서 샤넬은 전혀 새로운 자유에 눈뜨게 된다. 당시 승마장에는 19세기 스타일의 몸을 꼭 조이는 드레스를 입은 여인들로 가득 차 있었다. 훗날 샤넬은 이 광경을 ‘치렁치렁한 장식으로 여성의 곡선이 사라지고 아름다움은커녕 육체가 질색할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샤넬의 단순하고 보이시한 룩은 이런 여성들과 대조되어 매우 파격적이었다. 그러던 중 그녀는 일생에 진정한 사랑으로 기억되는 한 남자를 만나게 되는데, 바로 보이 카펠. 둘은 로얄리유를 떠나 파리로 돌아온다. 샤넬은 보이 카펠의 도움을 받아 갤러리 라페에트 백화점에 모자 가게를 낸다.
그녀는 평범한 밀짚 모자를 새롭게 장식해 판매했는데, 로얄리유에서 만나 샤넬의 옷차림을 눈여겨보던 사교계 친구들이 그녀의 가게에 몰려들었다.
정열적인 사랑과 사업
▎메릴린 먼로의 잠옷으로 유명해진 향수 ‘샤넬 넘버5’.
보이 카펠은 샤넬에게 도빌에 있는 공토 비롱 거리에 새로운 숍을 차려 주었다. 이미 샤넬의 모자는 유명해졌지만 그녀는 모자 사업의 성공에 머물지 않았다. 당시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해 전쟁이 시작되고 물자난이 심각해지자 낡은 로디에 저지 소재를 사들였다.
이는 남자들의 속옷을 만들 때 사용되는 부드러운 천으로 샤넬은 이것을 사용해 헐렁하고 자유로운 여성용 스포츠웨어를 만들었다.당시 전쟁 때문에 남성 못지않게 거친 일을 해야 했던 여성들에게 이런 옷은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다.
이뿐만 아니라 당시 여성의 치마 길이는 짧아졌고 장식도 거의 사라졌으며 모자도 심플해졌다. 그것은 바로 샤넬의 전공분야였다. 1915년 샤넬은 비아리츠에 두 번째 숍을 열었다. 당시 종업원 수도 60명으로 늘어났다.
하퍼스 바자(Harper’s Bazzar)라는 뉴욕 태생의 패션잡지가 그녀의 옷을 소개해 샤넬의 이름은 유럽을 넘어 대서양을 건너갔다. 당시 보이 카펠이 “장난감을 준다는 것이 자유를 주고 말았군!”이라고 말할 정도로 그녀의 사업은 성공적이었다.
대담한 슬라브적 감성을 얻다
▎1913년 도빌에서 가브리엘 샤넬.
미시아 세르는 폴란드 태생의 피아니스트이자 1900년 초의 시인, 화가들의 연인이기도 했다. 1920년 베네치아 여행 도중 그녀는 샤넬에게 러시아의 유명한 미술 평론가이자 루스 발레단의 설립자인 세르게이 디아길레프를 소개하는데 그를 통해 러시아 황제의 조카이며 11세 어린 디미트리 파블로비치 대공을 만나 또다시 걷잡을 수 없는 사랑에 빠지게 된다.
이 역시 샤넬의 디자인적 감성에 영향을 미친다. 샤넬 컬렉션의 자수와 바로크 스타일의 주얼리, 향수에 대한 아이디어나 영감은 이 당시 영감을 받은 것이 많다. 1921년, 오늘날 샤넬 하우스의 본사가 있는 파리 캉봉 거리 31번지에 새 매장을 낸다.
1935년에는 캉봉 거리에 있는 5개 건물에 4000여 명의 직원이 일하게 되었다. 매년 아틀리에에서는 2만8000여 개의 모델이 제작되었고 이 의상은 프랑스뿐 아니라 전 유럽과 미국, 극동 지역까지 판매되었다.
N˚5, 그 매혹의 숫자샤넬은 향수를 몹시 만들고 싶어했다. 흔해빠진 향수가 아닌,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것을…. 그녀는 모스크바의 랄레 밑에서 일하던 유명한 화학자 에르네스트 보에게 조향을 맡겼다. 그는 프로방스 그라스(Grasse) 지방의 재스민향에 과감하게 알데히드를 더했다. 향수 제조에 알데히드를 사용한 것은 처음이었다.
여기에 80여 가지 요소를 더해 매우 미묘하면서도 추상적인 다섯 가지 향을 만들어냈다. 그는 이 향을 작은 병에 담아 마드모아젤 샤넬에게 줬는데, 샤넬은 5라는 숫자 라벨이 붙은 병을 택했다. 그 유명한 N˚5 향이 태어난 순간! 샤넬의 모던한 감각은 향수병에서도 드러났다. 당시 향수병들이 매우 화려했던 것에 비해 N˚5는 과감하게 사각형으로 디자인된 크리스털 병이었다.
여기에 흰 바탕에 검은색으로 ‘Chanel’과 숫자 ‘5’가 쓰여 있을 뿐. 이후 1922년에 N˚22가 나왔고, 1924년에는 ‘Parfums Chanel’이라는 새로운 향수 회사를 세웠다. 1925년 가르데니아(Gardenia), 1926년에 브와 데 질(Bois des Iles), 1927년 퀴르 드 뤼스(Cuir de Russe) 등 샤넬의 이름을 단 향수가 왕성하게 쏟아져 나왔다.
당시 샤넬은 머리를 단발로 짧게 자른 최초의 여성이 되기도 했다. 창백한 피부가 유행했던 당시 그녀는 태양을 두려워하지 않고 브론즈 빛 피부를 자랑스럽게 드러냈다. 이처럼 샤넬은 새로운 개념의 ‘미의 기준’을 만들어냈고, 이는 아직까지 많은 여자에게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18세기의 저택이 즐비한 포부르 생토노레(Faubourg Saint-Honor) 29번가에 세워진 샤넬 하우스는 막스 야콥, 장 콕토, 게이몽드 라디게 등 20세기 파리의 명사들의 모임 장소였다. 시인이자 늘 단정한 더블 브레스트 재킷에 멋진 셔츠, 넥타이를 매고 다녔던 피에르 르베르디. 그 역시 샤넬을 흠모했는데, 이후 그는 연인으로서의 끈을 놓은 뒤에도 친구로 남아 샤넬의 격언집을 쓰기도 했다.
1922년에는 장 콕토가 <안티고네> 를 극으로 개작했는데 피카소가 무대 디자인을, 샤넬은 의상 디자인을 해 세기의 작품이 만들어졌다. 같은 해 샤넬은 조각가인 자크 리프쉬츠에게 자신의 반신상을 만들어 달라고 의뢰했다. 다음 해에는 마리 로랑생에게 초상화를 맡겼는데, 이 초상화는 오늘날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을 정도로 인상적이다.
그즈음 샤넬은 또다시 새로운 사랑을 만난다. 바로 세기의 스캔들이라 불리는 웨스트민스터 공과의 만남.
웨스트민스터 공과의 사랑
▎1928년 보트 위에 서 있는 샤넬과 웨스트민스터 공.
그런 그가 대담한 성격의 샤넬에게 매혹되었던 것. 웨스트민스터 공을 만난 1926년에서 1931년 사이, 샤넬의 의상은 더욱 세련되고 모던해졌다. 영국풍이 가미된 트위드 재킷, 스포티한 코트, 편안한 정장 등을 선보였고, 코코 샤넬 본인도 이때부터 검은색 드레스를 입기 시작했다.
무려 5년이나 지속된 두 사람의 관계는 영원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이를 낳지 못하는 이유로 웨스트민스터 공과의 관계도 깨지고 만다. 훗날 샤넬은 아이를 낳을 수 있었다면 그와 결혼했을 것이라고 말하곤 했으며, 그 다음에는 꼭 이런 말도 덧붙였다고. “그랬다면 난 영국의 성에 갇혀 곰팡이나 피우고 있었겠지. 말년에 두 번씩 여왕에게 절을 하면서….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야.”
1924년, 샤넬은 패션 컬렉션을 위한 액세서리를 디자인했다. 요즘에야 디자이너의 이름을 딴 액세서리 컬렉션이 흔한 것이 되었지만, 당시 디자이너가 액세서리를 만들어 ‘토털룩’을 제시하는 것은 최초의 일이었다. 그녀가 액세서리를 디자인하는 방식 역시 독특했다. 샤넬은 소장하고 있던 많은 보석을 세팅에서 과감히 떼어낸 후 진흙으로 본을 뜨고 여기에 진짜 보석 대신 준보석들을 박아 넣었다.
당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남에게 과시하려는 듯한 유행병은 나를 메스껍게 한다!” 진짜 보석이 아닌 준보석으로 완성된 진주 귀걸이, 체인 팔찌, 샤넬 심벌의 귀걸이, 컬러스톤 브로치, 새틴 리본, 카멜리아 등의 액세서리는 대담했고 시크했다.
특히 건축학을 전공한 스타일리스트이자 멋진 일러스트 작품을 수없이 남긴 폴 이리브와 샤넬이 사랑에 빠졌을 때, 이 두 사람의 아이디어가 결합해 멋진 작품들이 나왔는데 특히 주얼리에서 많았다. 1931년, 샤넬은 미국 영화사 초청으로 할리우드로 갔다. 그레타 가르보, 마를레네 디트리히 같은 대스타와는 개인적인 친분까지 쌓으며 의상을 조언해주기도 했다.
[Tonight or Never]라는 영화의 여주인공인 글로리아 스완슨의 의상을 디자인했다. 하지만 샤넬에게는 할리우드가 맞지 않았다. 스타들이 부리는 변덕에 그녀는 도무지 즐겁지 않았다. 미국 매스컴이 ‘가장 위대한 패션’이라고 극찬하며 그녀를 부추겼지만 샤넬은 파리로 돌아왔다.
전쟁, 그리고 은퇴와 복귀1935년 여름, 샤넬의 연인인 폴 이리브는 테니스 경기를 한 직후부터 쇠약해졌다. 이리브는 이제껏 만난 남자들에게는 없는 예술적인 재능으로 샤넬을 매혹시킨 남자였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샤넬을 큰 슬픔에 빠지게 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샤넬 주위에는 여전히 멋진 친구가 있었고 이미 부와 명예, 권력을 쥐었음에도 고독은 점점 깊어갔다.
1936년 샤넬은 생토노레 거리에 있는 저택을 떠나 리츠 호텔로 옮겼다. 1939년 그녀는 장 르노의 작품 <게임의 규칙(la r gle de jeu)> 에서 영화 의상을 만들며 겨우 힘을 냈는데, 당시 설상가상으로 전쟁이 다시 터졌다. 샤넬은 캉봉 거리의 부티크 하나를 남겨놓고 모두 문을 닫았다. 파리에 남은 그녀는 리츠 호텔에 은둔했고, 캉봉 거리에 남아있는 황량한 숍의 창문과 벽에 자신이 만든 옷을 걸어 가리고 침묵 속에 살았다.
날마다 그녀는 독일 병사들이 기나긴 줄에 끼어 애인이나 아내에게 줄 선물로 N˚5 향수를 사려고 기다리는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 줄은 샹젤리제의 올림피아 극장에 이르기까지 길게 늘어섰다. 예순에 가까운 샤넬은 나치 당원이자 독일의 외교관이었던 한스 군터 폰 딘클라게와 사랑에 빠졌다.
프랑스를 점령한 독일 군인을 애인으로 둔 탓에 샤넬은 체포되기도 했지만, 웨스트민스터 공이나 윈스턴 처칠 등 유력 인사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당시 샤넬에게 남겨진 것은 향수와 메이크업 사업뿐이었다. 어느덧 샤넬은 70세가 되었다. 파리에서 샤넬은 잊혀진 지 오래, 크리스찬 디올이 프랑스 패션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1956년 2월 5일, 그녀는 캉봉 거리의 매장을 다시 열고 새로운 컬렉션을 발표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첫 컴백 무대는 실패였다. 이듬해 두 번째 재기 패션쇼에서 큰 성공을 거두고, 금세기 최고의 디자이너에게 주는 패션 오스카상을 수상했다.
금색 단추에 가장자리를 트리밍한 슈트, 심플한 실크 블라우스, 우아한 커스텀 주얼리, 골드 체인의 핸드백, 끝부분이 블랙인 베이지 슈즈 등 오늘날 전 세계 거리를 수놓은 샤넬 스타일이 완성된 것이다. 1971년 죽음이 그녀를 찾아왔을 때는 홀로 리츠 호텔에 있었다. 그날은 샤넬 하우스의 정기휴일인 일요일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마지막 컬렉션 발표일을 며칠 앞둔 날이었다.
칼 라거펠트의 시대1983년 샤넬 하우스는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에게 레디 투 웨어, 오트 쿠튀르와 액세서리의 수석 디자이너를 제안했다. 1984년, 샤넬 하우스는 ‘코코’라는 향수를 내놓으며 칼 라거펠트의 캉봉 매장 도착과 함께 판매되었다. 이는 샤넬의 새로운 출발이었다. ‘과거를 본보기로 더 나은 미래로 나간다’.
종종 괴테의 말을 인용하곤 하는 칼 라거펠트는 누구보다 대담하고 형식에 치우치지 않는 여성이었던 샤넬의 위대한 유산을 이어받기에 적당한 사람으로 보인다. 현재 샤넬 패션은 전 세계 주요 도시의 131개 매장에서 샤넬 여사의 고상한, 동시에 자유로운 아름다움을 전파하고 있다. 게임의> 안티고네>루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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