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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실패라도 하게 해달라”

“제발 실패라도 하게 해달라”

‘나는 안정보다 기회를 택한다. 나는 계산된 위험을 단행할 것이고 꿈꾸는 것을 실천하고 건설하며 또 실패하고 성공하기를 원한다. 나는 보장된 삶보다 도전을 선택한다. 나는 유토피아의 생기 없는 고요함이 아니라 성취의 전율을 원한다.’ - 미국 기업가협회 ‘기업가 신조’ 중 -

요즘 정치가들은 기업에 “투자하라” 대신 “기업가정신을 발휘해 달라”고 말한다. 훨씬 품위 있어 보이기 때문일까? 재계 단체의 반응도 비슷하다.

‘감세를 통해 기업가정신을 북돋워야 한다’고 대응한다. ‘투자’라고 쓰고 ‘기업가정신’이라고 읽는 꼴이다. 아주 틀린 것만은 아니다. 기업가정신에 대한 정의가 다양하고 막연해서 입맛에 맞게 쓰면 되기 때문이다.

한 대학 교수는 신문 칼럼을 통해 기업가정신에 애국심을 갖다 붙였다. ‘애국 차원에서 투자하라’. 일부에서는 기업가정신을 발휘해 사회적 책임을 다하라고 주문한다. 심지어 한 인터넷 언론은 “공익과 사익의 균형과 조화를 외면하는 기업가정신은 올바른 기업가정신으로 보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이를 두고 한 대학 교수는 “회식 때 직원들은 탕수육 먹고 싶은데 CEO가 자장면을 시키면 기업가정신이 부족한 사장이라고 욕할 판”이라고 꼬집었다. 기업가정신의 과용·오용 시대다.



어원은 ‘앙트레프레너십’

기업가정신은 프랑스어 ‘앙트레프레너십(entrepreneurship)’을 옮긴 말이다. 유동운 부경대 경제학과 교수에 따르면 원래 군사 원정을 이끄는 사람을 뜻하던 ‘앙트레프레너’를 프랑스 경제학자들이 ‘혁신하려고 위험과 불확실성을 부담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앙트레프레너십은 우리나라로 넘어오면서 ‘기업가(企業家)정신’으로 번역됐다. 반면 일본에서는 ‘기업가(起業家)’로 쓴다. 엄밀히 따지면 일본식 번역이 맞다.

외국에서 기업가정신은 대부분 창업 단계와 초기 성장단계에서 강조된다. 기업가정신 전도사로 변신한 안철수 KAIST 석좌교수는 “기업가정신이라고 할 때의 기업가는 企業家가 아닌 起業家”라고 강조했다.

이를 잘 풀어 설명한 것이 미국 뱁슨 대학의 론스타드 교수다. 그는 저서 『기업가 정신』에서 “기업가정신은 스스로 새로운 사업을 일으키는 것, 그리고 이를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일로 여기는 것이며 이는 마치 빨간 신호등 앞에서도 때로는 이를 무시하고 돌진하는 것과 같다”고 정의했다.

유효상 동국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앙트레프레너십은 자원의 존재와 무관하게 기회를 획득하는 능력과 함께 극히 한정된 자원으로 가치를 창출하는 과정을 의미한다”고 정의했다. 유 교수는 “앙트레프레너는 단순한 창업가나 기업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혁신적인 창조를 하는 사람이면서 기회를 찾아내고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을 일컫는다”고 말했다.

이런 측면에서 송영수 한양대 교육공학과 교수는 한국 기업가정신의 역사를 세 단계로 나눈다. 먼저 창업 1세대. 1960~70년대 국가 전략에 따라 근대화 산업을 추진하면서 이병철, 정주영, 구인회, 박태준 등 창업 1세대가 등장했다.

당시 창업 기업은 정부의 막강한 지원을 받으면서 서로 충돌하지 않고 전자, 자동차, 조선, 철강 등으로 진출했다. 송 교수는 창업 1세대 기업가정신의 특징을 강력한 책임의식과 혁신의지로 꼽았다.



사라진 기업가정신창업 2세대는 1990년대 후반 불어닥친 벤처 창업 붐 세대다. 1990년대 후반 지식정보화 산업이 부상하면서 고학력과 전문 기술을 갖춘 벤처 창업이 비약적으로 늘었다. 송 교수는 “창업 2세대의 발전은 전통적인 산업사회에서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산업구조로 이행되는 변혁이자 혁신의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송 교수는 2세대 기업가정신의 특징을 이렇게 설명했다. “몰입과 신념을 추구하고 리더십을 갖췄으며 위험과 불확실성에 대한 수용이 높은 진정한 모험가적 기질을 지녔다.”문제는 그 후다. IT 버블 이후 유명 벤처의 비리 사건과 몰락이 이어지면서 벤처 창업 열기는 급랭했다. 그런데 통계는 이상했다.

정부 통계에 따르면 2004년 이후 연간 신설 법인 수는 매년 5만 개 이상 생겨났고 숫자는 늘었다. 같은 기간 부도업체 수는 줄었다. 이를 두고 기업가정신이 살아 있다고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중소기업청 자료에 따르면 2002년 전체 벤처기업 중 20~30대 비중은 56%였지만 지난해에는 12%로 줄었다.

대신 40~50대 창업이 늘었다. 기업가정신에 의한 혁신형 창업이 아니라 생계형 창업이 늘어난 것이다. 많은 전문가는 기업가정신 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최근에는 중소기업청 산하 기관, 대학가, 기업 단체 등에서 기업가정신 교육을 확산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그동안 기업가정신 교육이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다.

교육공무원들이 자주 하는 “교과서 위주로 공부하라”는 말을 듣는다면 우리나라 초·중·고생은 기업가정신이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 교과서에 아예 언급도 안 됐거나 잘못 설명돼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초중고 교과서의 문제점과 개선점’ 보고서를 작성한 중소기업연구원의 김주미 연구위원은 “기업가정신을 언급한 교과가 매우 적고 동일 교과목에 내에서도 개념적 통일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경영교과서 7종에서는 아예 기업가정신에 대한 서술이 전무했다”고 밝혔다. 반면 선진국은 기업가정신 교육이 갈수록 강조되고 있다.

유럽연합은 2005년까지 권장에 그쳤던 기업가정신 함양 교육을 지난해부터는 초등학교부터 실시하도록 의무화했다. 영국의 경우 90% 넘는 중학교가 기업가정신 교과과정을 개설했다. 독일에서는 매년 10만 명을 선발해 정부에서 월급을 지원하고 스스로 비즈니스를 해 보는 정책을 펼치고 있다.

미국은 카우프만 재단 같은 기업가정신 전문 기관이 교육기관·기업단체와 연계해 다양한 기업가정신 교육 프로그램을 펼치고 있다. 유효상 교수는 “미국에서는 2005년 기준으로 1600개 이상의 학교에서 2200개 이상의 관련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계속 증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기업가정신 교육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기업가정신이 발휘될 수 있는 환경이다. 다시 말해 기업가정신이 왜 쇠퇴하는지를 따지면 답을 찾을 수 있다. 많은 전문가는 크게 네 가지를 꼽는다. ‘사업 기회 줄었다, 위험 대비 보상이 낮다, 성공 확률이 낮다, 한 번 실패하면 재기가 불가능하다.’ 기업가정신 전문 비영리기관인 미국의 카우프만 재단 연구원들이 쓴 『좋은 자본주의 나쁜 자본주의』에 이런 말이 나온다.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드는 관료적 형식이나 절차 없이 비교적 쉽게 기업을 설립할 수 있어야 한다. 장래 기업가가 창업을 주저하지 않도록 실패한 사업의 포기도 별로 어렵지 않아야 한다. 또 기업가의 활동에 대한 합당한 대우를 해야 한다.’



창업자가 회사 팔면 야유비슷한 얘기인 것 같은데 크게 다른 점이 있다. 바로 ‘실패’ 부분이다. 기업가정신이 넘쳐 흐르는 환경을 만들려면 무엇보다 창업 기업의 퇴로가 잘 닦여 있어야 한다. 이것이 기업가정신 확산의 핵심이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창업 기업 100개 중 95~99개는 망한다. 김영용 한국경제연구원장의 말처럼 기업가가 새로운 기회를 발견해 채워지지 않은 소비자 욕구를 충족시키면 성공하고 그렇지 못하면 실패해 퇴출의 운명을 맞게 된다.

실패는 어디나 고통이 따른다. 스티브 잡스는 2005년 스탠퍼드대 연설에서 애플에서 쫓겨날 때 심정을 밝힌 적이 있다. “나는 인생의 초점을 잃었고 말할 수 없이 참담한 심정이었다. 난 정말 말 그대로 몇 개월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계주에서 바통을 놓친 선수처럼 선배 벤처기업인에게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완전히 공공의 실패작으로 전락했고 실리콘밸리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도망칠 필요가 없었다. 언제든 재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애플을 나온 후 컴퓨터 제조업체인 넥스트를 차렸고, 영화사 픽사를 인수해 대박을 터뜨린 후 10년 만에 애플로 복귀해 아이팟에서 아이패드에 이르는 신화를 썼다.

실리콘밸리는 ‘실패의 요람’으로 불린다. 안철수 교수는 “실리콘밸리는 100개 기업이 간판을 내걸고 시작하면 99개 간판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만 도덕적으로 큰 문제가 없으면 다시 기회를 준다”고 말한다. 미국 정부 통계에 따르면 벤처를 창업해 중견기업으로 키우기까지 평균 2.8회 창업을 한다. 미국에서 실패는 경험이 풍부하다는 훈장이다.

심지어 실패를 경험해 봤기 때문에 성공 확률이 더 높다며 투자 받기 더 쉽다고 한다. 우리는 어떤가? 실패는 곧 퇴출이다. 그것도 대표이사 연대보증 같은 제도로 인해 완전히 벌거벗겨진 채 망한다. 정신을 잃은 후 눈을 떠보니 신장이 사라진 채 얼음 욕조에 있더라는 미국의 괴담처럼 잘나가던 벤처 사장이 노숙자가 됐다는 소문이 쉽게 믿어지는 것이 우리 환경이다.

한 번 실패는 영원한 몰락이라는 이미지는 창업 의지를 꺾기에 충분하다. 설령 재기해도 실패자의 낙인은 지워지기 어렵다. 불미스러운 일과 경영상의 이유로 물러났던 1~2세대 벤처 CEO들이 몇 해 전 모여 ‘벤처 패자부활제도’를 주장했을 때 쏟아졌던 조롱과 비아냥을 기억한다면 이해가 쉽다.

실패뿐 아니라 성공적인 퇴로도 꽉 막혀 있다. 미국의 창업가는 기업을 키운 후 주식공개보다는 대기업에 매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대형 기업은 R&D(연구개발)의 상당 부분을 소규모 혁신기업과의 연계 또는 지분 매입이나 인수를 통해 해결한다. 그만큼 퇴로가 다양하게 열려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은 이유를 막론하고 창업자가 지분을 팔거나 회사를 매각하면 욕을 먹는다(이때 자주 기업가정신이 거론된다). 정문술 전 미래산업 회장, 안철수 전 안철수연구소 의장이나 돼야 ‘아름다운 퇴장’ 소리를 듣는다. 회사를 키워 비싼 값을 받고 파는 것도 곁눈질을 받는다. 외국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이 시스템이 ‘탐욕’ ‘무책임’ ‘기업가정신 실종’과 연결되고 질시나 오해를 받는다.

그것도 오래돼 굳어진 문화다. 1998년 인터넷기업 최초로 코스닥에 상장했다가 이듬해 지분을 매각한 윤석민 전 웹인터내셔널 사장은 “온통 비난하는 분위기였다”고 토로했다.

기업가정신이 증대하면 실업률이 떨어진다는 OECD 통계를 전적으로 믿는 정부 정책결정자는 기업가정신이 확산되기를 고대할 것이다. 또 많은 이벤트와 정책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딱 하나만 먼저 해결해 보라. ‘품위 있게 실패하고 재기할 수 있는 환경’. 아마 준비한 창업지원금이 모자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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