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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경쟁력 1위 유럽 기업들의 깜짝 실적

글로벌 경쟁력 1위 유럽 기업들의 깜짝 실적

미국 국민과 기업은 ‘하면 된다’ 정신으로 충만한 반면 행동이 굼뜬 유럽인들은 도전에 맞닥뜨릴 때 “알아요, 하지만…”하면서 여러 가지 구실을 갖다 붙인다는 이야기는 이제 설명이 필요 없는 통념으로 자리 잡았다.

미국 기업들은 탁월한 기업의 기준을 설정했으며 가장 인기 있는 신제품과 아이디어를 출시한 뒤 세계 곳곳에 판매하는 그들의 능력을 따를 자가 없다는 논리를 편다. 물론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위기로 미국 은행들이 체면을 구겼지만 미국 다국적기업 또는 미국 기업 모델이 더 우월하다는 사고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다.

오히려 갈수록 거칠어져만 가는 글로벌 시장에서 유럽이 그런 경쟁력으로 버텨낼까 하는 우려만 더 커졌다. 위기 이후 유럽이 그리스의 국가부도 위협, 치솟는 적자, 급락하는 유로화 같은 익히 알려진 문제에 대처하려 애쓰는데도 여전히 경제성장률 면에서 미국에 뒤진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러나 흔히 그렇듯이 숫자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른 현실이 드러난다. 널리 퍼진 ‘미국의 역동성 대 유럽의 경제정체’라는 고정관념과는 달리 지난 10년간 유럽의 일류 기업들이 종종 상당한 차이로 미국 기업들(일본 기업은 물론)을 따돌렸다.

중국을 비롯한 신흥국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유럽은 2000년 이후 세계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7%선으로 대체로 안정세를 보인 반면 미국은 17%에서 11%로 3분의 1 이상 떨어졌다(이는 조잡하기는 해도 글로벌 경쟁력을 나타내는 중요한 지표다). UN무역개발위원회(UNCTAD)는 해마다 세계 100대 다국적기업 리스트를 작성하는데 여기서 유럽 기업들은 비중을 꾸준히 늘려 1991년 57개에서 지난해 61개가 됐다.

반면 미국 기업 수는 26개에서 19개로 줄었다. 유럽은 에너지(독일의 이온, 프랑스의 GDF 수에즈), 금융(영국의 HSBC, 이탈리아의 유니크레디트), 통신(스페인의 텔레포니카, 영국의 보다폰) 같은 분야에서 신흥기업과 급성장 기업들이 UNCTAD 리스트를 비롯한 여러 리스트에서 성가를 높였다.

반면 미국의 글로벌 대기업 순위는 대체로 제자리걸음하거나 뒷걸음질쳤다. 구글 같은 신흥기업들은 일반적인 현상이라기보다 예외로 간주됐다. 게다가 유럽 기업들은 수익성이 상당히 높았다. 독일 경영컨설팅업체 롤란드 베르거가 3000개 일류 글로벌 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이 그룹 중 유럽 기업들의 이익증가율은 1998~2008년 10년간 연평균 13%에 달했다.

미국 기업 이익증가율 7%의 배에 가깝다. 베르거의 CEO 버크하르트 슈벤커에 따르면 유럽 기업들의 현재 수익력은 미국 기업보다 높다. 베르거의 조사대상 기업 중 유럽 기업들의 2008년 총 이익은 평균적으로 수입의 19.8%인 반면 미국 기업은 13%에 그쳤다. 이들 통계 중엔 분명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예컨대 2009년 이익(베르거가 5월 중 종합해 발표할 계획이다)을 보면 유럽 기업은 더 늦게 더 강하게 불황의 타격을 입은 반면 미국 기업은 큰 폭의 회복세를 보였다. 그러나 위기 이후의 경제전망을 둘러싼 온갖 불확실성 속에서도 이들 통계는 중요한 출발점을 제공한다.

논란의 중심에는 ‘균형회복(rebalancing)’의 문제가 있다. 미국 같은 적자 경제가 부채에 의존한 소비와 수입에서 탈피해 세계시장에서 더 치열하게 수출경쟁을 벌여야 하느냐는 문제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지난 1월 국정연설에서 그렇게 말하면서 앞으로 5년간 미국의 수출을 두 배로 늘리겠다고 약속했다.

지금껏 그 논란은 무역수지, 환율 변동, 자본흐름 등과 같은 거시경제적 데이터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실제 기업들 수준까지 파고 내려가면 전 세계에 걸쳐 많은 업종에서 유럽 기업들이 미국 라이벌들을 앞섰음이 확연히 드러난다. 따라서 세계 최고의 수출 산업을 재구축해서 미국 기업들이 유럽 기업들을 뛰어넘도록 한다는 오바마의 꿈은 좋게 말해서 지난한 과업이 될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그림에 따르면 유럽경제에 관한 우리의 몇몇 낡은 고정관념은 수정돼야 한다. “유럽이 동맥경화에 걸려 성장하지 못하고 실패할 운명이라는 통념은 분명 잘못됐다”고 런던에 있는 매킨지 글로벌 인스티튜트의 찰스 록스버그가 말했다. 실제로 2000년 이후 유럽의 1인당 GDP 증가율은 미국보다 약간 높았다.

이는 아주 중요한 척도다. 미국은 인구증가율이 더 높기 때문에 GDP 증가율이 유럽보다 매년 1%포인트는 더 높아야 미국인들의 기존 경제수준을 겨우 지탱할 수 있다. 록스버그는 유럽의 우위가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 일련의 노동시장 개혁 이후 고용이 급증한 데서 기인한다고 분석한다.

그는 유럽의 많은 수출지향적 기업이 구조조정 측면에서도 더 앞섰다고 말한다. 중국을 비롯한 신흥국의 저비용 경쟁업체들과 맞닥뜨려서도 경쟁력을 높였다는 말이다. 실제로 최근 그리스의 국가부도와 그것이 유로화에 미치는 영향을 둘러싼 우려 탓에 유럽에서 잇따라 터져나오는 희소식이 희석됐다.

최근 통계는 예상보다 강한 회복세를 보여준다. 이는 베르거와 매킨지의 유럽 경제실적 재평가를 뒷받침하는 듯하다. 지난 3월 유럽의 수출주문 동향을 추적하는 주요 지수가 10년래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 공업생산(유럽 공장들의 총 생산)도 예상을 뛰어넘어 분기별 성장률이 사상 최고 수준에 달했다.

2010년 GDP 성장률 예상치의 평균은 1%로 1인당 GDP 기준으로 따지면 미국의 2%와 얼추 맞먹는다. 물론 이 데이터에는 많은 의문점이 있다. 무엇보다도, 급증하는 정부 부채가 서방 경제에 새로운 지진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다. 유럽 모델의 열쇠는 세계화다. 유럽 기업들은 국경을 넘어 훨씬 더 빨리 더 멀리 이동하면서 시장을 확보했다.

해외 판매(유럽 전체를 단일 국내시장으로 볼 때조차)가 39%인 반면 미국과 일본 기업들은 30%선, 브릭스(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 국가들의 대기업은 20%에 불과하다. 브릭스 기업들은 세계를 정복하기는커녕 여전히 주로 국내시장에 초점을 맞춘다. 엄격히 국가시장만 놓고 보면(예컨대 폴크스바겐의 독일 vs 해외 판매) 세계화 효과는 훨씬 더 크다.

독일 기업가이자 경영학을 연구하는 헤르만 지몬 교수는 이들 기업의 수출 비중은 예사로 80%를 웃돈다고 말한다. 지몬 교수는 ‘히든 챔피언(hidden champion, 독일·이탈리아·스칸디나비아 경제를 지배하는 고도로 전문화된 중소 제조업체)’을 조사한 바 있다. 이는 EU가 신흥시장(브릭스뿐 아니라 동유럽과 씀씀이가 큰 석유수출국기구 국가들)의 경제적 역동성에 편승해 성장의 많은 부분을 이뤘다는 뜻이다.

대다수 경제전문가는 이들 신흥시장이 글로벌 경제성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갈수록 커져간다고 믿는다. 그럴 경우 유럽 기업들은 훨씬 더 유리한 출발점에 서게 된다. 그들은 신흥시장에서 성장하고 번창하는 법을 잘 안다. 그리고 유럽의 놀라운 무역수지가 보여주듯(에너지를 제외한 무역흑자는 1월 156억 유로였다) 이는 단순히 아웃소싱(해외 업무용역)만으로 이룬 실적도 아니었다.

폴크스바겐·르노·피아트 등 유럽 자동차 제조사, 프랑스의 알스톰 같은 고속열차 제조사뿐 아니라 고도로 전문화된 숱한 틈새 제조업체가 이미 대(對) 브릭스 무역을 독점하다시피 한다. 따라서 왕년의 제조 능력을 되살려 수출로 경제를 키우겠다는 미국에 큰 어려움을 안겨줄지도 모른다.

유럽의 세계화 능력은 경영 의사결정의 문제라기보다는 지정학적 숙명의 문제에 더 가깝다. 미국 기업들은 전통적으로 땅덩어리가 넓은 국내 시장에 주력하지만 시장이 더 작은 유럽 기업들은 일찍이 세계로 눈을 돌려야 했고, 그에 따라 글로벌 시장에서 한발 앞서 가게 됐다고 사이먼은 말한다.

이 과정은 1990년대와 2000년대 초에 본격화됐다. 유럽연합이 역내 무역장벽을 허무는 데 성공해서 단일 시장을 구축하고 훗날 새로 자본주의 경제로 전환한 동유럽 국가들을 받아들이며 확대해 나갔기 때문이다. 유럽 국가들은 이런 과정을 통해 부유하고 강성해지면서 아시아·중남미·러시아·중동의 신흥시장과 광범위한 통상관계를 구축했다.

UNCTAD의 경제전문가 제임스 잔에 따르면 이런 급속한 글로벌 확장 단계에 힘입어 유럽 기업들이 세계 최대 다국적기업 리스트에서 순위가 올라가면서 국내시장에 더 중점을 둔 미국 기업들이 밀려났다. 이 기간 동안 스페인의 텔레포니카는 중남미 최대 전화회사가 됐고, 독일의 도이체 포스트는 글로벌 물류회사를 구축했으며, 프랑스의 GDP 수에즈는 아프리카·아시아 등지에 에너지 시장을 확보했다.

유럽기업들은 노동집약적인 생산공정을 해외로 내보내고 더 고도기술 제품에 집중하면서 경쟁우위를 유지했다.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세계경제포럼이 매년 작성하는 글로벌 경쟁력 지수에 따르면 세계 경쟁력 상위 15개국 중 10개국이 유럽국가이며(스위스가 1위) 포럼이 평가를 시작한 이래 그들의 지위는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었다.

이 역시 유럽은 경쟁력이 없고 임금이 높아서 다른 지역의 더 역동적인 경제에 밀려난다는 통념과 상충된다. 유럽은 중국 같은 나라들에 밀려나기는커녕 이제껏 다른 지역에 인프라·공장·고급제품을 공급하면서 그들의 부상에 무난히 편승해 왔다. 유럽 기업들의 성공에서 더욱더 놀라운 점은 그들이 특히 국내에서 여러 가지 불이익을 극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노동규제나 파산에 따르는 불이익 탓에 생산성이 낮은 작업으로부터 생산성 높은 활동으로 근로자를 이동시키기가 어렵다. 따라서 경제발전을 유발하는 구조개혁이 지체된다(역설적으로 이는 기업들로 하여금 더 장기적으로 생각하게 하기도 한다. 슈벤커는 이를 전략적 이점이라고 주장한다).

미국은 변함없이 혁신이 어울리는 더 역동적인 나라이며 생산성 향상 실적도 유럽보다 더 뛰어나다. 일차적으로 정보기술(IT)을 더 과감하게 적용하고 인원을 무자비하게 삭감한다(보통은 그 뒤로 경제의 더 생산적인 분야에서 더 빠른 일자리 창출이 뒤따른다). 문제는 미국 생산성 우위의 4분의 3이 서비스 분야에 집중되지만 글로벌 무역에서 서비스가 담당하는 비중은 20%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오바마의 말이 옳고 ‘균형회복’이 미국 제조업의 성장을 뜻한다면 미국의 생산성 우위는 활용하기가 훨씬 더 어려울 듯하다. 거꾸로 유럽은 성장을 원할 경우 뜻을 이루기가 아주 쉽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유럽의 비생산적이고 규제가 심한 서비스 분야를 개방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 같은 나라들은 현재 위기를 벗어나려고 바로 그런 조치를 취했다.

그에 따라 유럽 경제는 앞으로 새로운 활력을 얻게 될 전망이다. 어느 모델이 더 나을까? 유럽이나 미국의 성장이 정말로 얼마나 지속가능한지는 아직 속단하기 어렵다. 유럽에서 가장 성공한 소프트웨어 회사 SAP의 전 CEO 헤닝 카거만은 유럽기업이 얼마나 성공하느냐는 구조조정과 점진적 기술발전에 달렸다고 본다.

애플과 구글 같은 미국 기업이 아직도 강세를 보이는, 전체 산업판도를 뒤엎을 만한 대대적인 혁신이 아니라는 얘기다. 반면 미국의 성장은 상당부분 아직도 차입지출(이번에는 개인이 아니라 공공부문)이 이끌어간다. 유럽도 나름대로 빚 문제가 심각하지만 양대 기둥인 프랑스와 독일의 재정은 훨씬 더 건전하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든 몇 년 뒤엔 유럽과 미국 간 경쟁이 아니라 사실상 서방 기업들과 신흥세계의 새로운 거인들이 경쟁하게 된다고 매킨지의 록스버그가 말했다. 그 경주에서 둔하긴 하지만 꾸준한 거북이 유럽이 승리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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