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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심’이 먼저 새나간다

‘자존심’이 먼저 새나간다

최근 3년간 전국 국·공립대에서 1만7000명에 가까운 학생이 이공계를 떠났다. 해외 박사급 연구원들의 귀국은 줄어드는 반면 출국은 늘고 있다. 수년간 논의했지만 이공계 인재 확보 문제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과학의 달’을 맞아 이코노미스트가 산업기술진흥원과 함께 정부출연연구소 및 기업의 연구개발자 240명에게 직접 들어봤다.

대학 교수도 정년 보장이 어려워지는 시대에 정년보장제가 고개를 드는 곳이 있다. 지난해 8월 한홍택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 원장이 한국 연구기관이 세계적 연구소로 도약하기 위해선 정년연장 문제가 최우선으로 해결돼야 한다고 밝히면서 정부출연연구기관 연구원의 정년보장제가 논의되고 있다.

한나라당 이군현 의원은 지난해 9월 여야 국회의원 19명의 서명을 받아 우수 과학 기술인의 65세 정년을 법률로 보장하는 ‘과학기술 분야 정부출연연구기관 설립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등이 잇따라 지지성명을 내놓았고 개정안이 통과되면 과학기술 분야 20개 정부 출연연에 근무하는 모든 연구자의 정년이 11년 전의 정년인 65세로 연장된다.

이러한 논의가 나온 배경에는 처우에 불만을 가진 연구원들의 이탈이 계속됐기 때문이다. 한 출연연의 책임연구원은 “배가 고픈 게 아니라 아픈 게 문제”라고 말한다. 비슷한 활동을 하는 대학 교수의 정년은 65세인데 정부출연연의 정년은 외환위기로 인한 경영혁신 조치에 따라 책임급은 61세, 그 외 직급은 58세로 줄었다.

대학 졸업 후 석·박사와 박사후과정을 거치는 등 최소 6∼9년의 교육과 연구 경력을 지낸 후 진입하는 연구직의 특성상 업무 종사 가능기간도 짧아 노후대비가 어렵다는 것이 과학기술계의 입장이다. 그러다 보니 석·박사급 이공계 인재들의 해외 유출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회 이철우(한나라당) 의원은 “미국 내 한국 국적 이공계 박사학위 취득자 중 미국 체류 비율이 1994∼97년 23.9%에서 2002∼05년 43.0%로 20%포인트 이상 급격히 증가했다”고 밝혔다. 이 의원에 따르면 현재 이공계 박사 인력은 오는 2015년까지 약 8000명의 공급 부족이 예상되고 있으며 특히 공학계열에서 7100여 명이 부족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공계 고급 인재 부족은 한국 산업의 경쟁력 저하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윤종용 삼성전자 상임고문은 한 인터뷰에서 삼성전자의 경쟁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삼성전자에 박사가 3600명이다. 대다수가 이공계다. 서울대 공대 교수님들이 300여 명 정도인 점을 감안하면 10배가 넘는 수치다.”

석·박사급 인재 확보의 어려움뿐 아니라 청소년의 이공계 지원도 줄고 있다. 이상민(자유선진당) 의원이 지난해 공개한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2007년부터 2009년까지 전국 27개 국·공립대의 자퇴생은 총 2만7492명이었으며 이 중 이공계가 1만6899명으로 61.5%를 차지했다.

의학전문대학원 재학생 가운데 상당수를 이공계 출신이 채운다. 지난해 8월 시행된 2010학년도 의학전문대학원 입문검사에 응시한 수험생 가운데 공대, 자연대 등 이공계 전공자가 27.1%로 생물학 전공(38.2%) 다음으로 많았다. 이공계 인재 부족이 지적된 것이 하루 이틀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공계 기피 현상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것이 더 문제다. 기업이나 정부에서 뭘 해도 1980년대와 같이 전자공학, 제어계측을 비롯한 공학계열이 의대나 경영대보다 들어가고 싶은 곳이 될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현장의 엔지니어가 보는 이공계 인재 확보 문제의 진짜 이유와 해결 방안은 무엇일까.

지금까지 효과적인 정책이 실현되지 못했다는 전제하에 이코노미스트-한국산업기술진흥원 공동기획으로 국내 기업 연구개발자 140명과 정부출연연 연구원 100명 등 총 240명을 설문조사했다. 응답자 평균 연봉은 3000만~5000만원이었으며, 석사 이상이 80%를 차지했다. 응답자 중 40%가 “급여 및 성과급 등 경제적 보상 강화가 가장 효과적”이라고 답했다.

그 외 응답자의 20%가 연구과제에 대한 자율성 보장, 15%가 사회적 인식변화를 위한 우대정책을 꼽았다. 10%가 정년보장제, 5%가 직무발명보상제도를 꼽았다. 기타 의견으로는 ‘일회성이 아닌 장기적인 사회적 지원이 필요하다’ ‘개발자에 대한 실명제’ ‘반도체, 전자 등 선진 엔지니어만 우대할 것이 아니라 낙후된 분야에도 지원이 필요’ ‘아예 사시처럼 자격증 제도를 만들자’ ‘제안이 실현될 수 있도록 하는 제도’ 등이 있었다.

제시된 엔지니어 처우 개선 방안 중 가장 많은 답변이 나온 ‘경제적 보상’과 관련해 실제 엔지니어가 느끼는 만족도는 어느 정도일까. 엔지니어의 45%가 ‘보통’이라 답했고, 33%가 불만족을 나타냈다. 15%가 만족한다고 답했다. 근무환경에 대해서도 물어봤다. 엔지니어로서 진급의 기회가 적다고 느낀 응답자는 34%인데 비해 많다고 느낀 응답자는 13%로 적었다.

기술개발부서의 위상이 타 부서보다 높다고 생각한 응답자는 31%로 낮다고 생각한 응답자 31%와 비슷한 수준으로 나왔다. 근무환경이 연구개발 활동을 하는 데 있어 적합하느냐는 질문에 긍정적으로 대답한 응답자와 부정적으로 대답한 응답자는 각각 28%로 비슷한 수준으로 나왔다.


자부심은 높은데 자존심을 밟더라

한편 엔지니어로서 자부심을 느끼는 응답자는 37%, 매우 자부심을 느끼는 응답자는 12%에 달했다. 현재 업무에 만족하는 응답자 또한 39%로 그렇지 않은 응답자 11%에 비해 높았다.

자부심이 낮다고 대답한 응답자 4명 중 1명이 ‘급여 등 경제적 보상 부족’을 가장 큰 이유로 꼽았다. 실제 엔지니어의 연봉은 ‘직업능력개발연구’ 최신호(2009년 12월)에 발표된 논문 ‘전공계열별 교육투자의 장기적 노동시장 성과 분석’에서 ‘인문계에 비해 이공계의 연봉 수준이 낮지 않다’는 결론이 나온 바 있다.

‘임원급으로 올라갈수록 이공계 출신의 경쟁력은 떨어진다’와 같은 통념은 사실이 아닌 것이다. 이 논문의 공저자 한국직업능력개발원 김미란 박사는 대졸자 기준, 인문계와 비교하면 이과 계열은 적을 수 있는데, 공과 계열은 적은 게 아니라고 분석했다.

김 박사는 “그러나 석·박사 이상으로 갈수록 교육투자비용 대비 수익률 측면에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는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덧붙여 “엔지니어 스스로가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은 단순히 경제적 보상의 많고 적음을 떠나 과정 자체가 갖는 어려움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종합하면 보상 수준이 자부심에 비해 자존심에 미치지 않는다고 해석할 수 있다. 문제는 이와 같은 불만이 “해외 취업을 통한 이민 기회가 생긴다면 가고 싶다”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응답자 절반 이상이 해외 취업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들은 “우리나라가 미국, 유럽, 중국, 일본에 비해 엔지니어에 대한 사회적 평판이나 대우가 나쁘다”고 대답했다.

전문가들은 처우에 대한 불만이 기술유출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얼마 전 법무부와 대검찰청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기술유출 범죄는 2007년 191건에서 2008년 270건, 지난해 292건으로 해마다 꾸준히 증가했다. 기술유출 사범도 2007년 511명에서 2008년 698명, 지난해 807명으로 급증했고 이 중 재판에 넘겨진 경우는 2007년 151명, 2008년 210명, 지난해 194명에 달했다.

국가정보원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에 따르면 기술유출 범죄로 인한 누적 피해액이 무려 253조원에 이른다. 주요 타깃은 우리나라의 핵심산업인 자동차, 전자, 조선업 등이다. 산업기밀보호센터 통계를 보면 기술유출 주체로 전직 직원(56.2%)과 현직 직원(24.6%)이 전체의 80%가량을 차지한다. 직원들의 기술유출 동기를 보면 금전유혹(31.0%)과 처우불만(8.4%), 인사불만(5.9%) 등으로 나타났다.

이는 직원 특히 엔지니어의 처우 개선이 기술유출을 막는 방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계의 엔지니어가 모인다는 미국의 경우는 평균적으로 기업에서 엔지니어가 관리직보다 급여가 20% 정도 높다. 일본은 직무보상제도가 자리를 잘 잡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히타치는 특허를 활용한 제품의 매출과 특허권 수입에 대해 상한선 없이 이익금의 일정 비율을 특허 낸 직원에게 지급한다.

다케다 제약은 개발 상품이 잘 팔릴 경우 연구원 개인에게 지급하는 공로금을 최고 5000만 엔에서 1억5000만 엔으로 세 배 인상해 준다. 정부 운영에 엔지니어를 우대하는 나라도 있다. 프랑스 과학기술을 대표하는 CNRS(국립과학연구원)는 1939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장 페랭이 설립해 유럽 최고의 과학기술연구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이곳의 연구원은 과학 연구에 참여하는 공무원으로 규정돼 안정된 지위를 갖는다. 프랑스의 최고 이공계 대학이자 국가 엘리트 양성코스인 에콜 폴리테크닉(Ecole Polytechniq)은 명예와 출세의 상징이다. 이곳을 졸업한 학생들은 과학자나 엔지니어로만 국한되지 않고 국가 고급 공무원이나 대기업 간부 자리로 진출할 수 있다. 지금도 프랑스 각계의 리더로 활약하고 있다.

중국도 다양한 과학기술자 우대정책을 실행하고 있다. 특히 ‘고급공정사제도’가 눈에 띈다. 이는 국가기술고시를 통과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자격증으로 취득한 후에는 기업체와 정부 기관단체의 책임자로 근무한다. 국가지도층 중에서도 가장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중앙당 정치국 상무위원 9명이 전원 이공계 대학을 나온 테크노크라트 출신이다.

한편 인재의 해외 유출이 많은 나라는 인재 잡기에 혈안이 돼 있다. 중국은 근무 조건을 자국이 아닌 홍콩이나 싱가포르로 내세우거나 급여 외 주재원 수당과 국제학교 학자금 등을 내세워서라도 해외 인력을 잡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미국으로의 인재 유출이 많은 인도는 복수국적 제도를 도입해 미국의 첨단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미국 국적을 포기할 필요 없이 인도에서 취업할 수 있도록 해 인재 확보를 하고 있다.

물론 우리 기업이나 연구소도 기술유출 문제 등을 예방하고자 그간 엔지니어 처우 개선에 노력해 왔다. 일례로 2004년 동아제약 전직 연구원인 왕모씨가 회사를 상대로 낸 직무발명 보상금 청구소송에서 1억76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이 나온 이후 기업의 직무발명보상제도는 어느 정도 자리 잡았다. 문제는 회사별, 사례별로 회사와 엔지니어를 동시에 만족할 만한 지점을 찾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김윤배 한국국제지적재산권보호협회장은 “대학과 정부기관은 이미 선진국 수준이지만 기업마다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직무발명보상제도가 정착됐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가방 끈은 길고 월급은 적고

윤선희 한양대 법대 교수는 “직무발명보상제도를 악용하려는 종업원도 있어 문제”라고 지적했다. “종종 과다하게 요구하는 엔지니어도 있다. 개발에 성공해도 100% 활용해 사업화하지 않는다.

특허를 받은 것 중 10%만 활용할 수도 있다. 게다가 팀 단위로 연구하는 경우가 많아 보상에 모호한 점이 있다. 그리고 종업원 입장에서는 성공한 사례만 얘기하고 있는데 실패한 건 얘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업화를 해서 돈을 번다는 보장도 없다. 이러한 부분에 있어서 보완이 필요하다.”

설문조사 중 특이할 점은 해외뿐 아니라 과거보다도 엔지니어 처우가 못하다는 결과가 나왔다는 것이다. 40년 전인 박정희 시대보다 엔지니어 대우정책이 후퇴했다고 대답한 응답자가 48%에 달했다. 당시 정부는 청와대에 과학기술비서관을 두고 한국과학기술원을 세워 적극적으로 해외의 우수한 한국인 과학자들을 불러들였다.

대우는 미국에서 받던 봉급의 4분의 1밖에 안 됐지만 국내 국립대학 교수의 3배나 되고 대통령 봉급보다 많았다. 의료보험이 국내에 없어 미국 회사와 계약해 가입시키고, 자녀 교육대책까지 세워주었다.

김희동 한국외국어대학교 정보통신공학과 교수도 요즘과 같이 이공계 전문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는 정부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김 교수는 정부의 보조로 박사과정까지 마칠 수 있었다.

그가 입학한 1981년에는 이공계 우수학생에 대해 전액 등록금이 지원됐고, 교재비 명목으로 월 3만원씩 따로 지원됐다. 기숙사도 거의 공짜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최근 한국장학재단의 이공계 지원이 축소되면서 김 교수는 제자 앞에서 면목이 없어졌다.

한국장학재단의 장학금 종류는 학부생과 대학원 진학자를 위한 국가연구장학생으로 나뉜다. 이 중 인문사회계는 652명 정도 지원받고 있지만 이공계는 아예 폐지됐다.

그는 교육과학기술부에 문제를 제기했지만 돌아온 답변은 “이공계는 이미 많은 지원을 받고 있고 위에서 결정한 사항이니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김 교수는 “나라에서 비싼 학비 때문에 공부를 주저하는 석·박사급 이공계 고급 인재 양성에 힘을 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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