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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주주 여러 번 바뀌면 일단 의심

대주주 여러 번 바뀌면 일단 의심

퇴출 대란(大亂). 머니게임을 일삼는 부실기업뿐 아니라 벤처신화로 불리던 기업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난 한 해 코스닥 시장에서 65개사가 상장폐지됐다.

올해도 벌써 39개 기업이 퇴출당했다. 유가증권 시장에서는 8개 기업이 쫓겨났고 자원개발 업체 2곳이 부도와 감사의견 거절로 퇴출 절차를 밟고 있다.

비록 유예기간을 받기는 했지만 시가총액 4000억원이 넘는 네오세미테크마저 퇴출 대상에 오르며 기업과 투자자의 공포는 극에 달했다. 2010년 봄을 얼어붙게 한 퇴출 대란. 그 이유는 무엇이고 투자자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벤처신화도 역사 속으로퇴출 대란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등장한 많은 대한민국의 벤처신화마저 ‘과거사’로 만들었다. 한국 보안업계 1세대 업체인 인젠, ‘아이나비’와 쌍벽을 이루며 내비게이션 업계 2위까지 올랐던 엑스로드, 스마트카드 업계 1위였던 하이스마텍이 퇴출당했다. 토종 패션기업의 선두주자였던 쌈지와 ‘투자업계의 벤처’로 불리는 ‘수퍼개미’가 인수한 비전하이테크도 마찬가지다.

‘엠씨스퀘어’로 유명한 지오엠씨는 지난해 11월 실질심사 퇴출 결정 후 5개월간의 유예기간을 받아 연명하고 있다. 토종 대표 소프트웨어 기업인 한글과컴퓨터도 횡령·배임에 휘말려 퇴출심사를 받은 뒤 구사일생으로 상장폐지를 면했다. 하지만 주인을 잃은 채 시장에 매물로 나와 있다.

벤처투자로 이름을 떨치던 한국기술투자(KTIC홀딩스)도 612억원 횡령 혐의에 휘말려 겨우 퇴출을 면한 신세다. 이런 퇴출 대란의 중심에는 지난해 자본시장법과 함께 출범한 코스닥시장본부의 ‘상장폐지 실질심사’가 있다. 1996년 출범한 코스닥 시장은 단기간에 가장 성공한 시장이지만 단 한번도 정화작업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한국거래소가 직접 총대를 메고 시장 정화에 나섰다.

명목상 실질심사의 덫에 걸려 퇴출당한 회사의 수는 지난해 16개사. 올해는 13개사로 소폭 줄었다. 하지만 실질심사의 파급효과는 메가톤급으로 강력해졌다. 특히 회계법인들은 감사의견 ‘적정’을 부여한 기업이 실질심사에 걸려 퇴출당하는 일이 잦아지자 감사기준을 엄격하게 적용하기 시작했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대부분 자본잠식만 아니면 ‘적정’을 주던 회계법인들이었다. 그러나 올 들어 상장사의 ‘계속기업 가치’ 등 정성적 평가와 관련해 엄격한 잣대를 대며 퇴출 대란을 불사했다. 실제 올해 퇴출당한 코스피 8개사 중 5개, 코스닥 40개사 중 11개사가 회계법인의 감사의견을 받지 못했다.

국제회계기준(IFRS) 도입을 앞두고 금융감독원이 회계법인 감리를 강화하려는 움직임 역시 회계법인을 전방위로 압박했다. 금융당국은 2001년 이후 8년 만에 처음으로 2009년 9월 업계 10위권의 화인회계법인에 영업정지 처분을 내렸다. 분식회계로 상장폐지 탈출을 방조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회계법인들은 퇴출을 불사하며 상장사의 부실과 분식회계를 낱낱이 캐기 시작했다. 달라진 회계법인의 태도에 상장사는 당혹스러워하면서도 속수무책이다. 외부감사인에 관한 법률 적용 대상인 상장사는 회계법인으로부터 감사의견을 받지 못하면 이의신청으로밖에 대응할 수 없다.

심지어 많은 부실기업은 실질심사의 ‘정화망’을 벗어나지 못할 것을 알고 자진해 상장을 포기하기도 했다. 감사의견 거절을 받은 기업 대부분이 회계감사 서류를 숨긴 채 상장을 포기하고 달아났다. 2010년 퇴출 대란은 한국 투자자들에게 경영진의 도덕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실하게 일깨워줬다.

실제 자질이나 역량이 부족하거나 사업을 못해 퇴출당한 회사보다 횡령·배임으로 퇴출당한 회사가 훨씬 많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상장폐지된 기업 70개사의 46%(32개사)에서 최근 2년간 횡령과 배임 혐의가 발생했다. 이 중 횡령·배임 총액이 자산총액 이상인 기업의 수가 17%(12개사)에 달했다.

인젠은 1998년 국내 최초로 침입탐지 시스템을 개발해 국가인증을 받은 뒤 2002년 화려하게 코스닥에 상장했지만 보안 1세대로 꼽히는 임병동 대표이사는 기술개발보다 바이오 업체 리젠, 정보기술 업체 퓨처인포넷 등의 M&A(인수합병)에 더 집중했다. 이후 임 대표는 2007년 회사를 홍콩 투자회사에 매각했고 자원개발 업체로 변신한 뒤 70억원 횡령·배임 혐의에 휘말려 감사의견도 받지 못했다.

하이스마텍은 1998년 창업 후 스마트카드의 핵심 기술을 국내 최초로 상용화해 국내 금융 분야 스마트카드의 60% 이상, 발급 시스템의 95% 이상, 그리고 모바일뱅킹 시스템의 70% 이상을 공급하는 1위 업체였다. 그러나 경영진을 잘못 만난 탓에 퇴출당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집중력 향상기 엠씨스퀘어의 개발사 지오엠씨도 정체불명의 지위인 ‘경영지배인’이 회사를 휘저은 뒤 대규모 횡령·배임에 시달렸고 실질심사 후 퇴출결정을 받았다. ‘국민 소프트웨어 기업’으로 불리던 한글과컴퓨터는 수차례 매각을 거쳐 결국 계열사의 횡령 혐의에 얼룩졌고 퇴출 위기를 간신히 넘겼다.



신사업으로 투자자 유혹이찬진 한글과컴퓨터 창업자가 외환위기와 마이크로소프트의 공세로 어려움을 겪었을 때 이민화 벤처기업협회 회장이 국민 한컴 1주 갖기 운동 등을 벌여 부도 위기를 넘겼다. 하지만 2002년부터 티티엠, 넥스젠캐피탈, 서울시스템, 프라임그룹 등으로 손바뀜(주주 변경)이 계속됐고 결국 김영민, 김영익 형제가 경영하는 셀런에 인수된 뒤 횡령 사건 속에서 퇴출 위기로까지 몰린 것이다.

1000억원대 횡령 혐의로 검찰에 구속된 ‘기업 사냥꾼’ 박성훈씨의 경우 액티투오, 엔티피아 등 무려 4개 상장사의 경영권을 장악하며 위기로 내몰았다. 검찰이 주목한 부분은 이들이 회사 자금 1172억원을 횡령하고 해당 회사에 734억원 상당의 손해를 입힌 혐의였다.

이 중 상장폐지 과정을 밟고 있는 액티투오는 박성훈 대표 등 경영진이 딴 주머니를 차는 동안 2007년 34억원이던 손실이 지난해 374억원으로 2년 만에 10배로 늘었다. 또 박 대표가 인수한 엔티피아는 경영진이 수억원대 연봉을 받으며 포르셰 같은 외제 자동차를 굴리는 동안 공장 직원들은 경조비를 삭감해 비용절감을 추진했다고 한다.

2007년 7월 코스닥 시장에 상장한 디지털 영상저장장치(DVR) 업체 아구스도 결국 경영진의 횡령이 퇴출의 직접적 원인이 됐다. 통화파생상품 키코로 큰 손실을 입고 나서 사업이 부진해지자 천규정 대표는 170억원을 들고 종적을 감췄다. 투자하려는 회사의 대표이사가 딴 주머니를 찰 의도가 있는지 사람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는 없다.

하지만 경영진과 대주주가 여러 번 바뀌거나 사업을 자주 갈아치우는 테마주는 피하는 게 좋다. 새로운 경영진이 입성한 기업은 바이오, 전기차, 태양광, 자원개발 같은 신사업을 들고 투자자를 현혹한다.

하지만 대부분 기존 경영진과 암묵적 합의에 의해 부채를 떠안는 경우가 많다. 특히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려 무자본으로 M&A를 추진하면 무리한 주가 부양이나 신규 사업 추진이 화를 부르고 횡령·배임으로 이어지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그리고 결국 그 부채는 회사 사정을 모르는 개미 투자자에게 고스란히 돌아오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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