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 뿌리는 알타이의 시조
우리 민족 뿌리는 알타이의 시조
포드를 설립한 헨리 포드는 공대를 나오지 않았다. 피터 드러커는 “헨리 포드가 공학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새로운 상태에서 혁신을 이뤄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김운회 동양대 경영관광학부 교수 역시 마찬가지다. 역사학을 배운 적이 없는 경영학과 교수지만 『대쥬신을 찾아서』를 썼다. 김 교수는 스스로를 ‘고증학자’로 칭하며 자신이 연구한 사료에 따르면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국사는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가 최근 전경련 국제경영원의 CLIG 최고위 과정에서 한국 고대사에 대해 강의했다. 다음은 강의 요약. ‘오랑캐’란 말은 한국에서 한족(漢族)을 제외한 민족을 지칭할 때 쓰인다. 그러나 이러한 분류법이라면 한국인 또한 오랑캐에 속한다. 스스로를 오랑캐와 구분지었건만 결국 스스로를 오랑캐라 칭한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인은 과연 어떤 오랑캐였을까.
삼족오가 들려주는 뿌리의 비밀이 점을 알기 위해서는 알타이 지역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알타이 지역과 한반도는 민족적인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로 이주해온 사람 대부분은 알타이 지역을 중심으로 한 몽골 북만주나 중국 북부를 지나왔다. 또 일본 역사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만주어로는 동쪽 오랑캐를 일컫는 말인 왜(倭)는 실제 ‘와’라고 발음해야 맞다.
또 지금은 우리가 일본을 낮추어 부르는 말로 왜를 쓰지만 주로 전라남도, 충청남도 해안지대 등 한반도에 사는 사람, 한국인을 부르는 명칭이었다. 이처럼 한반도의 역사는 일본, 몽골의 역사와 관련 깊다. 일왕(日王)의 직계조상이 실제적으로는 개로왕이다. 칭기즈칸의 시조모 알랑고아는 고구려 건국신화에 나오는 유화 부인과 같고 그의 아버지는 우리말로 고주몽이란 뜻과 같다.
또 칭기즈칸이 받은 첫 번째 작호는 ‘자오드 까오리’ 즉 고려왕이란 뜻을 갖고 있다. 이렇듯 몽골은 지금까지 한국을 남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한반도가 몽골, 일본과 맺고 있던 관계가 왜곡되고 끊어진 것은 왜일까. 조선시대의 성리학 때문이다. 성리학은 사회과학인 공명의 유학과 철학인 인식론이 결합된 학문이다.
중국에서는 일찍 죽어버린 학문이었지만 한국에서는 유독 주체사상 즉, 소중화(小中華)사상으로 고도로 발달한다. 그 결과 한국의 전통은 스스로 끊어지게 된다. 일례로 중국은 용 토템을 가진 것에 반해 유목민은 봉황으로 대표되는 새와 관련된 토템을 갖는다. 몽골, 만주, 한국인 등 동이족은 봉황을 중시했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샌가 봉황이 아닌 용을 더 중시해 왔다. 이는 축구협회의 문장이 삼족오일 정도로 전통을 잘 유지한 일본과는 대조된다. 문제는 우리가 우리의 전통을 잃어버린 사이 중국의 동북공정 프로젝트가 빠르게 진행됐다는 것이다. 중국은 스스로 등한시하던 공자를 다시 연구 중이고 용 토템을 가진 것으로 모자라 봉황을 연구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 한다.
1954년 발간된 중국 지도에서 한반도는 중국이 앞으로 정복해야 할 16번째 땅으로 표기된 바 있다. 물론 한국에도 동북아역사재단과 같은 북방문화를 지키려는 움직임이 있다. 그러나 고구려, 발해를 지켜도 소용없다. 망한 지 1000년이 지난 나라다. 중요한 건 한국사가 만주사와 연관돼 있고 몽골 등 나라와 불가분 관계에 있다고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고구려를 거슬러 부여에서 시작해보자. 금와왕의 나라를 코리국(부여)이라 불렀다. 부여는 여러 기록에 따르면 ‘카오리’에 가까운 발음이었다. 결국 부여의 금와왕은 알타이의 시조로 부여는 알타이 지역에 있는 나라로 추정된다. 부여에서 갈라져 나와 고구려와 백제가 건국됐다. 여기서 ‘코리아’란 말이 시작됐다고 본다.
‘아리수’는 중국에도 있다언어뿐 아니라 두개골 구조를 봐도 알 수 있다. 지금의 카자흐스탄인 두개골과 한국인의 것이 75% 정도 일치하고 몽골과 알타이 주변 사람의 것과도 흡사하다. 시베리아의 한기의 영향을 받아 눈이 작고 다리가 짧다. 체질은 알타이, 한반도, 혼슈와 규슈에 전방위에 걸쳐 비슷하다. 심지어 항체까지 비슷하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한국사를 만주사와 연관 짓기는커녕 단절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국사 교과서는 ‘동호는 몽골의 조상, 숙신은 여진의 조상, 예맥이 한국의 조상’으로 나눴다. 한편 한국 사기는 ‘영동·서, 북한강 등지에 여기저기 말갈이 퍼져 있다’고 기록한다. 잘못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한자어 발음으로 읽으면 말갈은 ‘모쉬’, 예맥은 ‘쉬모’라고 읽는다. ‘쇠’의 뜻이 포함됐다. 당시는 광활한 초원에서 볼 때 땅으로 태양이 지기 때문에 땅에 태양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했다. 땅에 묻혀 있는 금(金)을 중시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와 같이 쇠를 중시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특성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을 한국인이 아니라고 말한다.
한국인이 누구인지에 대해 잘못된 전제를 내렸기 때문에 국사 교과서는 스스로가 만든 오류에 빠지기도 한다. 고려통일 후 백제가 충주, 개성 근방에서 봉기를 일으켰다고 설명하는 부분과 왕건의 부친인 왕융이 궁예를 설득하기 위해 “숙신과 변한의 땅을 지배하려고 하면…” 부분이 좋은 예다.
개성 근방을 숙신의 땅이라고 지칭했는데, 그렇다면 이곳은 오랑캐의 땅이면서 이곳의 사람들이 봉기했다고 표현하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조선시대에 잘못 이해된 역사가 그대로 왜곡돼 전해져 오는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고대사가 왜곡돼 우리 문화의 우수성이 드러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때 몽골제국은 유일하게 한국만 나라로 인정했다. 코리족(코리안)의 일부가 한국으로 내려갔다고 생각해 형제국으로 간주했다. 몽골은 고려를 부마국으로 삼았다. 쿠빌라이 칸의 장례식에 참여할 수 있었던 건 몽골인과 고려인이 전부일 정도였다. 청 황제도 스스로 성을 애신각라(愛新覺羅), 즉 김씨로 칭하고 신라의 후손으로 여겼다.
우리가 주변국의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한국인이 최첨단 청동기 문화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실제 세계 최첨단의 청동기 문화는 한국인의 이동에 따라 나타났다. 농경문화가 발달된 중국 남부에 한국인이 건너간 뒤 비로소 청동물품이 생겼다. 은나라는 청동기 완제품만 발견된다. 한국에서 수입됐다는 뜻이다.
몽골 유목민이 남긴 기록에도 한국인의 이동경로가 나타나 있다. 몽골 유목민은 지명을 지니고 다녔는데 칭기즈칸의 발상지 유역의 강, 압록강, 서울의 한강, 경주의 형산강 등은 모두 ‘아리수’란 이름을 갖고 있다.
그런데 중국이 동북공정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동안 한국은 자신의 뿌리인 만주와 멀어져 가고 있다. 북방을 누비던 코리안. 큰 범주에서의 한국인이 사라지고 있다. 만주어 자체가 없어지고 만주족과 몽골족의 흔적이 없어져 허리가 잘릴 형국이다. 한국인은 한반도 남쪽에 남아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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