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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계에 길이 남을 그레이스 스타일

패션계에 길이 남을 그레이스 스타일

이 옷의 디자인은 마치 “사거리 1500마일의 탄도미사일 설계도”인양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우아하고, 여성스럽고, 숙녀다운” 실루엣에 신선한 우유처럼 새하얀 색상을 입혔다.

숲 속의 동물들이 신데렐라의 드레스를 만들 듯 35명의 재봉사들이 6주 동안 꼬박 작업에 매달렸다. 소재로는 125년 전 직조된 브뤼셀 레이스(17세기 후반부터 브뤼셀에서 제조되던 고급 레이스)가 사용됐다.

이 작품(미국인이 디자인하고, 미국인이 만들고, 미국인이 입었다)은 드레스의 주인공이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훌륭한 드레스 디자이너들이 있는 나라(미국)” 출신이라는 점을 과시하도록 고안됐다. 그리고 주인공이 입고 난 뒤엔 곧 영구 보존을 위해 박물관으로 보내졌다.

미국 퍼스트 레이디 미셸 오바마가 남편의 대통령 취임식 무도회 때 입었던 제이슨 우의 우아한 흰색 드레스 이야기일까? 오바마의 드레스는 실제로 얼마 전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기증돼 전시에 들어갔다. 하지만 앞의 인용문 내용은 요즘 블로거들이 쓰지 않았다. 1950년대 패션 칼럼니스트들이 영화배우 그레이스 켈리의 우아하고 풍성한 웨딩드레스를 묘사한 글이다(켈리는 1956년 모나코의 국왕 레이니에 3세와 결혼했다).

오바마의 취임식 무도회 드레스처럼 켈리의 웨딩드레스는 인생의 한 획을 긋는 역할을 했다. 이전의 개인적인 삶을 뒤로 하고 국가 지도자의 부인으로 세계 무대에 선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녔다. 이 드레스는 또 퍼스트 레이디(또는 왕비)의 패션에 보인 언론의 집착에 불을 댕기는 계기가 됐다.

재키 케네디는 멋진 현대 정치인의 배우자 중 대표적인 인물로 꼽힌다. 그녀의 명성을 뛰어넘은 유일한 여성이 영국의 다이애나 왕세자비였다. 하지만 그들 이전에 켈리가 있었다. 그녀는 언론이 ‘세기의 결혼’이라고 명명한 결혼식에서 전례 없는 환호를 받으며 모나코의 왕비가 됐다.

재키가 베스트 드레서로 명성을 얻기 시작한 1960년 켈리는 이미 패션의 명예전당에 올라 있었다. 게다가 얼마 전 켈리에게는 또 다른 영예가 주어졌다. 런던의 빅토리아&알버트(V&A) 박물관에서 그녀가 생전에 입었던 의상 50벌을 전시하는 ‘그레이스 켈리: 스타일 아이콘 전’이 개막됐다.

패션계 외부에서는 이런 전시회의 가치를 놓고 심심찮게 논쟁이 벌어진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열리는 패션 전시회는 예쁘장한 치어리더 같은 취급을 받는다. 내용은 없고 그저 예쁜 겉모습으로 인기를 끈다는 비난이다. 때로는 이렇게 심한 비난을 받아 마땅한 경우도 있다.

2000년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열린 조르조 아르마니 전시회는 상업적 색채가 너무 짙어서 조롱을 당했다. 그러나 켈리의 의상들은 경멸이 아니라 찬사를 받아 마땅하다.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영화에서 선보였던 그녀의 우아한 드레스들은 지금까지도 칭송을 받는다. 또 켈리가 왕비가 된 뒤엔 그녀의 평상복이 언론의 새로운 주목을 받았다.

오늘날의 패션에서 그녀의 영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분야다. 켈리는 유럽의 왕족으로 살면서도 평상복을 입을 때는 전형적인 미국식 패션을 따랐다. 단순한 라인과 정확한 재단, 단정한 느낌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여대생 패션’이다. 켈리의 스타일은 그녀가 어떤 옷을 입었는가가 아니라 어떤 옷을 입지 않았는가로 더 잘 정의된다.

1955년 위민스 웨어 데일리는 이렇게 썼다. “켈리는 몸의 곡선을 지나치게 드러내거나 너무 타이트한 옷, 사치스러운 모피, 돈 냄새만 풍기는 듯한 보석을 절대 입지 않았다.” 그녀가 왕비가 된 후엔 엄격하게 절제된 그녀의 패션 스타일이 세계 언론의 주목을 자주 받았다. 1961년 켈리가 백악관을 방문했을 때 입었던 평범한 초록색 울 원피스는 세간의 화제가 됐다.

켈리의 웨딩드레스는 퍼스트 레이디의 패션에 보인 언론의 집착에 불을 댕겼다.

언론은 켈리와 당시 백악관의 여주인이던 재키의 만남을 다룬 기사에 ‘두 여신의 만남(The Goddesses Meet)’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 제목은 오늘날에도 잘 어울릴 듯하다.

예를 들면 (나르시소 로드리게즈의 짙은 푸른색 원피스를 입은) 미셸 오바마가 백악관에서 그리스의 퍼스트 레이디를 맞이하는 기사에 딱 들어맞겠다. 켈리가 생전에 입었던 의상들을 지금 다시 끄집어내 전시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이유다.

요즘 Mrs. O(부제: 패션 민주주의의 얼굴) 같은 블로그들이나 뉴욕 매거진의 ‘미셸 오바마 룩 북’ 등은 예전의 패션 칼럼니스트들처럼 퍼스트 레이디의 패션을 시시콜콜 파헤친다. 그들은 오바마가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을 만나는 자리에서 여학생 같은 느낌의 카디건 착용이 합당한 행동이었는지를 분석한다.

또 프랑스의 퍼스트 레이디 카를라 브뤼니-사르코지를 만났을 때 사르코지가 입었던 디오르의 의상과 오바마가 입었던 타쿤의 꽃무늬 원피스가 어떻게 비교됐는지를 따진다. 켈리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언론의 조명(그녀가 1982년 교통사고로 사망한 이후에도 계속됐다)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언론의 자유가 활성화되다 보니 그로부터 자유로워지기가 쉽지 않다.” 미셸 오바마 역시 자신의 패션 스타일을 시시콜콜 분석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당황한 듯 보인다. 그녀는 지난달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드레스를 기증한 일과 관련해 “이게 무슨 난리인가 싶어 약간 당황했다”고 털어놨다. 그녀는 TV 뉴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내가 입었던 옷을 전시하고 싶어하는 상황이 낯설게 느껴진다.” 패션의 여신으로서 할 말은 아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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