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에 ‘종이 DNA’심어 회생
방송에 ‘종이 DNA’심어 회생
경인방송 iTVFM(옛 iTV)의 법정관리 졸업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인천지법 파산부는 최근 ‘경인방송이 최대주주 지분율을 낮추면 법정관리를 졸업해도 좋다’는 견해를 밝혔다.
방송법에 따르면 지상파·종합편성 및 보도채널의 1인 최대주주가 보유할 수 있는 지분한도는 40%다. 경인방송의 최대주주는 77.37% (2010년 6월3일 현재)의 지분을 가진 정복균씨다.
이 방송사의 권혁철 대표는 “최대주주 지분을 조정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며 “이 조정이 마무리되면 법정관리 졸업을 청구할 방침”이라고 했다. 경인방송 관계자는 “(지분 조정 작업은) 3개월 정도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경인방송은 2007년 1월 극심한 경영난을 극복하지 못한 채 법정관리에 돌입했다. 방송사 최초의 일이었다. 올해 법정관리를 졸업하면 1000여 일 만의 회생이다.
경영진-직원 혼연일체로 위기 탈출 이 방송사가 법정관리 졸업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던 힘은 괄목할 만한 재무개선에 있다. 2003년 300억원에 육박했던 채무가 올 6월 현재 2억1612만원으로 줄었다. 2009년엔 흑자전환에 성공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경인방송의 눈물겨운 회생기다. CEO는 침체된 조직문화에 근성을 심었고, 직원은 방송을 살리겠다는 의지로 가시밭길에 몸을 던졌다.
장우식 방송본부장은 “경영진과 직원이 혼연일체되지 않았다면 지금도 수렁에서 헤매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경인방송은 한때 전국 방송사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렸다. 외환위기 시절인 1998년 메이저리그 중계권을 획득해 박찬호 선수의 경기를 독점 방영한 게 주효했다.
다른 지역민방과 차이도 컸다. SBS를 중계하는 부산방송 등 지역민방과 달리 모든 프로그램을 자체 편성했다. 하지만 이게 독이 됐다. 과욕을 부린 탓에 고비용·저수익의 수렁에 빠져든 것이다. 2003년엔 누적손실 878억원을 기록했고, 총부채가 총자산을 훌쩍 뛰어넘었다. 설상가상으로 최대주주 동양제철화학의 보유주식이 상한선(당시 30%)을 초과했다.
2대주주였던 대한제당은 추가 투자의지를 접었다. 방송위원회는 2004년 경인방송의 재허가 추천을 거부했다. 이 역시 방송사상 초유의 일. 재허가 추천이 거절된 사례는 경인방송 이후 단 한 건도 없다. 자본잠식에 빠졌던 경인방송은 방송사는 물론 법인으로서도 가치를 잃었다.
500명에 달했던 직원의 고용계약도 자동 해지됐다. 그야말로 파국 상태. 이때 일부 직원이 의기투합했다. 기존 경영진·노조 집행부와 다른 생각을 가졌던 이들은 비상대책위원회를 손수 꾸렸다. 그리고 곧장 거리로 나가 ‘iTV 살리기 길거리 방송’을 열었다. 무일푼이었지만 그랬다.
방송이 송출된 것도 아니었다. 그저 ‘경인방송을 살릴 수 있으면’ 됐다. 월급통장에 1년여 돈이 입금되지 않았지만 이들은 사생결단이었다. 꿈은 이뤄진다고 했던가. 2005년 12월 FM방송의 재허가가 떨어졌다. 직원들은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비대위를 이끌었던 장우식 본부장은 이렇게 회상했다.
“TV는 고사하고 라디오라도 방송할 수 있었으면 했다. 그래서 참았다. FM방송의 재허가가 떨어진 후 한국방송광고공사(코바코)로부터 월 1200만원의 광고액이 할당됐다. 적은 금액이었지만 그때의 감회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FM방송의 재허가 결정은 굵은 울림을 줬지만 아쉽게도 금세 사라졌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진짜 살아남기 위해선 뭔가 달라져야 했다. 경인방송의 문화는 권위로 통했다. 전국방송을 지향한 탓에 지역을 외면하기 일쑤였다. 보이지 않는 고객의 요구에도 둔감했다. 이런 타성을 타파한 주인공은 2007년 CEO에 오른 권혁철 대표다. 권 대표는 인천일보 정치부장 등을 거쳤다.
그런 그에게 방송사 문화는 낯설기 그지없었을 게다. “온실 속 화초 같았다. 발로 뛰는 사람도 없었다. 오죽하면 잘 키운 기자 한 명이 열 PD보다 낫다는 생각마저 했다. 남과 다르다는 권위적 문화도 문제였다.” 권 대표의 말이다.
그는 방송에 ‘종이신문의 투박한 DNA’를 심었다. ‘방송인은 남과 다르다’는 특권의식을 버리고 지역으로 먼저 들어가자고 했다. 방송 자체가 아닌 내용으로 감동을 주자고 했다.
값비싼 방송장비 대신 날 선 펜을 들자고 한 것이다. 그래서 내건 슬로건이 겸손한 방송·솔직한 방송이다. 방송거품을 빼자는 취지였다. 이는 경인방송의 새로운 DNA다.
이 방송사의 PD는 누가 찾아오든 일어나서 맞는다. 그래서 연예기획사 매니저가 가장 좋아하는 방송사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무시당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현장 중심의 솔직한 방송문화도 정착됐다.
경인방송의 중계차 BOX907은 인천의 새로운 명물이다. 2~3명의 상인만 있어도 중계차가 출동해 오픈 스튜디오를 연다. 방송거품이 빠지자 직원의 마인드도 덩달아 변했다. 보이지 않는 청취자를 잡기 위해 아이디어를 짜냈다. 자신의 편안함보단 청취자를 먼저 생각하는 문화가 형성된 거다. 대표적인 것이 ‘달리는 인생택시’다.
이는 지상파 최초의 새벽 2시·4시 프로그램이다. 택시운전기사에게 전화를 걸어 음악선물을 주거나 새벽까지 일하는 공단 직원에게 간식을 제공하는 게 프로그램의 골자다. 장 본부장은 “노조가 있었던 예전엔 생각할 수도 없었던 아이템”이라며 “직원의 안락함보단 청취자를 어떻게 잡을지 먼저 고민한다”고 말했다.
경인방송엔 노조가 없다. 대신 사원협의체를 운영한다. 2004년 폐업 당시 고별방송까지 노사갈등으로 하지 못했던 경인방송으로선 팔색조 같은 변신이다. 권 대표는 “무노조 경영이 꼭 좋다고 할 순 없다”면서도 “하지만 빠른 의사결정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지금까진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겸손하고 솔직한 방송으로 승부이런 노력은 알찬 열매로 맺혔다. 경인방송의 매출은 2007년 35억원에서 2009년 53억원으로 1.5배가 됐다. 올해 목표는 70억원이다. 코바코의 광고도 2005년 월 1200만원에서 지난해 1억9167만원으로 크게 늘었다. 실적개선보다 더 큰 소득이 있다. 무엇보다 평판이 좋아졌다. 방송통신위원회의 방송평가(2008)에서 경인방송은 ‘내용 및 편성’ 부문에서 전국 149개 라디오 방송사 중 1위에 올랐다.
경인방송 관계자는 “방송에 미쳐 있는 사람들이 밤낮없이 뛰어다니며 새로운 시도를 한 결과”라고 말했다. 선호도 또한 높아졌다. KT모바일리서치가 올 5월 인천·부천 지역 청취자 873명을 상대로 실시한 ‘지금 당장 지역 관련 뉴스와 교통정보를 얻고 싶다면 어떤 라디오 방송을 듣겠는가’라는 설문조사에서 경인방송은 30%를 얻어 1위에 올랐다.
인천교통방송(22%), KBS(17%)를 크게 따돌렸다. 장 본부장은 “지역에서 채널 선호도가 높은 것은 경인방송이 추구하는 지역 밀착 방송의 효과로 보인다”고 말했다. 권 대표는 “경인방송엔 더 이상 방송사 특유의 거품이 없다”고 자부했다. “작지만 강하고 강하지만 겸손하다”는 것이다.
이를 밑거름 삼아 인천을 상징하는 방송사로 거듭나겠다는 게 그의 포부다. 경인방송의 PD·작가·DJ의 주요 일과 중 하나는 지역 공원을 돌아다니는 것이다. 지역을 ‘겸손하게’ 훑고 민심을 ‘솔직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다. 경인방송이 기존 대비 10분의 1 인력으로 법정관리를 성공적으로 탈출하고 있는 원동력이다. 절망의 끝자락에서 몸소 체득한 생존의 황금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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