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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의 눈으로 본 1950년

좌파의 눈으로 본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서울로 입성하는 미군들.

▎한국전쟁 당시 서울로 입성하는 미군들.

본래 한국전쟁 3부작 리뷰에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 1,2’를 포함시키려 했다. 이 책이 1980년대 이후 한국사회에 해온 ‘긍정적이면서 파멸적인 역할’을 염두에 두면 당연히 그래야 옳다.

사실 커밍스의 영향력은 책 한 권 이상이다. 한길사 ‘해방전후사의 인식’시리즈와 함께 80년대 사회과학시대를 주도해 온 핵심서적이다. 그게 왜 문제일까?

현대사에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긍정적인 기능을 했지만 잘못된 가설로 건국 이후사를 먹칠했고, 그래서 청산되지 않은 유산을 남긴 게 ‘한국전쟁의 기원’이기 때문이다. 1980년과 1991년 미국에서 1,2권으로 나눠 출간된 이 책의 초기 평가는 대단했다. 미국 역사학회로부터 ‘존 킹 페어뱅크상’ 등 수많은 상을 탔고, 이후 국제적인 한국전쟁 연구 붐을 조성했다.

그동안 한국전쟁은 사실 ‘잊힌 전쟁’으로 남아왔다. 그것까지는 좋다. 냉전연구에서 이 핵심적인 서적이 미국과 한국에 던진 영향은 조금 달랐다. 미국에서는 학계 논쟁에 그쳤다. 1960~80년대 수정주의(revisionism) 경향을 대표하며 그곳 지식사회 지형지물에 변화를 몰고 왔다.

한국에서는 달랐다. 80년대 전체와 그 이후까지 한국사회를 온통 좌우했다. 운동권이라는 존재, 그리고 좌경화로 치닫는 사회 분위기도 이 책의 영향을 받았다. 민주화 대항쟁이라는 87년 체제를 만들어낸 숨은 힘도 이 책이다. 하지만 현재 ‘한국전쟁의 기원1’밖에 구해지지 않아 나는 와다 하루키의 ‘한국전쟁’ (창작과 비평사 펴냄)을 리뷰하기로 선택했다.

꿩 대신 닭이지만, 득도 없지 않다. 두 책은 사실 어슷비슷하다. 와다의 이 책은 머리말에서 밝힌 대로 커밍스 책에 보내는 응답으로 쓰여졌다. 커밍스의 그늘에 있는 이 책은 특유의 절충주의로 커밍스의 지론을 속화(俗化)된 형태로 반복했다. 이 때문에 커밍스의 특징과 한계를 함께 들여다보기에는 그런대로 괜찮다.

커밍스와 와다가 미국·일본의 좌파 학자로 분류된다는 점도 같다. 정확하게는 신좌파 학자다. 커밍스의 경우 시대의 아들이어서 한국의 386인, 전형적인 68혁명 세대이며, 와다도 60년 안보세대 출신이다. 우선 커밍스, 67년 평화봉사단 일원으로 한국에 왔던 그는 반전·민권운동 세대라서 신좌파 역사학자로도 불린다.

수정주의 혹은 신좌파 역사학은 냉전의 기원을 보는 방식이 사뭇 다르다. 2차 대전 종식 이후 전개된 냉전의 책임을 스탈린의 소련에 있다고 보는 게 주류의 학설이었는데, 60년대 말 이후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었다. 베트남전 반대, 민권운동의 흐름을 타고 주류학설을 수정·반박하면서 등장한 이 학설은 제국주의 미국의 책임을 가혹하게 따져 묻기 시작했다.

전후질서 재편에서 미국은 국가와 자본가계급의 이익을 극대화하려 했고, 그게 냉전을 낳은 동기라는 식이다. 그런 관점을 한국전쟁을 통해 치밀하게(커밍스의 문장과 스타일 모두가 그렇다) 검증해보고 대입시킨 게 ‘한국전쟁의 기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본 한국전쟁의 기원은 굳이 안 읽어봐도 비디오다.

전쟁은 스탈린이 하수인 김일성을 통해 음모를 꾸민 게 결코 아니라는 주장이다. 그럼 뭔가? 미국의 구조적 책임이 크고 결정적이다. 남침은 김일성이 했는지 모르지만, 그걸 자극한 것은 미국이다. 이른바 전쟁 유도론이다. 남침·북침이냐를 따지는 것 자체가 커밍스라는 삐딱이 학자가 볼 때는 의미없거나 난센스다.

이승만의 단정수립과 이후 거듭되는 반혁명의 음모에 열 받은 김일성이 탱크로 밀고 내려온 게 뭐가 나쁘냐는 식이다. 북한에 대한 한없는 애정과 별도로 ‘나쁜 나라’ 미국과, 극동의 하수인 한국에 대한 지독한 혐오가 너무도 대조적이다. 이 지점에서 와다 하루키가 바통을 이어받는다. 그 역시 커밍스의 시각에 백 번 천 번 공감한다. 그러나 차이가 나는 것은 전쟁의 기원 문제다.

커밍스는 “누가 시작했느냐를 묻는 것 자체가 잘못된 문제제기”라고 못 박으며 북한에 면죄부를 준데 비해(참으로 지독한 구조주의자의 시선이다! 국내에서는 그걸 오해해서 커밍스가 북침론을 펼친 사람으로까지 판단하지만, 그건 잘못이 분명하다), 와다는 따질 건 따져야 한다는 쪽이다.

둘 사이의 차이를 이 책 번역자 서동만은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그는(와다는) 한국전쟁을, 소련과 중국의 지원 하에 북한의 계획된 선제공격으로 개시된 내전이 국제전 즉 중미전으로 확대된 것으로 본다.”(416쪽) 내가 보기에는 그게 그거요, 오십보백보다. 커밍스·와다 모두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중요한 것은 해방 이후 남과 북 사이의 내전적 성격에 대한 구조적 이해다.

이해가 되시는가? 하지만 이런 수정주의적 시선이라는 게 얼마나 이질적이고 유별난 것인지는 다음 주 등장할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한국1950-전쟁과 평화’의 저자 박명림의 시각과 비교해 봐야 드러난다. 박명림이 볼 때 한국전쟁은 명백히 북한 김일성이 저지른 침략전쟁이다. 그걸 지적하는 대신 분단 구조가 전쟁을 낳았던 원인(遠因)이라는 커밍스·와다 주장은 전쟁 결정론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맞다. 사실 모든 분단국가가 반드시 전쟁을 치르지는 않는다. 와다의 책 ‘한국전쟁’을 읽다보면 때론 웃음이 나온다. 사실과 의견을 뒤섞는 교묘한 방식 때문이다. 게다가 의견은 놀랍도록 취약하다. 다음 문장을 보라. 커밍스의 시선에다가 와다가 수집한 팩트가 엉성하게 조합된 방식이다. 한국전쟁이 내전인지, 침략전쟁인지 구분이 안 가게, 희뿌옇게 서술했다는 점도 지적돼야 한다.

“한국전쟁은 단순히 두 개의 인접국가 간의 전쟁이 아니라, 한 민족 내부의 내전이고 불가피한 비극이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에 실제로 전쟁이 시작될 때 어느 쪽이 충분한 준비를 갖추었는가 하면, 그것은 파죽의 진격을 한 북한 측이었다. 전쟁의 발단에 남한 측에서 국지적인 선제공격이 있었는지 어떤지에 관계없이 북한이 전면 진공(進攻) 상태에 있었고, 그와 같은 결단을 내리고 있었다는 것도 분명하다.”(21쪽)

커밍스와 와다의 시각은 자세히 보면 다르다. 그래서 와다는 전쟁 유도설에도 이의를 제기한다. 그리고 수정주의 자체가 이미 퇴락했다. ‘한국전쟁의 기원 2’가 나오기 직전 현실사회주의는 몰락했는데, 이후 현대사 자료가 대거 공개됐다. 그 결과 한반도 분단은 소련 책임이 컸음이 드러났다.

1946년 6월 소위 정읍 발언을 했던 이승만 이상으로 김일성은 북한 땅을 민족해방 기지로 만들었다. 지금 변화된 상황에서 커밍스의 책은 ‘한계를 노정한 책’에 불과하다. 세월의 힘 앞에 무너진 책, 그럼에도 파멸적 영향을 주는 유령 같은 책, 그게 ‘한국전쟁의 기원’임을 와다의 책 ‘한국전쟁’이 새삼 보여준다.

[필자는 문화평론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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