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리경영으로 솟아날 구멍 찾다
분리경영으로 솟아날 구멍 찾다
2009년 6월 24일, 베트남 출장에서 돌아온 박삼구 금호그룹 명예회장의 얼굴은 어두웠다. ‘뭔가’ 결단을 내린 듯한 인상이었다. 다음날 대우건설 서종욱 사장을 만나 속내를 털어놨다. “대우건설을 포기해야 할 것 같다.”
박 회장의 미간을 찌푸리게 한 뭔가는 대우건설이었고, 결단은 포기였다. 금호그룹의 대우건설 포기 소식은 6월 28일 공식 전파를 탔다.
숱한 유동성 위기설에도 ‘대우건설 재매각은 없다’며 손사래를 쳤던 박 회장이었지만 완전히 기운 대세를 되돌릴 순 없었다. ‘돈 없는’ M&A(인수합병)가 부른 화(禍)다.
2006년 금호는 대우건설을 인수하기 위해 6조4000억원을 쏟아 부었다. 자기자본은 3조원, 나머지 3조4000억원은 미래에셋·팬지아데카·디케이에이치 등 17개 FI(재무적 투자자)에게 빌렸다. 더 많은 투자를 받기 위해 풋백옵션까지 체결했다. 이게 금호 위기의 단초가 된 것이다.
금호, 형제·채권단 분리경영 중박 회장이 대우건설 포기를 선언한 지 1년이 됐다. 그간 금호그룹은 산산이 쪼개졌다. 올 2월 채권단과 금호그룹이 체결한 MOU(양해각서)에 따라 ‘세 쪽’으로 분리됐다. 지주회사 격인 금호석유화학은 박찬구 전 금호아시아나그룹 화학부문 회장 부자와 고(故) 박정구 회장의 장남 철완씨가 맡고 있다.
금호타이어는 박삼구 명예회장이 경영한다. 금호산업, 아시아나항공 등 일부 계열사는 채권단이 관리한다. 형제와 채권단의 분리경영…. 금호의 현주소다. 하지만 분리경영은 실보다 득이 많다. 금호는 분리경영을 통해 솟아날 구멍을 찾았다. 무엇보다 주요 계열사가 채권단 통제를 받으면서 신용위험이 그룹 전체로 옮겨 붙을 가능성이 줄었다.
계열사가 그룹 위험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다. KTB투자증권 김인석(시장신용팀) 이사는 “금호가 정상화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며 “주요 계열사 중 일부는 조만간 신규 투자를 유치할 수 있을 전망”이라고 했다.
익명을 원한 채권단 관계자도 “기관투자가들은 그간 금호를 투자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며 “하지만 주요 계열사의 실적이 개선됨에 따라 ‘이제는 펀딩해도 괜찮다’는 기류가 흐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럼 금호 계열사의 경영성적표는 어떨까. 진통을 겪던 대우건설 재매각은 일단 산업은행 단독 인수로 가닥이 잡혔다.
산업은행은 대우건설 발행주식의 50%+1주인 1억6285만 주가량을 매입한다. 주당 가격은 1만8000원으로 총 매입가격은 2조9300억원에 달할 전망이다. 이를 위해 산은은 3조~4조원대 펀드를 조성할 방침이다. 산업은행 관계자는 “6월 말이면 산은 PEF(사모투자펀드)를 통한 대우건설 인수 방향과 내용이 결정될 것”이라며 “늦어도 9월 초까진 인수작업이 마무리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금호석유화학은 합성고무를 포함한 전 사업 부문의 실적 개선이 뚜렷하다. 이 회사의 올 1분기 매출은 8865억원으로 전년 동기비 1.5배로 커졌다. 대우증권 이응주 애널리스트는 “금호석유의 영업이익은 올 3분기 1000억원을 돌파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1분기 영업이익은 650억원이었다. 주가도 상승곡선을 그린다.
동양종합금융증권 황규원 애널리스트는 “계열사 부담이 완화되는 단계에 접어든 금호석유의 목표주가를 7만5000원으로 상향 조정했다”고 말했다. 이 회사의 주가는 5만3600원(6월 17일 현재)이다. 워크아웃에 돌입한 금호타이어도 재기의 날개를 편다. 금호타이어는 올 1분기 전년 동기비 18% 증가한 5864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매출은 많이 증가하지 않았지만 영업이익은 같은 기간 -593억원에서 213억원으로 커졌다. 당기순이익도 플러스로 돌아섰다. 경영개선을 위한 확약서를 채권단에 제출한 아시아나항공의 실적 역시 크게 성장했다. 올 1분기 전년 동기비 27% 늘어난 1조1758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NH투자증권 지현석 애널리스트는 “국제선 여객 수요 증가에 따른 항공화물 증대 등에 힘입어 실적 개선이 예상된다”며 “목표주가는 1만500원”이라고 말했다. 아시아나항공의 주가 8970원(6월 17일 현재)보다 17% 더 오를 것이라는 예상이다. 대한통운은 차입금 감소가 눈에 띈다. 올 1분기 순차입금은 2584억원. 지난해 말에 비해 1446억원 줄었다. 금호렌터카 매각대금이 유입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금호그룹은 지난해 말 KT-MBK컨소시엄에 대한통운이 보유한 금호렌터카 지분 100%를 3000억원에 매각했다. 이런 실적 개선은 금호 계열사의 신용회복으로 이어진다. 한 채권평가기관에서 조사한 금호석유 회사채 금리(3개월물)는 지난해 말 6.55%에서 올 6월 16일 6.27%로 0.28%포인트 떨어졌다. 회사채 1년물, 3년물의 금리도 같은 기간 0.56%포인트(9.23%→8.58%), 0.51%포인트(12.91%→12.40%)로 크게 낮아졌다. 금호석유의 신용이 개선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금호 오너 일가, 경영권 찾을까
BBB- 이상은 투자등급이다. 대한통운의 회사채 등급은 A0으로 올랐다. KTB투자증권 김인석 이사는 “금호 주요 계열사의 구조조정이 진행됨에 따라 금호그룹을 둘러싼 불확실성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며 “신용등급이 개선된 것은 이런 이유”라고 말했다.
주목할 점은 뿔뿔이 흩어진 금호그룹이 정상화하면 누구에게 돌아가느냐다. 일단 금호산업, 금호타이어, 아시아나항공의 경영권은 금호 오너 일가가 찾을 수 있다.
채권단이 이들에게 우선매수청구권을 줬기 때문이다. 민유성 산업은행장은 “금호아시아나그룹에 우선매수청구권을 부여해 3년 정도 예상되는 워크아웃이 끝난 뒤에는 금호산업, 금호타이어의 주식을 되살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고 금호 오너 일가가 주요 계열사의 경영권을 무조건 되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매수청구권은 입찰가 중 최고가를 제시한 자에게 매수 기회를 먼저 주는 것이다.
금호그룹이 보란 듯이 재기해도 금호 오너 일가가 이를 다시 찾을 만한 자금을 확보하지 못하면 우선매수청구권은 그야말로 그림의 떡에 불과하다. 이 역시 돈 없는 M&A가 부른 화이자 승자의 저주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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