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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자보단 의학박사로 남고 싶다

경영자보단 의학박사로 남고 싶다

▎ 정재원 1917년생 1937년 성모병원 1946년 서울대병원 소아과 1960년 영국 런던대 소아과대학원 수료 미국 샌프란시스코 UC 메디컬센터 1973년 정·식품 대표이사 겸 회장 1984년 혜춘장학회 이사장 2000년 1월~ 정·식품 명예회장

▎ 정재원 1917년생 1937년 성모병원 1946년 서울대병원 소아과 1960년 영국 런던대 소아과대학원 수료 미국 샌프란시스코 UC 메디컬센터 1973년 정·식품 대표이사 겸 회장 1984년 혜춘장학회 이사장 2000년 1월~ 정·식품 명예회장

올해 나이 93세. 구순을 넘긴 경영자는 현재로선 그가 유일하다. 신격호(88) 롯데그룹 회장, 박승복(88) 샘표식품 회장보다 다섯 살 많다. 베지밀로 유명한 정·식품 정재원 명예회장 이야기다. 정 회장은 지난 10월 15일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10월 16~19일 워싱턴에서 열리는 국제 대두(大豆)심포지엄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가족은 물론 회사 관계자는 수차례 만류했다. 워낙 고령이기 때문에 건강이 나빠질 수 있다는 우려가 많았다.

정 회장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10시간이 훌쩍 넘는 장기 비행을 견디겠다며 짐을 꾸렸다. 초청 받은 것도 아니다. 스스로 가겠다고 했다. 심포지엄 일정도 빡빡하다. 모든 프로그램에 참석함은 물론 정·식품의 오랜 연구 결과도 포스터 발표한다. 포스터 발표는 구두 발표와 다르다. 특정 장소에 A4용지 크기의 논문 자료를 붙이고 대기하다 관심을 가진 사람이 질문하면 답하는 방식이다. 언제 질문할지 모르는 탓에 논문 발표자는 하루 종일 기다리기 일쑤다. 젊은이도 감당하기 힘든 고된 일이다. 정 회장은 “걱정하지 마라, 건강에 문제없다”고 덤덤하게 말했다. 영어 공부 등 준비도 철저하게 했다며 환하게 웃었다. 그가 주위의 우려를 고집스럽게 뿌리친 이유다. 아버지의 포스터 발표를 반대한 큰딸 정조숙씨는 “원래 정씨 고집이 세다”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꼭 고집 때문에 고행을 자처했다고 보긴 어렵다. 정 회장이 국제 대두심포지엄에 굳이 참가를 결정한 덴 남다른 이유가 있다. 사명감 때문이다. 그는 성인의 유당불내증(소장의 유당분해효소 결핍 때문에 설사·복통이 나타나는 병)과 콩의 우월한 효과에 대해 널리 알리고 싶어한다. 인류 건강을 위해서다. 그게 자신의 마지막 소명이라고 생각한다. 정·식품을 창업한 이유도 같다. 정·식품의 창업이념은 ‘인류 건강 문화에 이 몸 바치고저’다. 그는 “돈 벌기 위해 회사를 차린 게 아니다”며 자신을 ‘피동형 경영인’이라고 평가했다. 소비자가 원하는 대로 경영을 한 게 지금까지 이어졌다는 얘기다.

▎정소아과 앞에서 포즈를 잡은 정재원 명예회장. 올 6월 이곳에 정·식품 신사옥이 들어섰다.

▎정소아과 앞에서 포즈를 잡은 정재원 명예회장. 올 6월 이곳에 정·식품 신사옥이 들어섰다.

겸손한 말도, 틀린 말도 아니다. 정 회장은 환자를 위해 베지밀을 개발했고, 소비자를 위해 정·식품의 규모를 늘렸다. 정 회장의 인생사를 들여다보면 그렇다. 때는 일제강점기인 1937년. 조선총독부 의사검정고시에 최연소로 합격한 정 회장(당시 19세). 들뜬 마음으로 서울 성모병원에 첫 출근했다. 하얀 가운이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정 회장은 의사로 첫발을 뗀 날을 다른 이유에서 잊지 못한다. 그날 오후.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왔다는 한 여인이 생후 1개월 된 아기를 입원시켜달라고 떼를 쓰고 있었다. “딸 다섯 낳고 간신히 얻은 아들입니다. 이 아이가 없으면 저는 살지 못합니다. 제발 고쳐주십시오.” 정 회장은 최선을 다했다. 젖, 미음, 야채 죽 등 먹이지 않은 게 없다. 그의 이런 노력에 여인은 큰절로 답했다.

그런데 열흘이 채 지나지 않아 아기는 세상을 달리했다. 정 회장은 큰 충격을 받았다. 평탄할 것 같았던 그의 인생은 변곡점을 맞았다. “왜 죽었을까, 병명은 또 뭘까.” 그는 그날 이후 유아가 설사를 하고, 복통을 일으키는 이유를 찾기 위해 골몰했다. 무려 20여 년 계속 찾았다. 하지만 치료방법은커녕 병명조차 알 수 없었다. 유학을 결심했다. 불혹(不惑)을 넘긴 1960년의 일이다. 자비를 털어 영국 런던대 소아과대학원에 입학했다. 그로부터 3년6개월. 진전은 없었다. 영국에서도 이 병은 불치병으로 불렸다. 이번엔 미 샌프란시스코 UC메디컬센터에 갔다. 역시 헛수고. 정 회장은 낙담했다. 그러다 1964년 발간된 『넬슨소아과 텍스트북 8판』에 실린 유당불내증이라는 병명을 우연하게 발견했다. 책에 적힌 병의 내용은 이랬다. “… 체내에 유당을 분해하는 효소 세포가 선천적으로 결핍된 채 태어난 아기는 모유 또는 우유에 함유된 유당(젖당)을 정상적으로 소화하지 못한다. 이런 유당이 대장에 도달하면 세균에 의해 발효돼 유독물질을 형성한다. 결국 난치성 설사가 발병해 죽음에 이르게 된다.…”
▎정재원 명예회장의 유학시절 모습.

▎정재원 명예회장의 유학시절 모습.



“나는 피동형 경영인이었다”정 회장은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멍해졌다. 아기의 생명줄인 ‘엄마 젖’이 치명적일 때가 있단 말인가. 신이 내린 가혹한 형벌 아니던가. 유당불내증을 해결할 치료법을 찾아야 했다. 그는 목숨을 건 듯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그때 발견한 게 콩의 효능이다. 유아를 위한 3대 필수 영양소(단백질 40%·탄수화물 35%·지방 20%)가 콩에 골고루 함유돼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게다가 유당 성분도 없었다. 어릴 적 어머님이 끓여줬던 콩국이 뇌리를 스쳤다. 그는 무릎을 탁 치면서 유레카를 외쳤다. “그래 콩국이야!”

정 회장은 곧장 귀국했다. 1965년 정소아과를 차렸다. 그냥 소아과가 아니었다. 지하실에 동물실험실과 생화학 영양소 분석 실험실을 설치했다. 아르바이트 학생까지 뒀다. 낮엔 진료를, 밤엔 지하실에서 연구를 거듭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정조숙씨는 이렇게 회상했다. “제 동생들은 아버지와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었어요. 그래서 의사는 원래 바쁜 직업인 줄 알았죠. 우리 6남매 중 의사가 된 사람이 아무도 없는 이유죠.(웃음)”

그로부터 2년 만인 1967년. 정 회장은 의미 있는 실험 결과를 얻었다. 콩국, 지금으로 말하면 두유를 먹인 그룹에서 좋은 성장 결과가 나온 것이다. 정 회장이 개발한 ‘영양성 두유 제조방법’은 국내 특허를 받았고, 영양식품 허가를 취득했다. 이게 지금의 베지밀이다. 베지밀은 야채를 뜻하는 베지터블 (vegetable)과 밀크(milk)의 합성어다. 정 회장이 직접 지었다. “우유를 대체할 수 있는 뛰어난 제품이라고 생각했어요. 동물성보단 식물성이라는 걸 강조하고 싶어 야채를 넣어 베지밀이라고 했죠.”

▎정재원 명예회장과 정소아과 직원들.

▎정재원 명예회장과 정소아과 직원들.

베지밀을 만들었지만 지금처럼 대량생산할 생각은 없었다. 부인 김금엽(2004년 작고)씨와 맷돌로 콩을 갈아 소화불량에 시달리는 유아에게 먹였다. 하루 40~50병 팔았다. 가내수공업 수준이었다. 입소문이 퍼지면서 도저히 수요를 따라갈 수 없었다. 온 가족이 매달려 하루 수천 병까지 생산했지만 그 이상은 무리였다. 정 회장은 “정소아과 앞에 줄 선 환자 중 많은 사람이 빈손으로 돌아가는 걸 보면서 대량생산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정 회장은 1973년 정·식품을 창업함과 동시에 신갈공장을 건설했다. 하루 베지밀 20만 병을 생산할 수 있는 규모였다. 사재를 툴툴 털었다. 사채 45억원까지 빌렸다. 그것도 월 4푼에 말이다. 한 달에 1억원이 넘는 이자를 갚아야 했다. 덜컥 겁이 났지만 정 회장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수 없었다. “유당불내증 때문에 고생하는 유아를 줄일 수 있다면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무서웠죠. 이자를 갚지 못하면 파산이었으니까요. 여러 사람의 후원이 큰 도움을 줬어요. 많게는 1억원을 도와준 사람도 있었으니까요.” 1984년 하루 250만 병을 생산할 수 있는 청주공장을 건설하고, 2001년 하루 60만 병 생산이 가능한 담양공장을 인수한 것도 같은 이유였다. 베지밀을 찾는 소비자가 늘면 그는 생산공장 건립으로 화답했다. 정 회장이 자신을 ‘피동형 경영자’라고 평가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정 회장의 고객 사랑을 엿볼 수 있는 사례는 또 있다. 정·식품은 명실상부한 국내 두유시장의 1위 업체다. 시장점유율은 45%에 달한다(2010년 리서치 전문기관 닐슨 조사). 한국능률협회에서 선정하는 한국산업 브랜드파워 두유부문에서 베지밀은 2003년 이후 1위를 놓치지 않고 있다. 벌써 8년째 일등이다. 그럼에도 정·식품은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을 마다하지 않는다. 일동후디스·남양유업·서울우유 등에 고품질 두유를 공급한다. 효율적인 OEM을 위해 2007년 자회사 ‘자연과 사람들’을 분리했다. 정 회장은 개의치 않았다. 소비자가 질 좋은 두유를 먹으면 그만이었다. 주로 2~3위 업체가 사용하는 ‘PL(자체 브랜드)전략’도 스스로 깼다. 1위 브랜드는 통상 PL을 하지 않는다. 자사 브랜드를 지키기 위한 전략이다. 그러나 정·식품은 이마트·홈플러스 등 대형 마트의 PL제품을 납품한다. 사내 반발이 없었을 리 만무하다. 뭐가 아쉬워서 OEM과 PL을 하느냐는 반대 목소리가 높았던 것이다. 정 회장은 언제나 이렇게 설득했다. “정·식품은 국민 건강을 책임지는 식품기업이다. 소비자 건강을 최우선으로 하고, 이를 위해선 때론 사적 욕심도 접을 줄 알아야 한다.”

이 대목에선 따져봐야 할 게 있다. 베지밀을 원하는 소비자가 괜히 늘어났느냐는 거다. 정 회장의 말대로 ‘피동적’으로 경영을 했다면 급변하는 소비자의 욕구에 대응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더구나 정·식품의 베지밀이 성공하자 두유 생산업체가 꼬리를 물고 등장했다. 국내 두유시장 규모는 3500억원에 이른다. 두유 생산업체는 30여 곳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식품이 30년 넘게 두유시장 1위를 지킨 비결은 따로 있지 않을까.



R&D 메카 중앙연구소 베지밀 신화 이끌어무엇보다 소비자의 욕구를 제대로 간파한 게 한몫했다. 정·식품은 현재 베지밀, 프리미엄 음료·주스 썬몬드, 의료용 특수식품 그린비아, 전통식품 우리안 등 4개 브랜드 총 68종을 생산한다. 연령별 소비자의 특성을 연구해 타깃층을 나눈 것이다. 다이어트용 제품 베지밀 화이버 3000, 팥을 함유한 레드빈 베지밀, 웰빙 음료 녹차 베지밀 프레쉬 등 신제품도 기존 고객층은 물론 신세대의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다. 소비자의 변화된 식생활과 트렌드에 발 빠르게 대응한 게 1위 브랜드를 유지하는 원동력이라는 얘기다.

끊임없는 R&D(연구개발)도 정·식품의 성장을 이끌었다. 정 회장은 1985년 정·식품의 R&D 메카인 중앙연구소를 설립했다. 박사급 인력을 비롯한 인재 30~40명을 영입했다. 중앙연구소의 실적은 놀랍다. 이 연구소에서 개발한 베지밀C는 한국(1996)은 물론 미국·호주(1995)에서 특허를 받았다. 대두배아와 껍질에 관한 특허(2007)도 가지고 있다.

정·식품의 2009년 매출은 1665억원이다. 10년 전인 2001년보다 41% 커졌다. 한 해 평균 4%가량 성장한 셈이다. 생산량도 크게 늘었다. 1990~99년 베지밀 생산량은 36억1513만 병(200mL 기준). 2000~10년(9월 현재) 생산량은 이보다 30% 많은 수준이다. 지금까지 생산된 베지밀은 109억 병(200mL 기준)에 이른다. 소비자 욕구를 외면하고, R&D 투자에 게을리했다면 성장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정 회장은 2000년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렇다고 완전히 떠난 건 아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회사에 들러 큰 그림을 체크한다. 경영은 지난 6월 25일 정·식품의 수장에 오른 둘째 아들 정성수(60) 회장이 맡고 있다(※정 회장의 큰아들은 10여 년 전 투병 끝에 사망했다). 정·식품의 창업멤버인 정성수 회장은 1998년부터 부회장을 역임했다. 대형 투자 등 각종 정책결정에 관여해 왔다. 청주공장·담양공장의 대지를 마련하고 설계도 했다.

정 회장은 아들 정성수 회장의 경영능력을 높게 평가한다. “추진력과 관리능력 모두 나보다 낫다”며 자랑하고 싶은 게 많다고 말했다. 인터뷰를 준비할 때 ‘정성수 회장에 대한 평가는 묻지 말아달라’는 언질을 받은 상태. 그러나 운을 먼저 뗀 이는 정 회장이었다. 아들 정성수 회장의 능력을 인정한다는 아버지의 메시지로 들렸다. 정 회장은 “아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는 말도 했다. 정성수 회장은 지난 6월 정·식품의 본사를 창업지(地)인 중구 회현동으로 이전했다. 지상 7층 규모의 신사옥은 정소아과가 있던 자리로 정 회장이 두유를 개발한 곳이다. 정 회장의 ‘고맙다’는 말은 정·식품 본산을 되살려준 아들에게 보내는 화답이었다. 그러면서도 냉철한 당부를 잊지 않았다. “회사의 그림을 그릴 때 여러 사람의 진언을 들어야 하는데 조금 고집이 센 것 같아 아쉽다”고 말했다. 부전자전(父傳子傳) 아닐까. “신갈공장을 짓겠다며 사채 45억원을 빌렸을 때 사모님과 가족의 동의를 구하셨습니까”라고 묻자 정 회장은 멋쩍은 미소만 지을 뿐 답을 하지 못했다. 좌중은 웃음바다가 됐다. 경영은 아들에게 물려줬지만 그는 오늘도 아이디어 구상에 열중한다. 신제품 개발은 여전히 그의 몫이다. 중앙연구소 직원에게 아이디어를 적은 메모를 건네는 건 중요한 일과 중 하나다. ‘이런 제품은 어떻겠느냐’ ‘이런 영양소에 대해 연구하면 좋겠다’는 제안을 던지고 연구원과 토론한다. 정 회장이 새벽 1시까지 영양학 책을 탐독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인터뷰가 끝난 후 정 회장은 서울 종로구 평창동 자택 이곳저곳을 큰딸과 함께 걸었다. 조그만 온실에도 들렀다. 지치지 않은 모습이었다. 회사 관계자들에겐 “국제 대두심포지엄 일정 잘 확인하세요”라고 거듭 당부했다. 궁금했다. 그는 경영인으로 남길 바랄까, 의사로 기억되길 원할까. 답은 시원했다. “경영인보단 인류 건강에 일조한 의학박사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정 회장의 명함을 봤다. 정·식품이라는 사명 아래쪽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Dr.CHUNG’S FOOD.’ 그의 천직은 의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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