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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통문화를 미국 미술관에 이식하다

한국 전통문화를 미국 미술관에 이식하다

샌프란시코의 아시아미술관(Asian Art Museum)은 미국 내 유일한 아시아 전문 미술관이다. 1989년 처음으로 한국관을 개설했으며 현재 800여 점이 넘는 한국 관련 작품을 소장했다. 이 미술관의 한국관 큐레이터로 지난 7월 김현정(41) 씨가 부임했다. 한국의 전통 예술을 미국에 독특하게 소개해 온 방식으로 주목받은 덕분이다.

2006년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LACMA)의 큐레이터로 일하던 그녀에게 한국관 재개관의 임무가 주어졌다. LACMA는 100년의 역사를 가진 미술관으로 미국 서부 최대 규모의 컬렉션을 자랑한다. 하지만 LACMA에는 한국의 역사와 미술을 대표할 만한 소장품이 부족했다. 그녀는 578.5㎡(175평) 넓이의 한국관 전시장 중심에 국보 7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전시하겠다는 구상을 떠올렸다. 주변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국립중앙박물관의 협조를 얻어 그 일을 성사시켰다.

전시장 분위기도 법당에서 예불하는 분위기를 재현해 호평을 받았다. “반가사유상을 에워싸는 낮은 턱을 만들어 주변을 한 바퀴 돌면서 여러 각도에서 불상을 감상하도록 관람객의 동선을 설계했다”고 그녀가 말했다. 이 프로젝트는 전통유물 전시회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평가도 받았다. “텍스트 위주의 전시설명문을 과감히 없애고 영상으로 전시 주제와 주요 작품의 정보를 전달했다”는 측면에서도 높은 평가가 주어졌다.

아시아미술관의 제이 슈 관장은 뉴스위크 한국판과의 e-메일 인터뷰에서 “(김씨가) 깊은 학문적 배경과 풍부한 큐레이팅 경험을 바탕으로 아시아 미술과 문화의 미감과 독창성을 부각시킬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한국미술 관련 프로그램도 매우 혁신적이었다”고 덧붙였다. 아시아 미술관이 김씨를 왜 한국관 큐레이터로 선발했는지를 자연스레 설명해주는 이야기다.

한국의 전통예술은 국제 무대에서 일본과 중국의 전통예술에 밀려나기 일쑤였다. 한국 문화가 중국과 일본의 문화와 별 차이를 못 느낀다고 말하는 외국인도 많다. “외국 관람객들은 전시장에서 흥미를 느끼지 못하면 결국 발길이 끊긴다”고 김씨는 말했다. 턱없이 부족한 컬렉션도 한국미술을 변두리화시키고 외국 관람객들의 무관심을 낳는다는 설명이다. “그들의 발길을 붙잡고 한국 전통예술에 시선을 고정시키려면 무엇보다도 전시의 ‘혁신’이 필요하다”고 그가 힘줘 말했다. 관람객이 친밀감을 느끼게 하는 전시회를 많이 열어야 한다는 얘기다. 김씨는 “전통유물의 부담감과 낯선 분위기를 덜어주려면 전통적인 교과서 방식의 전시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녀의 생각은 명쾌하다. “외국 관람객들에게 친근함을 주려면 전통예술에 현대미술적인 요소를 과감하게 도입해야 합니다.”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이자 작가인 프레드릭 프랑크는 “그림은 끊임없이 세계를 재발견하는 작업”이라고 말했다. 큐레이터는 화가와 그들의 작품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내는 일을 한다. 김씨의 포부도 마찬가지다. 아시아미술관에서 “한국의 유물과 한국의 현대 예술작품의 조합을 넘어서서 엘스워드 켈리(미국의 추상화가·조각가)나 데이비드 스미스(조각가) 등 미국의 현대미술과 어우러진 전시를 열고 싶다”고 김씨는 말했다. “이들 전시 작품에서 새롭고 흥미로운 얘깃거리를 찾아내 관람객들에게 줘야 한다”고 그녀는 덧붙였다. 김씨는 그렇게 “한국 미술의 해외 전시문화를 획기적으로 바꾸겠다”는 생각이다.

아시아미술관에는 한국 유물이 많다. 특히 고 에이버리 브런디지 전 IOC위원장이 기증한 ‘도자기’ 작품들이 눈에 띄며 고려청자 특유의 비취색을 자랑하는 ‘12세기 연판형 뚜껑의 청자주전자’와 조선백자의 백미라 할 ‘달항아리’가 대표적이다. 그 밖에도 ‘책거리’ 병풍과 ‘아미타구존 고려불화’도 손꼽히는 수작이다. 한국의 국보급 유물을 다수 보유한 아시아미술관에서 김씨는 소장품을 연구·관리하고 전시와 출판, 사회교육 프로그램 기획 등을 모두 담당한다.

김씨는 “초등학교 시절 가족을 따라 파리에서 머물렀던 2년이 미술적인 안목을 키우는 자양분이 됐다”고 말했다. 유독 미술을 좋아한 어머니를 따라 파리의 미술관과 박물관을 무시로 드나들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루브르박물관의 어린이 프로그램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당시를 돌이켰다.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나도 모르게 외국인의 눈에 한국 미술과 한국 문화는 어떻게 비칠까 궁금증이 생기더군요.” 그런 의구심을 풀고 싶어서 서울대 미대에서 한국미술사를 공부했다. 국내에서 석사과정까지 마친 뒤 1998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캘리포니아 주립대(샌타바버라)에서 미술사 석사과정을 공부하던 중 그녀에게 미국 미술관과의 인연이 맺어졌다. 유급 학예인턴 제도에 선발돼 샌타바버라 미술관에서 2년간 일하게 된 덕분이다. “미술작품과 유물을 어떻게 다루고 소장하며 어떤 방식으로 전시해야 하는지 몸으로 터득한 값진 시간이었다”고 김씨는 말했다. 유학 후 그녀는 한동안 모교에서 동양미술사를 가르치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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