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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가 한국 영화 스타일에 푹 빠졌어요'

'이탈리아가 한국 영화 스타일에 푹 빠졌어요'

이탈리아에선 매년 많은 영화제가 열린다. 그 가운데는 피렌체의 ‘한국 영화제 (Korea Film Festival- Festival of Korea Cinema in Italy :KFF)도 있다. 지난해 이탈리아 전역에서 9000여 명의 영화팬이 몰렸다. 정작 한국인도 잘 모르는 이 영화제의 집행 위원장은 리카르도 젤리(Riccardo Gelli)다. 요즘에는 해외에서 열리는 한국 영화제가 꽤 있지만 한국인이 아닌 현지인이 직접 영화제를 주관하는 사례는 드물다. 이 영화제를 통해 이탈리아에 한국 인지도를 높였다는 공로를 인정 받아 그는 지난해 10월 부산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로부터 한국영화 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지난 10월 초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차 한국을 찾은 그를 직접 만났다.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는 리카르도가 한국 영화에 푹 빠져 사는 이유는 뭘까? 한국 영화와의 만남은 평범한 계기였다. 우연히 집에서 TV를 보다가 한국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배용균 감독)을 보게 됐다. 서툰 한국어 발음으로 영화 제목을 또박또박 말한 리카르도는 “평소 영화의 스토리텔링보다는 전반적인 스타일과 영상을 봅니다. 그런데 그 영화 속의 배경과 스타일이 너무나 좋았다”고 말했다. 그의 시선을 단박에 사로잡은 매력은 무엇보다도 “한국 영화 특유의 스타일”이었다. 그는 “모든 한국 영화에는 감독 고유의 스타일이 드러난다”며 “이젠 영화만 보아도 그것이 누구 작품인지 가늠해볼 정도다”고 말했다.

한국 영화의 스타일에 취한 리카르도는 그 뒤로 한국 영화감독과 배우들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한국 배우들은 연기 교육이 잘돼 있는 듯하다”고 그가 말했다. 최근 영화에서는 송강호와 전도연의 연기를 가장 좋아한다. 특히 송강호의 목소리와 얼굴 표정에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매 장면마다 표정 연출이 남달라요. 웃긴 표정도 잘하는데 스릴러에도 어울리고, 장르를 불문하고 연기력을 발휘하는 최고의 배우입니다.” 한국 영화감독 중에서 그는 ‘하녀’의 임상수 감독과 남다른 친분을 과시했다. 얼마 전 임 감독을 만난 자리에서도 “어떻게 하녀와 같은 작품을 만들어냈는지 감탄했다”고 말했단다. ‘나는 악마다’의 김지운 감독과 ‘빈 집’의 김기덕 감독도 연이어 호평했다.

그가 피렌체에서 처음으로 한국 영화제의 기반을 닦은 때는 2002년 한·일 월드컵 기간 중이었다. 당시 로마에 있는 한국 대사관과 협력해 피렌체에서 ‘한국 문화 축제’를 열었다. 처음부터 영화제의 형식은 아니었고 한국 문화를 소개하는 미술 전시회에 퍼포먼스를 곁들인 작은 행사였다. “한국 문화와 전통, 미술이 좋아서 시작한 행사였어요. 그때는 미처 영화를 보여줄 생각은 못했습니다.” 하지만 첫 행사를 끝낸 후에 참가자들로부터 “프로그램을 늘려 달라”는 주문이 쏟아졌다. 그렇게 해서 2003년에 KFF라는 이름을 달고 한국 영화제를 처음 열었다. “초기에는 15편 정도였지만 지금은 상영 영화가 32편에 이른다”고 그가 말했다. 지난 3월에 열린 피렌체 한국 영화제는 올해로 8회째를 맞았다.

영화제 관련 정보를 담은 두툼한 책자를 펼쳐 보이며 리카르도는 신명나게 설명을 이어 간다. “우리는 매년 한국 감독 중 한 명을 선정해 그의 회고전을 싣습니다.” 올해 한국 영화제의 주인공은 허진호 감독이다. 매년 쇼 케이스도 선보이는데 올해 주제는 공포영화였다. ‘학교 공포물’(School horror)을 만들어 온 박기호 감독이 영화제에 초청됐다. “스쿨 호러는 우리에게 굉장히 신선한 주제”라고 말하는 젤리의 눈빛에 호기심이 가득하다. 이번 축제의 개막작은 김용하 감독의 ‘국가대표’, 폐막작은 박찬욱 감독의 ‘박쥐’였다.

한국 영화에 보이는 현지 반응이 궁금했다. 그는 “파장(wave)을 일으키고 있다”고 말했다. “영화축제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굉장한 열정을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이처럼 흥미로운 영화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죠.” 그는 “한국 영화가 지루할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영화를 보고 난 뒤엔 금방 팬이 돼버린다”고 말했다.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한국 영화의 인기를 실감한다. “그들도 한국 영화 스타일에 푹 빠진 듯합니다. 일부는 인터넷에서 정보를 뒤졌는지 오히려 저보다 한국 영화를 더 잘 아는 친구들도 있더라고요.” 이번 인터뷰에 동행한 안드레아와 줄리아도 그 젊은이 중 한 사람이다.

안드레아는 “한국 영화는 다른 아시아 영화와 사뭇 다르다. 유럽 영화는 나라마다 별 차이가 없지만 한국 영화의 스타일은 ‘유일(the one)’하다”고 말했다. 이들의 한국 영화 상찬이 이어졌다. “한국 영화는 한 작품 안에서 모든 장르를 찾아볼 수 있어요. 처음에는 재미있을 줄 알았는데 극장을 나설 때는 울고 나올 때도 있어요.” 리카르도의 말에 안드레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지만 이탈리아와 한국은 네오리얼리즘 (Neorealism: 2차대전이 끝날 무렵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영화 운동)을 좋아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합니다.” 안드레아는 “한국 감독들은 영화 제작의 아이디어가 풍성한 듯하다”고 말했다. “이탈리아 감독들은 차기작을 준비하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하지만 한국 감독들은 영화 제작이 막 끝났는데 차기작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더군요.”

한국 영화제에 선보이는 영화를 선정하는 기준은 무엇보다도 대중성이다. 독립 영화의 경우는 리카르도가 직접 보고 영화제에 상영될 작품을 결정한다. 행사 기간 축제를 돕는 사람들은 30명 남짓이다. 인근의 로마, 피자, 피렌체 대학에서 영화 관련 전공자들을 중심으로 자원봉사자를 뽑는다. 최근에는 한국인 지원자도 생겼다. 리카르도는 영화제가 끝나면 그래픽 디자이너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벌써 내년도 영화제를 떠올리며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2011년 영화제에서는 상영작을 더 늘리고 싶어요. 영화제 시작과 말미에 한국 가수도 두 그룹 정도 초청할 생각입니다.” 올해는 ‘국가대표’ OST를 부른 러브 홀릭이 무대에 올랐다. 그 동안 한국 가수를 본 적이 없는 이탈리아 현지 언론의 취재 열기가 대단했다고 한다. 그는 “이 축제가 없으면 이탈리아 사람들은 한국 영화를 접할 기회가 그리 많지 않다”고 말했다. 그가 이 영화제에 큰 책임감을 느끼는 이유다. “우리 축제에서 한국 영화를 만나면 사람들이 한국에 좀 더 관심을 갖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축제에 왜 가느냐?’며 무관심하던 사람들도 나중에는 180도 반응이 달라지거든요.” 피렌체 한국 영화제가 이탈리아 내 한국의 인지도를 높이는 셈이다. 리카르도는 영화제 기간 중 이탈리아와 한국의 영화 관계자들이 만날 수 있는 기회도 마련하고자 한다. “이탈리아와 한국은 서로의 영화를 잘 모르잖아요. 양국 영화인들이 협력하면 더 좋은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요?”

인터뷰를 마치고 그와 한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서울극장을 찾았다. “한국을 20번째 방문했어요. 그러면 나도 거의 한국인이나 다름없지요?” 이렇게 너스레를 떠는 리카르도는 “한국 영화뿐만 아니라 어느새 한국 사람과 한국 음식에도 푹 빠졌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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