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없이 다가오는 확장형 심근증
소리 없이 다가오는 확장형 심근증
인테리어 사업을 했던 박지수(55)씨는 2년 전 고향인 경남 산청으로 내려가 가벼운 농사일로 소일한다. 농사일이라고 해야 집 앞 채소밭을 가꾸는 정도다. 그는 워낙 부지런하고 사교성이 좋아 불황 속에서도 사업체를 잘 꾸려왔지만 쉬 피곤해졌고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맥박이 빨라지면서 숨이 차올라 일을 지속하기 힘들었다. 처음에는 견딜 만했으나 차츰 증상이 심해졌다. 자다가 발작성 호흡곤란을 일으켜 병원에 실려 간 적도 있다. 박씨의 병명은 확장형 심근증. 5년 생존율은 54%, 10년 생존율은 36%에 불과한 병이다. 이 병은 돌연사의 가능성도 매우 큰 것으로 알려졌다. 박씨는 결국 지병에 손을 들고 사업을 정리해야만 했다.
5년 생존율 54%확장형 심근증은 심근 세포의 성질이 바뀌어 심실 벽이 얇게 펴지면서 심장 내부의 공간이 커지는 병이다. 그 결과 좌심실 벽이 늘어나 혈액을 제대로 송출하지 못하고 울형성 심부전을 일으키게 된다. 좌심실의 혈액을 송출하는 힘은 심장 벽이 얇아질수록 약해진다. 심근이 늘어난 정도가 심할수록 증상이 심각하다고 보면 된다.
대부분의 사람은 심근증의 증상이 나타난 다음에야 병원을 찾는다. 무증상 심근증은 진단하기 매우 힘들다. 무증상 심근증은 전체 환자의 약 14%다. 심근증의 증상이 없이 심장이 뛰거나 비정형적으로 가슴이 아픈 경우를 말한다.
의학의 발달로 무증상 확장형 심근증을 진단하는 확률은 점점 높아지고 있지만 어느 연령대에서 주로 발병하는지, 원인은 무엇인지 확실하지 않다. 김박내과의 김계영 원장은 임상 경험상 “소아 초기에 걸리는 빈도는 낮고, 사춘기에는 약간 증가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말한다. 그는 “심부전증 환자의 25%가 확장형 심근증이었고 심내막 조직검사를 받은 환자의 9%는 조직학적으로 확인된 심근염이 있으며 특발성 확장형 심근증이 동반된다”고 덧붙였다.
확장형 심근증 환자에게는 초기에 심부전의 증상에 맞춰 이뇨약을 주로 처방한다. 요즘에는 칼륨이 많이 빠져나가지 않고도 이뇨작용을 하는 약이 시판돼 이를 다른 심부전 치료약과 함께 사용하면 중증 심부전환자의 사망률을 크게 줄일 수 있다고 한다.
확장형 심근증은 심장 속에 혈전이 생길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혈액이 응고되지 않도록 하는 아스피린 등의 약제가 사용된다. 합병증으로 중증 부정맥이 나타나는 경우에는 항부정맥약을 투여하거나 자동전기제세동기를 심는 수술을 해야 한다.
내과 치료에도 반응하지 않는 중증인 경우에는 외과수술을 한다. 확대된 심장 일부를 절개해 심실을 축소함으로써 심 기능을 개선하는 좌실부분절개술이란 방법이 있다. 이 수술은 창시자인 R 바티스타 박사의 이름을 딴 ‘바티스타 수술’로 더 유명하다.
하지만 현재로서 가장 유효한 치료법은 심장이식밖에 없다. 일본은 우리보다 조금 이른 1997년에 뇌사장기이식법이 제정돼 심장이식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일본 역시 장기 제공자의 수가 크게 부족해 말기 확장형 심근증 환자를 이식치료로 구명하기란 매우 어려운 현실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세포이식이나 유전자를 이용한 심근재생치료 등 새로운 치료법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다.
지금까지 확장형 심근증은 장기이식 외에는 달리 치료법이 없는 병으로 인식됐다. 그러나 최근 일본에서 새로운 치료법으로 ‘면역흡착요법’이 등장해 환자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 이 치료법은 특수한 장치로 체내 혈액을 여과해 병의 원인을 제거하는 방법이다. 아직 몇몇 의료기관에서 유효성을 확인하는 임상연구가 시작된 단계지만 뇌사이식의료가 난항을 겪고 있는 상황이라서 기대가 크다.
면역흡착요법 효과에는 이견 많아게이오 대학 요시가와 쓰토무 교수는 “장기이식이 잘 진행되지 않는 현실에서는 뭔가 구제책이 필요하다”며 새로운 면역흡착요법의 임상연구를 시작한 배경을 설명한다.
하지만 게이오 대학 요시가와 교수는 “최근 들어 확장형 심근증의 원인이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고 말한다. 지금으로서는 유전적 요인과 바이러스 감염이나 면역계의 이상 등이 복잡하게 얽혀 발병하는 것으로 추정한다. 류머티즘이나 알레르기 등 자기면역질환과 마찬가지로 몸을 방어해야 할 면역계가 엉뚱하게 자신의 심장을 공격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2003년 교토의대 연구팀이 심근세포 속에 있는 단백질을 이물질로 오인해 생긴 항체에 의해 발병한다는 사실을 쥐 실험을 통해 밝혀낸 바 있다. 심근을 공격하는 항체는 혈액 속에 있다. 면역흡착요법은 혈액을 여과해 항체를 제거함으로써 공격을 멈추게 하려는 목적으로 시행되는 것이다.
치료는 1회에 혈액의 액체성분 1.5L를 특수한 여과장치를 통과하게 한다. 하루 걸러 5회 실시한다. 그 다음 3개월 후에 다시 한번 같은 과정을 거친다. 신장병 환자가 인공투석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2006년에 1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소규모 임상연구에서는 어느 정도 효과를 얻은 바 있다.
하지만 확장형 심근증에 대한 면역흡착요법에 신중한 의견도 있다. 신슈 대학 이케다 우이치 교수는 “정말 효과가 있는지 알 수 없다”고 말한다.
혈액을 여과하면 항체 이외에도 많은 물질이 제거된다. 원래 항체가 늘어나지 않은 사람에게도 효과가 있었다는 보고도 있어 노렸던 항체가 아닌 다른 물질이 제거된 결과 증상이 완화되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다른 자기면역질환에서도 항체를 제거하는 치료법은 있지만, 항체는 한번 제거해도 조금 있으면 늘어나는 경우가 많다. 확장형 심근증의 경우 한번 감소한 항체는 1년이 지나도 늘지 않는다는 보고가 있는 반면 처치 전의 상태로 되돌아갔다는 보고도 있다.
신슈 대학이 독자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연구에서도 8명의 환자에게 시험한 결과 “처치 후에는 당장 증상이 개선되는 효과가 나타났지만 1년 이상 지났을 때의 효과에 대해서는 아직 의문이 남는다”고 이 대학 가사이 히로키 교수는 말한다.
이케다 교수는 “많은 증상을 비교해 어떤 타입의 증상에 특별한 효과가 있는지 실마리를 찾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는 면역계의 활동을 억제하는 약과 병용하면 효과적일 수 있다고 추정하고 있다. 면역흡착요법이 비록 일본에서 진행되는 임상연구지만 절망적인 확장형 심근증 환자들에게 새로운 희망의 불씨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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