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의 또 다른 적들
이집트의 또 다른 적들
내 페이스북 페이지에 이집트 출신의 한 여성이 올린 글이 큰 감동을 줬다. 그녀는 무바라크 정권의 붕괴가 거의 확실시돼 가는 현재의 이집트 상황을 언급했다. 그러면서 가말 압델 나세르(1952년 이집트 혁명을 주도했고 1956~70년 대통령을 지냈다)의 반(反)서양·반(反)유대 정권 당시 망명한 모든 기독교도와 유대교도, 이슬람교도가 이집트로 돌아가 국가 재건을 돕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말했다. 상당히 비현실적이긴 하지만 아주 기분 좋은 생각이다. 이집트에서는 나세르의 집권 이후 60년 넘게 군사정권이 지속돼 왔고 언론은 나라 안팎에서 상상의 적을 만들어내며 거짓말을 일삼아 왔다. 하지만 이제 드디어 이집트 출신의 누군가가 독재자들이 이 나라 전체에 씌웠던 눈가리개를 벗기고 진실을 말하려고 나섰다. 이집트는 과연 자유롭고 진보된 다원화 사회로 변모할 준비가 됐을까? 난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 살 수 있을까?
하지만 내 페이스북 페이지의 글을 다시 읽어보니 나를 감동시킨 부분은 망명한 유대교도와 기독교도, 이슬람교도들이 고국으로 돌아가 새로운 이집트를 건설하게 되리라는 대목이 아니었다. 나 같은 누군가가 한 국가는 차치하고라도 뭔가를 재건하는 데 한몫하게 될지 모른다는 기발한 생각도 아니었다. 또 이집트가 최근 아랍권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던 혼란과 폭력의 소용돌이로 빠져드는 현 상황에서 뭔가를 재건할 가능성을 생각해냈다는 사실도 아니었다. 나를 감동시킨 건 ‘이집트로 돌아간다’는 단 두 마디 말이었다.
흥분을 가라앉히려 노력하면서 좀처럼 믿기지 않는 그 말을 되풀이해 보았다. 그런 말에 현혹될 만큼 어리석진 않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 말을 곱씹으며 음미했다. 그 말은 마치 내가 이미 포기한 뭔가를, 또 없이 지내는 데 익숙해진 뭔가를 되살려주겠다는 약속처럼 들렸다. 내 일상에 끼어드는 반가운 방해꾼이자 행동을 이끌어낼 만한 격려처럼 느껴졌다. ‘이집트로 돌아간다.’ 나세르 정권은 내 가족의 재산을 빼앗고, 우리의 삶을 망치고, 우리를 국외로 추방한 뒤 다시는 돌아와선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이집트로 돌아가는 일이 가능할까?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과연 이집트가 문을 활짝 열고 내 기여와 협조를 요청할까? 그 대답을 듣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하지만 가슴 아픈 현실을 머릿속에서 떨쳐내기도 전에 환상이 나를 사로잡았다. 난 하던 일을 멈추고, 약속을 취소하고, 온라인으로 항공권을 구매한다. 그리고 지중해가 내려다보이는 호텔 방을 예약한다. 몇 시간 뒤 나는 알렉산드리아의 호텔 방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50년 만에 이렇게 외친다. “고향이다.”
이집트는 내 고향이 아니다. 아니, 지난 수십 년 동안 내 고향이 아니었다. 사실 이집트는 내 고향이었던 적이 없었다. 거기에 소속된 적도 없다. 유년기와 청소년기 대부분을 이집트에서 보냈지만 늘 내가 이미 그 나라를 떠났다고 생각하면서 살았다. 지금은 뉴욕이 내 고향이나 다름없다. 어쩌면 망명자들에게 ‘고향’이란 낯선 개념일지도 모른다. 이집트에서 보낸 성장기부터 이미 낯선 개념이었다. 망명자들이 어디를 ‘고향’으로 여기는지를 알아보려면 “죽어서 어디에 묻히고 싶으냐”고 물어보라. 그들의 대답은 한결같다. 그들에겐 새로운 뿌리와 경력, 가족이 생겼지만 모두가 “내가 태어난 곳”이라고 답한다. 그곳이야말로 인생이 제자리로 돌아오고 의미를 되찾게 되는 곳이다. ‘이집트로 돌아간다’는 글을 읽으면서 내 마음이 곧바로 지중해를 굽어보는 호텔 방 창문으로 달려간 이유다.
이집트는 내 고향이지만 명목상으로 그럴 뿐이다. 난 이집트에서 자랐으며, 학교에 다녔고, 첫사랑을 만났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이집트인이 아니었다. 우리는 아랍어로 말하지 않았고, 아랍어를 하는 경우에도 서툴렀다. 8년 동안 아랍어를 배우긴 했지만 유럽에 와서 몇 개월이 지나자 주입식으로, 때론 매를 맞아가며 배운 고전 아랍어를 다 까먹어버렸다.
난 이집트에 사는 터키인 가정에서 태어난 유대교도다. 하지만 난 터키인이 아니다. 이집트에서 영국인 학교에 다녔지만 영국인도 아니다. 우리 가족이 이탈리아로 귀화한 뒤 이탈리아어를 배웠지만 내 모국어는 프랑스어다. 어린 시절엔 내가 프랑스인인 줄 알았다. 그래서 (그 시절 이집트에서 내가 알고 지내던 거의 모든 이처럼) 곧 프랑스로 돌아가리라 생각했다. 프랑스로 ‘돌아간다’는 생각은 터무니없었다. 내 직계가족 중 누구도 프랑스 혈통이 아니었으며 프랑스 땅에 발을 디딘 적도 없었다. 난 프랑스인의 피가 한 방울도 안 섞였지만 프랑스는 늘 내 정신적인 고향이자 상상 속의 고향이었고 앞으로도 평생 그럴 것이다.
내 어린 시절 이집트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대다수 사람이 적어도 다섯 개 언어를 말했다. 알렉산드리아는 단일언어나 단일문화 사회와는 거리가 멀었다(소설가 로런스 듀렐의 ‘알렉산드리아 사중주’에 당시 모습이 실감나게 묘사됐다). 다양한 요소가 조금씩 두루 섞여 있었다. 쇠퇴한 식민지의 잔재를 이어받고 변화무쌍한 중동 역사·문화의 영향에 휘둘리던 그 시절 그곳 사람들은 알렉산드리아 안팎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리고 상황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1952년 이집트 혁명으로 파루크 국왕이 폐위됐고, 1956년엔 나세르 대통령이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해 수에즈 위기가 촉발됐다. 프랑스와 영국 국적을 가진 사람 모두와 유대교도 대다수가 즉결심판을 통해 이집트에서 추방됐다. 당시 우리 가족은 가까스로 추방 위기를 모면했지만 9년 뒤 결국 추방됐다.
그 9년 동안 나는 이집트(특히 알렉산드리아)가 변화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알렉산드리아 태생인 나세르는 유럽 문화의 흔적을 깨끗이 지워버리겠다고 약속했고 그 일을 성공적으로 해냈다. 학교와 병원, 클럽과 기타 기관들이 유럽 도시와 어깨를 견주며 ‘작은 파리’로 일컬어지던 활기찬 다문화 도시가 낙후된 도시로 전락했다. 그리고 그곳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속속 사라져 가는 이 도시의 현대적 특성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이집트는 지극히 이집트다워졌다. 물론 당연한 일일지 모르지만 이집트다운 특성이 짙어질수록 시간은 과거로 돌아가는 듯 보였다.
과격한 민족주의, 모든 것에 우선하는 종교문화, 사회주의적 국유화 물결, 제도화된 반(反)서양 정서가 알렉산드리아를 지배했다. 도회적이고 국제적인 매력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학교의 분위기도 적대적으로 변했다. 한때 영국인 학교였던 우리 학교는 부유한 아랍인과 이집트인 자제들이 다니는 학교로 바뀌었다. 나는 그 학교에서 유일한 유대교도였다. 유대교나 이스라엘(사람들은 이 둘을 혼동했다)에 관한 모욕적인 말을 듣지 않고 지나는 날이 하루도 없었다. 거리에선 젊은이들이 떼 지어 유대교도를 괴롭히거나 돌팔매질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사회 분위기는 갈수록 험악해졌다. 경찰이 우리 가족을 뒤쫓고, 직조업에 종사하던 아버지를 감시했다. 아버지는 툭하면 보안당국이나 세무서에 불려 다녔다. 아버지를 모함하는 익명의 투서가 끊이지 않아 그때마다 조사를 받아야 했다. 한번은 아버지가 감옥에 갇히게 되리란 사실을 미리 알고 나를 불러 앉혀놓고 유럽에 있는 삼촌들에게 암호로 편지 쓰는 법을 가르쳐줬다. 아버지는 “이제 네가 이 집의 가장이다”고 말했다. 정말 실감이 나지 않던 말이다.
이집트에서 우리가 알고 지내던 모든 사람이 공포에 떨며 살았다. 처음엔 재산을 잃게 되지 않을까 두려움에 떨었고(결국 모두가 재산을 잃었다), 그 다음엔 날조된 간첩 혐의로 경찰에 체포될까 겁에 질렸다. 또 그 다음엔 감옥에 갇혀 고문 당하고 결국 국외로 추방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워했다. 난 이집트를 생각할 때마다 두려움에 떨었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골목에서 축구를 하는 아이들을 보거나 낯선 사람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질 때면 덜컥 겁이 났다. 또 내게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아도 사람들이 모여 있는 광경을 보면 두려웠다. 가게에서 사소한 일로 불평해도 상상을 뛰어넘는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지곤 했다. 사람들은 공포로 위축됐다.
몇 주에 한 번씩은 모든 걸 버리고 새 삶을 찾아 유럽이나 미국, 캐나다나 호주로 떠나는 가족들의 소식이 들려왔다. 우리 가족이 이집트를 떠나던 1965년 이집트는 경찰국가가 된 지 이미 오래였다. 1956년 추방당하지 않은 우리 같은 유대교도들은 이 억압적인 국가의 횡포를 누구보다 먼저 체험했다. 우리는 이집트가 경찰국가가 됐다는 사실 또한 가장 먼저 알아차렸다. 그 다음엔 그리스인과 미국인, 콥트교도, 그리고 마침내 모든 이집트인이 그 사실을 깨달았다. 나세르는 서양 문화의 잔재를 청산하고 이스라엘을 악마로 몰아붙이는 과정에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반유대주의, 범아랍주의 등을 동원했다. 이는 독재와 편집증에 사로잡힌 잔인하고 억압적인 정권, 그리고 궁극적으론 6일전쟁(제3차 중동전쟁·1967)까지 비싼 대가를 치르게 했지만 이집트인 대다수가 이런 사실에 눈감았다. 전체주의 정권이 벌인 모든 전쟁이 그렇듯이 6일전쟁도 욤키푸르 전쟁(제4차 중동전쟁·1973)처럼 이스라엘의 파괴보다는 이집트와 아랍사회 전반에 퍼진 불만을 상상의 적에게 돌리는 게 목적이었다. 하지만 기아와 가난, 실업, 교육받은 층과 교육받지 못한 층 모두가 느끼는 절망감, 그리고 조금만 건드려도 터질 듯 끓어오르는 민중의 분노 등은 그 자체로 늘 아랍 사회의 실질적인 적이었으며 오늘날도 여전히 그렇다. 미국과 우호관계를 다져 온 무바라크 대통령은 이스라엘과 형식적인 평화를 가까스로 유지하면서도 이스라엘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진 않았다. 이집트는 이제 앞서 말한 그 실질적인 적을 주목하게 됐다. 영국 식민지에서 벗어난 뒤 처음으로 그 적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놀라움과 충격에 휩싸였다.
우리 가족이 이집트를 떠나오던 해 아버지는 날 교과과정이 아랍학 쪽으로 기운 영국인 학교에서 빼내 알렉산드리아 교외의 작은 미국인 학교로 전학시켰다. 매일 아침 학교에 갈 때마다 내가 살던 가난한 경찰국가에서 벗어나 자유 세계로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곳에선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정치 지도자들을 비웃고, 학교 당국을 조롱하는 말을 해도 처벌받지 않았다. 이전에 다니던 학교에선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해 겨울 학교에서 저녁 때까지 연극 연습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전차를 탈 때면 난 솔직하고 밝고 좋은 세상을 떠나 초라하고 시대에 뒤진 세상으로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곳엔 소음과 불화, 공포가 가득하고 라디오 소리가 소란스럽게 울리며 마늘과 팔라펠(다진 야채를 넣어 납작하게 말아 만든 아랍식 빵) 냄새가 진동했다. 또 창문마다 여자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새어 나오고 거리에선 꼬마들의 외침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나의 세계였다. 내가 뉴욕과 유럽의 멋진 도시를 얼마나 사랑하게 됐든, 평생 가장 그리워한 게 뭘까 생각할 때마다 내 생각이 미친 곳은 알렉산드리아였다. 바로 그곳의 하늘과 해변, 그리고 사람들이었다. 내가 이집트에서 살던 시절 어디를 가든 늘 나를 따라다녔고, 그 후에도 그 시절을 생각할 때마다 떠올랐던 그 공포가 아니었다면 난 벌써 그곳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필자는 ‘아웃 오브 이집트(Out of Egypt: A Memoir)’의 저자로 뉴욕시티대 대학원에서 비교문학을 가르친다.]
번역·정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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