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넝마주의’ 패션 뜬다

2010 남아공월드컵에 출전한 한국과 네덜란드, 미국, 브라질, 슬로바키아 축구대표팀의 공통점은? 16강 진출팀? 아니다. 모두가 폐(廢)페트병으로 만든 재활용 섬유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를 누볐다. 32개 출전 팀 가운데 9개 팀이 이에 해당한다. 이 유니폼은 대만 방직산업종합연구소와 방직산업연맹이 재생 원사 개발부터 유니폼 제작(나이키사)을 총괄했다.
세계적인 스포츠팀들의 재활용 유니폼 착용은 새삼스럽지도 않다. 지난 9일에는 프랑스 축구대표팀이 이 유니폼을 입고 경기장에 나섰다. 그런데 폐페트병 유니폼을 세계에서 처음으로 입은 스포츠 팀은 한국프로야구(KBL)의 SK 와이번스란다. 이들은 지난해 5월부터 재활용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나서 환경보호에 앞장섰다. 지난해부터 ‘그린스포츠’ 캠페인을 펼치는 SK 와이번스의 구단 관계자는 “폐페트병 모으기는 구단과 선수들이 인천 문학구장을 찾은 관람객들과 함께 단시간에 성과를 볼 만한 효율적인 친환경 운동”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버려진 페트병, 현수막이나 헌 옷 등을 활용해 제품을 만드는 트래션[trashion: 쓰레기(trash)와 패션을 결합한 용어] 업체가 국내에서도 늘어난다.
“트래션은 다운사이클링(downcycling)과 업사이클링(upcycling)으로 구분됩니다. 다운사이클링은 폐기물을 화학적 공정 등으로 제2의 원사나 원단을 만들지만 업사이클링은 버려진 옷이나 현수막 등 원재료를 기계적·화학적인 공정 없이 그대로 재활용해 원제품보다 더 높은 가치를 가진 제품을 만드는 작업입니다.”
업사이클링 트래션 업체의 선두주자로 꼽히는 ‘리블랭크’ 채수경(38) 대표의 설명이다. 2008년 설립된 이 회사는 헌 옷과 가죽소파 등을 재활용해 남녀 의류 등을 만든다. “인터넷 쇼핑을 하다 우연히 리블랭크의 옷을 알게 됐다”는 대학생 김용(23)씨는 “특이한 디자인과 재단이 맘에 들어 2년째 이 브랜드의 단골이 됐다”고 말했다. “다소 가격이 비싸지만 디자인과 품질이 좋았어요. 게다가 재활용 옷을 사서 입으면서 환경을 지키는데 나도 일조한다고 생각하면 더 기분이 좋아집니다.”
채 대표는 한 주에 하루는 회사 직원들과 함께 재활용품 가게인 ‘아름다운 가게’와 경기도 의정부 일대의 가죽 소파점, 잠실 주경기장 등 대형 행사장들을 돌면서 헌 옷과 버려진 가죽, 현수막 등을 모은다. 회사에서는 이 수거작업을 ‘Trash Attack(쓰레기 공격)’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모은 폐기물을 친환경 세제로 말끔히 세탁한 뒤 제작과정에서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다.
리블랭크의 제품은 각종 패션대회에서도 주목 받는다. 2008, 2009년 연이어 ‘서울 패션위크’에 참가해 호평을 받았고, 지난해엔 채 대표가 프랑스의 명품 하우스 까르띠에가 주최하는 ‘여성창업어워드(Cartier Women’s Initiative Awards)’에 응모해 세계 여성기업가 15인에 선정됐다.
트래션 의류의 멋은 패치워크(patchwork: 쓰다 남은 천을 배색효과를 살려 이어 붙이는 기법으로 한국의 전통적인 조각보도 그에 속한다)에 있다. 의류는 털실, 면, 모직, 나일론 등 원단이 너무 다양해 트래션에 활용할 만한 재료가 매우 제한적이다. 기존 패션이 재료를 ‘골라 쓰는’ 넉넉함이 있다면 트래션은 ‘찾아내야만 하는’ 절박함이 디자이너를 늘 긴장시킨다. 한 번 사용했던 의류를 재활용하기 때문에 소비자를 만족시키는 일도 녹록지 않다. 채 대표는 “무엇보다 제작기간을 예측하기가 어렵다”며 “디자인 구상이 끝나도 원재료를 못 구하면 제품 생산이 마냥 늦어진다”고 말했다.
하지만 때로는 이 절박함이 디자이너와 소비자에게 차별화된 제품을 선사하기도 한다. 제아무리 유명한 명품 브랜드라도 트래션의 희소 가치를 따라가긴 어렵다. 트래션 제품은 한두 개 한정생산으로 끝나는 일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간호섭 홍익대(패션디자인학과) 교수는 “트래션 제품은 제작 기간이 오래 걸리지만 소재를 낭비하지 않는 경제성, 창의적인 디자인과 재료의 제한성이 주는 희소성이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엔 한 회사가 트럭 짐칸덮개로 사용된 타플린(tarpaulin) 방수포를 재활용해 만든 배낭제품이 큰 인기를 끌었다. ‘아름다운 가게’가 설립한 에코파티메아리(이하 메아리)가 200개 한정생산한 제품이다. 이 회사는 2009년부터 타플린이나 현수막 등을 활용해 가방 등 생활소품을 제작해 판매한다.
메아리의 제품들은 외국인에게도 인기다. 특히 서울 안국동 메아리 매장의 고객은 절반이 외국인이란다. “현수막 가방의 한글 타이포가 외국인들에게 색다르게 비친 듯하다”고 이 회사의 김효진 디자인팀장이 말했다. “가방을 만들 때도 현수막을 일괄적으로 잘라서 재료로 쓰기보다는 의미 있는 문구나 문양, 독특한 색의 어울림 등을 고려해 제품을 디자인한다”고 그가 말했다.
메아리는 이들 제품을 해외 온라인 쇼핑몰에서도 판매한다. 세계 디자이너들의 제품이 팔리는 미국의 온라인몰 포케토(poketo)에서는 이 회사의 제품 10여 종류가 판매된다. 헌 가죽으로 만든 랩톱 배낭(250달러), 헌 양복으로 만든 가방(250달러), 마름모 가죽 백(180달러), 현수막 가방(19달러) 등이다. 메아리의 김대호 사업국장은 “재활용 제품도 품질로 평가받기 때문에 구매 동기(디자인)가 가치 동기(친환경)보다 높아야 살아남는다”고 말했다.
신발 디자이너 이겸비(37)씨의 재활용 구두도 문화예술계 인사와 외국인들 사이에 인기를 누린다. 그는 현수막, 고무신, 소파 가죽, 헌 운동화뿐만 아니라 버려진 라면봉지를 활용해 ‘엣지’ 있는 구두를 선보인다. “친환경 전시회 참가 작품으로 제작했지만 의외로 사람들의 반응이 좋아 제품을 만들게 됐다”고 그가 말했다. 라면봉지 레깅스부츠는 실용성도 있을까? 이씨는 “제품 생산 과정에서 이미 코팅이 돼 있어서 가죽만큼은 아니지만 쉬 닳거나 변색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방수 기능도 완벽하다”며 “비 오는 날에 라면을 먹고 싶은 마음을 구두에 담았다”면서 빙그레 웃었다. 재활용 수제 구두는 메아리에서 비교적 고가인 10만~20만원대에 팔렸다.
금속공예가인 김승희(65) 국민대 교수가 선보인 폐도장석을 재활용한 액세서리도 눈길을 끈다. 그 또한 친환경 전시회에 출품할 장신구 제품을 만들었다가 이를 상품화했다. 우연히 길을 걷다가 도장가게 옆에 버려진 아름다운 돌들을 보고 예술적인 영감을 얻었단다. 그는 “도장석으로 사용되는 ‘마노’라는 돌은 변화무쌍한 모양과 색깔 때문에 장신구 소재로 손색이 없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2001년 폐도장석으로 만든 목걸이와 브로치를 모아 ‘너와 나’라는 제목의 전시회를 열었다. 고가의 보석과 준보석 마노가 어울리듯 모든 사람이 더불어 살아가자는 화합이 주제였다. “전시회의 반응이 좋아 대부분의 작품이 팔렸다”고 그가 말했다. 김 교수는 버려진 호박 원석도 장신구의 소재로 사용한다. “보통 호박은 매끄럽고 색깔이 균일한 안쪽만 보석으로 사용하고 껍질은 대부분 버려지거든요. 하지만 껍질 부분의 무늬가 더 멋스러워 장신구의 소재로 즐겨 씁니다.”
하지만 트래션 시장을 더욱 키우려면 정부와 지자체의 지원이 절실한 듯하다. 채수경 리블랭크 대표는 “대기업과 관공서가 나서서 재활용업체에 원재료 공급을 지원해주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대형 의류회사의 재고품을 트래션 업체에 저가 또는 무료로 공급해주는 협업이 이뤄져야 한다.” 2008년 설립된 재활용업체 ‘터치포굿’은 MBC 다큐멘터리 ‘아마존의 눈물(2010)’과 ‘북극의 눈물(2008년)’ 현수막을 직접 공급받아 가방을 만들어 큰 호응을 얻었다. 다큐멘터리 스태프의 친필 사인을 받아 가방에 넣기도 했다. 원재료 현수막과 제품에 담긴 지구를 살리자는 메시지를 소비자에게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한 성공사례다.
지식경제부 디자인브랜드과 관계자는 “재활용업체의 구체적인 지원 계획은 아직 없지만 적극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그는 “시장이 아직 초기 단계여서 폐기물만 제공한다고 모든 문제가 풀리진 않는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양병이 서울대(환경대학원) 교수는 “시작 단계라 경제성이 없다고 도외시하기보다는 초기부터 적극적으로 시장 형성을 지원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재활용업체도 정부의 정책이 뒷받침될 수 있도록 품질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트래션이 시장에 뿌리내리려면 소비자의 마음을 움직일 뛰어난 품질과 디자인이 우선돼야 한다는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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