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유 하나금융지주 회장] 나이 들어 보니 사람 자르기 싫어지더라
[김승유 하나금융지주 회장] 나이 들어 보니 사람 자르기 싫어지더라
약속한 4시가 10여 분 지나 접견실 문이 열렸다. 오전 10시에 시작된 마라톤 이사회가 그제야 끝난 것. 김승유 회장은 피곤한 듯 눈을 크게 감았다 떴다. 눈꺼풀이 아래로 쏠렸지만 노장의 여유 있는 미소는 그대로였다. ‘예, 예’ ‘허허’로만 답하던 그가 자리에 앉아 목을 축이고 말문을 열었다.
이사회는 잘 끝났습니까?“별문제 없이(외환은행 인수 자금 마련을 위한) 유상증자를 결의했습니다. 오늘 아침까지도 투자자들이 문의해 왔어요. 인수자금은 무리 없이 조달할 수 있습니다.”
유상증자가 큰 화두였나 봅니다.“예, 근데 처음부터 걱정 안 했어요. 세계에서 지난 2년 동안 풀린 돈이 갈 데가 없거든요. 자금 조달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보다 PMI(합병 후 통합)… 결국 앞으로 어떻게 협력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같은 금융인이니 있는 그대로 알려주고 설득하면 잘될 것이라 기대합니다.”
외환은행 합병 후 통합이 중요
지배구조 규준을 확정하는 안건도 있었지요?“최근에 하나금융지주가 후계자 양성 프로그램을 준비한다는 기사가 나왔더군요. 사실 지난해 9월부터 이사회에서 논의한 건입니다. 어제오늘 준비한 것이 아니지만 금융계에 문제(신한금융 사태)가 좀 생기지 않았습니까? 그때 저희가 나서면 더 안 좋을 것 같아 덮어 두고 있었지요.”
현실적으로 후계자 양성 프로그램을 실행하기엔 이르다는 의견이 있습니다.“때가 됐다고 봅니다. 공장도, 첨단기술도 없는 금융업은 ‘사람 리스크’가 가장 커요. 위기관리 차원에서 제도적으로 승계 계획을 갖춰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외국 은행은 하는 일을 한국 은행은 왜 못할까’ 늘 고민했지요.”
고민한 결과는요?“한국에서는 금융회사를 공공기관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공익 기능이 크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엄연히 거래소에 상장된 사기업입니다. 외국 은행은 전임자가 퇴임하기 6개월 전 승계 계획을 발표하고 후임자와 함께 다니며 자연스럽게 승계 절차를 밟습니다. 한국에선 그게 안 됩니다. 전임자가 그만두면 인적 네트워크가 하루아침에 없어져요. 몇 년 전 외국에서 하듯 후임자를 먼저 발표하려고 해봤습니다. 그런데 알 만한 분이 ‘순진한 생각 마라. 미리 후계자를 발표하면 직원들이 눈을 돌려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김 회장이 떠올린 ‘몇 년 전’이란 하나은행장에서 물러난 2005년이다. 은행장 때부터 후임자 문제로 고민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지인의 충고에 후임자를 미리 발표하려 했던 계획을 접고, 대신 여의도 하나대투증권 본사로 집무실을 옮겼다. 을지로에 있으면 후임 은행장이 소신껏 일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나금융지주의 한 임원은 “김 회장은 행장 때부터 조직 관리를 잘해 직원과 임원 모두 편하게 일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선진국도 CEO 나이 제한
‘70세’ 연령 제한은 회장님 생각입니까?
“내 아이디어는 무슨…, 사외이사들 중심으로 만들었지요. 일단 선진국 규준을 따랐습니다. 실은 그 얘기가 알려지고 욕 많이 먹었어요. 친구들이 다 일흔 살인데 고령화 시대에 역행한다고요(웃음). 연령 제한을 두고 또 고민에 빠졌습니다. 미국이나 영국 문화가 나이 따지는 것하곤 거리가 멀잖아요? 근데 씨티 뱅크는 72세, 골드먼삭스는 75세, JP모건과 뱅크오브아메리카(BOA)는 70세로 CEO 연령 제한에 대한 내부 가이드라인이 다 있어요. 왜 그렇게 정했을까 나를 돌아보며 생각해 봤지요.”
김 회장은 이미 오래전에 답을 얻은 듯 빠른 속도로 말을 쏟아냈다.
“나이 들어 보니 제일 하기 싫은 게 사람 자르는 거예요. 정말이지 그게 싫어져…. 나이가 들면 관대해져요. 10년 전 나하고 지금의 나는 내가 봐도 달라요. 요즘 학교 가서 애들 보면 그렇게 좋은 게 꼭 할아버지가 손주 크는 모습 보고 좋아하는 것하고 비슷합니다. 하지만 기업 경영은 그렇게 하면 안 되거든요. 좋든 싫든 그 자리에 있으면 자리에 맞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둘째로 빠르게 변하는 인터넷 세상에 적응이 늦어요. 나름대로 한다고 하는데 젊은 사람들 보면 그렇지 않은 거예요. 셋째는 육체적으로 달려요. 세계를 무대로 영업해야 하는데 여행 가고 그런 게 이제 간단치 않아요. 미국의 젊은 CEO들 보면 이틀, 사흘 밤을 새우고도 끄떡없거든요. 날 보고 하라면 못해요. 아, 이래서 외국 은행들이 CEO 연령 제한을 두는구나 생각했습니다.”
‘육체적으로 달린다’고 했지만 김 회장은 전날 새벽 4시가 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고 한다. 이사회에서 논의할 투자자 명단을 확인하느라 그랬단다. 또 아무리 일정이 많아도 웬만해선 약속을 깨지 않는다. ‘좋은 체력 때문인지 업계에서 연임을 점친다’고 거취 얘기를 꺼내자 ‘허허’ 하고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아까 말씀드린 이유 때문에 우리나라도…(연령 제한이 필요합니다).”
그뿐 아니라 첫 임기만 3년으로 하고 연임 시 1년씩 연장하게 했지요? “흠, 3년마다 CEO가 바뀌는 것은 문제가 있어요. 더 길게 가야지요. 미국에서는 후임자가 앞으로 10년은 근무한다는 생각으로 45~55세에서 많이 뽑거든요. 실제 외국 은행 CEO는 대부분 50대입니다. 과거에는 보통 10년씩 하다 2008년 이후 7~8년으로 짧아졌어요.
한국 현실에서 10년은 모르겠고 매년 평가가 필요합니다. 내가 내 나이에 맞춘다고 70세로 연령 제한을 했다고들 하는데, 난 그렇게 얘기하면 섭섭해요. 규정에 따르면 나 3년 더 할 수 있어요(김 회장은 2013년 만 70세가 된다). 정말 하나금융지주가 지배구조를 선진화해 보자는 것이지 그런 욕심 없어요. 난 그런 욕심 없어.”
신한금융 사태의 영향도 있는 듯합니다. “CEO를 매년 긴장하게 하려는 것이지 그런 것과 관계없어요. 3년 하고 3년 더 하면 뭔가 군림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도 모르거든요. 최근 어느 강연에선가 윤석철 서울대 명예교수의 ‘네이키드 스트렝스(naked strength·벌거벗은 힘)’를 접했어요. 하나금융지주 회장으로서가 아니라 인간 아무개로서 강점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것을 계속 쌓아가야 한다는 내용인데 감명 깊더군요.
앞으로 CEO를 뽑을 때 정말 이 사람이 조직을 제대로 이끌 수 있을까 생각해야 합니다. 물론 이 자리(금융지주 회장)가 영광스럽지요. 그러나 개인의 영광 이전에 직원 가족까지 10만 명, 고객 1000만 명을 생각해야 하니 쉽게 정할 수 없습니다.”
회장 김승유 아닌 인간 김승유 돌아봐
한국 현실에 맞게 후계자를 양성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끝없이 자기성찰을 하는 사람을 계속 양성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기업 내외부에서 찾아야지요. 내부가 우선이겠지만 사람이 없으면 외부에서 찾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부 사람들이 긴장하고 소모적 권력투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 후계자 양성에서 LG·삼성보다 신한·하나가 더 어렵습니까?“너나 나나 같은 월급쟁이라고 하는 것과 너나 나나 같은 주인이라고 하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LG·삼성은 오너(소유주)가 있지요. 전문경영인이 오너처럼 하면 직원들은 ‘저 사람도 물러날 텐데 누가 누구를 평가하나’ 할 겁니다. 그래서 후계자 양성은 시스템으로 만들어야 해요. 곧바로 되진 않을 거고 몇 번 거치면 정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금융계 인사 때마다 정부 개입설이 끊이지 않습니다.“승계 계획을 제대로 짜면 정부가 개입할 여지가 줄어들겠지요.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정부 사람(?)을 데려와도 됩니다. 그 자체를 막아서는 안 되지요. 출신이 아닌 자격을 따져야 합니다.”
김 회장을 만나고 4일 뒤 신한금융지주 신임 회장에 한동우 전 신한생명 부회장이 내정됐다. 5개월여 동안 금융계를 떠들썩하게 한 신한금융 사태가 일단락된 것이다. 하지만 많은 업계 관계자와 전문가는 여전히 우려를 표하고 있다.
건국대 이장희(경영학) 교수는 “이번 신한금융 사태로 후계자 양성 프로그램을 갖추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확인했다”며 “제도적 변화가 절실한 시점에서 하나금융지주의 지배구조 규준 정립은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김 회장이 후계자 양성 프로그램을 6년 동안 숙성하는 동안 한국 금융계는 얼마나 성숙해 있을까. 그의 계획대로라면 답은 3년 안에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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