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P(기업어음) 투자자 ‘벙어리 냉가슴’
CP(기업어음) 투자자 ‘벙어리 냉가슴’
부동산 중개 법인회사를 운영하는 박상민(55·가명)씨는 지난해 10월 6일 LIG건설이 발행한 6개월 만기 CP(기업어음)에 10억원을 투자했다. 연 8%에 이르는 금리가 매력적이었다. 시중금리의 2배 수준이다. 박씨는 종종 CP에 투자해 왔기 때문에 별문제가 없을 걸로 봤다. LIG건설의 재무제표와 기업평가회사의 자료도 꼼꼼히 살펴봤다. 건설경기가 나쁘지만 LIG그룹 계열사라 믿을 만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법정관리 신청으로 원금마저 날리게 될 판이다.
3월 21일 LIG건설의 법정관리 신청으로 박씨의 믿음은 산산조각 났다. 그와 더불어 LIG건설 CP에 투자한 개인투자자 800여 명도 한순간에 원금을 날릴 위기에 놓였다. 금리가 높아 ‘대박’인 줄 알았는데 자칫 ‘쪽박’을 차게 생겼다.
CP의 만기는 1개월, 45일, 3개월과 6개월, 1년 등이다. 은행과 증권사 창구에서 살 수 있다. 금융회사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개인투자자의 경우 증권사에서는 최소 1억원 이상, 은행에서는 최소 1000만원 이상 있어야 CP를 살 수 있다. 금리는 기업의 신용등급에 따라 다르다. 6개월짜리 기준으로 평균 6~8%대다.
기업과 판매사는 서로 책임 떠넘겨안전한 고수익 상품 같지만 LIG건설 사태로 투자의 허점이 드러났다. 기업은 내부의 위험 요소를 제대로 알리지 않은 채 자금을 끌어들이려고 CP를 발행했다. 증권사 등은 수수료 챙기기에 급급해 일단 팔고 보자는 식의 영업 행태를 보였다. 서로 법률적인 책임은 없다는 입장이다. 투자자만 벙어리 냉가슴이다.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3월 말 현재 CP 발행 잔액은 82조원에 이른다. CP는 신탁 또는 소매 형태로 투자자에게 팔리는 일반 CP와 PF(프로젝트파이낸싱) 대출 채권을 유동화한 ABCP(자산유동화기업어음)로 나뉜다. ABCP의 규모가 50조원으로 일반 CP보다 좀 더 크다.
기업이 자금을 조달하는 여러 방법 가운데 CP 발행은 가장 손쉽고 간편하다. 주식이나 회사채를 발행하려면 이사회 의결과 유가증권신고서 제출 등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은행에서 대출을 받으려고 해도 담보의 근저당권 설정 같은 번거로운 과정이 필요하다.
CP 발행은 다르다. 은행에서 어음용지를 받아 도장을 찍어 발행하면 된다. 여기에 2009년 2월 시행된 자본시장법에서 발행자 요건과 최저 신용등급에 대한 규제를 없앴다. 그래서 2008년 3월 59조원이던 CP 발행 잔액이 2011년 3월 말 현재 82조원으로 크게 늘었다.
문제는 기업이 재무상황을 자세히 알리지 않고 CP를 발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LIG건설은 올 들어 3월까지 700억원에 이르는 CP(만기 연장분 포함)를 발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법정관리를 신청하기 불과 열흘 전 40억원대 CP를 발행해 부도 위험성을 알고도 투자자를 속인 게 아니냐는 의혹을 사고 있다. LIG건설 관계자는 “법정관리는 갑자기 결정된 일이라 부도 가능성에도 CP를 발행했다는 말은 옳지 않다”고 항변했다. 그는 “피해를 본 투자자에게는 유감이지만 증권사도 일단 팔고 보자는 식이어서 피해 규모가 더욱 커졌다”고 덧붙였다.
증권사도 팔기 바빠 기업 정보를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는 비난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증권사는 기업이 발행한 CP를 인수해 대부분 특정금전신탁 상품으로 판매한다. 문제는 신탁계정이 증권사가 아닌 고객 돈으로 운용된다는 것이다. 증권사 입장에서는 상품을 팔 때 굳이 위험을 알릴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번에 LIG건설 CP를 판매한 일부 증권사도 비슷한 행태를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고객이 원하는 물건을 구해주고 중개수수료만 챙기면 된다는 관행이 문제가 된 것이다. 증권사는 보통 신탁보수로 연 0.5∼0.6% 정도를 챙기고 있다. 이에 대해 증권사 관계자는 “기업은 물론 신용평가사나 예탁결제원 등도 기업 정보를 제대로 공개하지 않아 CP를 사려는 사람이 사라지기 전까진 피해 사례가 계속 나올 수밖에 없다”고 반박했다.
이런 상황에선 투자자 스스로 조심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CP는 원금이 보장되지 않는다. 무담보 채권이기 때문에 변제순위에서도 밀릴 수밖에 없다. 법원이 법정관리 기업에 청산 결정을 내리면 선순위 채권자가 남은 돈을 먼저 챙긴다. CP 투자자들은 남은 돈이 없으면 한 푼도 건질 수 없다. 현실적으로 증권사에 책임을 묻기란 쉽지 않다. CP는 고객의 판단과 지시에 따라 관리하는 자산관리 계좌의 일종인 특정금전신탁에 편입돼 있기 때문에 법적인 책임을 지을 수 없다.
CP 투자자의 피해 사례가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뾰족한 대책은 없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펀드와 보험 등에 대한 불완전 판매 문제가 도마에 오르면서 규제가 강화됐지만 CP에 대한 규제는 미흡한 실정이다. LIG건설 CP를 가장 많이 판매한 우리투자증권은 “위험성을 고지했기 때문에 불완전 판매는 없었다”며 단호한 입장이다.
투자자 스스로 조심할 수밖에금융감독원은 LIG건설의 CP를 판매한 증권사에 대해 조만간 검사를 진행한다는 계획이다. 판매 과정에서 투자 위험성과 상품에 대한 설명 등을 자세히 했는지 살펴볼 방침이다.
동양종금증권 최종원 연구원은 “CP 투자 손실을 줄이려면 기업이 먼저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금처럼 기업은 정보를 제대로 제공하지 않고 증권사는 투자 위험을 자세히 파악하지 않은 상황에서 CP를 판다면 고객의 피해는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KB투자증권 이재승 연구원은 “정부가 기업 편의를 위해 CP 발행 조건을 완화한 후 후속 조치가 없었다”며 금융당국을 비판했다.
전문가들은 현재 상황에서는 투자자 자신이 투자 기업과 거래 증권사를 잘 고르는 일이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증권사가 팔지만 고객이 최종 책임을 지기 때문에 CP를 사기 전에 증권사가 심사 능력이 있는지, 투자 기업과 기업이 속한 산업의 동향이 어떤지 자세히 살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성희 기자 bob28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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