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nt

꿈틀대는 ‘히바쿠샤’(2차대전 당시의 원폭 피해자) 의 망령

꿈틀대는 ‘히바쿠샤’(2차대전 당시의 원폭 피해자) 의 망령

원전사고 터진 후쿠시마 ‘출입금지 구역’의 중심부 오다카를 가다

일본 후쿠시마(福島)현의 다이이치 원전에서 북쪽으로 32㎞ 떨어진 미나미소마(南相馬)시에는 정적이 흘렀다. 대지진이 일어난 지 3주가 지났지만 일본 북동부 해안의 소위 ‘완충지대(buffer zone)’로 불리는 이 지역엔 아직도 옥내 대피령이 내려져 있다. 그러나 주민 대다수는 가끔씩 부득이하게 집 밖으로 나서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다. 정부가 운영하는 배급소에 구호식량을 타러 가거나, 아직 영업을 하는 몇 안 되는 가게에 다른 생필품을 사러 가거나, 친구와 이웃의 안부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분위기가 갈수록 흉흉해지는 가운데 도심에 있는 후쿠시마현 사회보건복지사무소가 정보센터 역할을 한다.

지난달 30일 그곳 날씨는 맑고 따뜻했다. 상쾌한 바람이 북쪽에서부터 후쿠시마쪽으로 불었다. 자위대원 10여 명이 방사능 수치가 높게 나온 주민의 방사능을 제거하는 데 사용하는 이동식 샤워 시설의 관리를 맡고 있었다. 주차장에선 흰색 방호복을 입은 정부 관리들이 가이거 계수기를 이용해 참을성 있게 줄지어 기다리는 주민들의 방사능 수치를 측정했다. 공중보건의 사사하라 겐지(45)는 현재 이 도시에 남아 있는 주민 9783명(대지진 이전 인구의 약 3분의 1)이 자진해서 방사능 검사를 받으러 왔다고 말했다. 정부는 이들 중 세 명을 제외한 모두에게 ‘방사능 안전(radiation-free)’ 증명서를 발급했다. 이들의 몸에서 측정된 방사능 수치가 0.0001밀리시버트 이하로 인체에 무해한 수준임을 증명하는 서류다. 나머지 세 명은 원전 근처에서 근무하던 주민으로 방사능 수치가 그보다 높게 나왔다. 이들은 고압·고온 샤워로 방사성 요오드를 제거한 뒤 귀가시켰다. 사사하라는 이 증명서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손상된 원자로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 이미 차별을 받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후쿠시마현 이외 지역의 여관에서 투숙을 거부당했다. 도쿄에서는 자동차 운전자들이 후쿠시마 번호판이 붙은 차량을 보고 “오염됐다”며 분노를 터뜨렸다. 미나미소마 시민 중 일부는 ‘완충지대’ 밖에 있는 병원에서 진료를 받으려다 ‘방사능 안전’ 증명서를 소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진료를 거부당했다.

사사하라는 원전 인근 지역 주민에 대한 이런 냉대가 지난 수십 년 동안 ‘히바쿠샤[被爆者: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의 원폭 피해자]’에게 가해졌던 차별대우를 연상케 한다며 우려를 나타냈다. “우리는 이들이 (방사능에) 오염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다. 그래서 단지 후쿠시마 주민이라는 이유로 차별당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3·11 대지진과 쓰나미의 피해 규모는 갈수록 늘어난다. 사망자 수가 1만8000명에 이르고, 수십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경제적 피해 규모는 이론이 분분하지만 세계은행과 일본 정부의 추산에 따르면 1220억~2350억 달러에 이른다. 그뿐이 아니다. 이번 재난은 지난 3세대 가까이 방사능의 치명적 파괴력으로 고통받아 온 일본에 핵재앙의 공포를 되살려주었다. 대지진 이후 방사능으로 인한 사망자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파괴된 원자로에서 방사능이 누출되는 사고를 막으려고 원전에 남아 사투를 벌인 이른바 ‘후쿠시마 50인’의 운명이 어찌 될지에 관심이 쏠렸다.

일본인들은 지난 몇 주 동안 북동부 해안지역 수천 ㎢를 덮친 쓰나미가 초래한 참상을 보면서 놀라움과 공포에 떨었다. 설상가상으로 이제 이들은 농·수산물과 식수 등 주요 식품의 방사능 오염과 원자로 노심용융 위기라는 또 다른 위험에 맞닥뜨렸다.

기자는 지난달 30일 후쿠시마 다이이치 원전 반경 20㎞ 이내의 ‘출입금지 구역(exclusion zone)’ 중심부에 다녀왔다. 대기 중 방사능 수치가 인체에 안전한 수준의 네 배에 이르는 지역이다. 내가 이곳에 다녀온 다음날 일본 정부는 이 지역에 발을 들여놓는 사람은 체포해 벌금형에 처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기자가 방문한 날은 비록 도로 곳곳이 봉쇄되고 방호복을 입은 경찰관과 자위대원들이 자주 순찰을 돌긴 했지만 진입이 비교적 쉬웠다. 이 지역의 10여 개 마을은 싸늘한 기운이 느껴질 만큼 황폐했다. 마치 지진이 일어난 순간부터 시간이 멈춘 듯했다. 로드 설링의 ‘환상특급(Twilight Zone: 1950년대 미국 TV SF 드라마 시리즈)’과 ‘그날 이후(The Day After: 1980년대 미국 TV 영화)’를 뒤섞어 놓은 듯한 분위기였다. 핵시대의 종말론적 전망을 표현한 작품들이다.

후쿠시마 원전에서 북쪽으로 16㎞ 떨어진 곳에 위치한 오다카에는 몇 주 전만 해도 1만3000명의 주민이 살았다. 아부쿠마 고원과 태평양 사이에 있는 이곳은 현재 후쿠시마 ‘출입금지 구역’의 중심부다. 미나미소마시에서 출발해 왕복 2차로의 도로를 달리다가 휴경(休耕) 중인 논을 지나고 나니 원추형 도로표지와 백색 테이프로 표시한 도로 봉쇄 지점이 나타났다. 그곳에는 “원자력재해특별법에 의거해 출입을 금함”이라는 빨간색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그 경고문을 무시하고 텅 빈 도로를 달렸다. 사방이 고요했다. 가끔씩 ‘출입금지 구역’으로부터 빨간 불을 반짝이며 달려오는 경찰과 육상자위대 차량이 정적을 깼다. 경찰의 통제를 받지 않는 좁은 도로로 들어서자 주변에 드문드문 가옥이 눈에 띄었다. 숲이 우거진 언덕도 지났다. 그렇게 곧장 가다보니 오다카구의 중심부에 다다랐다.

아침 10시 상쾌한 북풍이 불고 마을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지진의 가공할 파괴력을 보여주는 증거가 곳곳에 널려 있다. 분홍색 콘크리트로 된 여성복 전문점 건물은 도로 쪽으로 45도 기울어졌고 2층짜리 전통 가옥은 폭삭 무너졌다. 여기저기 기와와 나무 판자들이 뒤죽박죽 쌓여 있었다. 오토바이 상점과 국수집, 이발소, 여성복 가게, 료칸(旅館: 일본 전통 여관)들이 문이 활짝 열린 채 버려져 있다. 맘만 먹으면 누구라도 들어가서 그 안의 물건들을 들고 나와도 될 법했지만 주변에 사람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오다카 기차역 앞에 택시 한 대가 서 있었다. 자동차 키가 시동장치에 꽂힌 채였다. 멀리 쓰나미가 휩쓸고 간 해변도로가 눈에 들어왔다. 진흙 속에 얼굴이 파묻힌 채 썩어가는 시신 한 구 옆에 핑크색 깃발이 꽂혀 있었다. 근처의 허물어진 편의점 안에서는 한 여성의 녹음된 목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고객님, 보너스 포인트를 적립하세요”라고 외치는 명랑한 목소리가 마치 유령 고객들을 유인하는 듯했다. (납을 두른 방호복이나 다른 어떤 보호장구도 착용하지 않은 채 이 지역에 들어선 건 꽤 무모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방사능의 대기 유출이 억제되고 있으며, 계속해서 부는 북풍이 대기 중의 방사능 오염 물질을 후쿠시마 쪽으로 밀어내고 있다는 보도를 보고 어느 정도 안심이 됐다.)

오다카에 도착한 지 15분쯤 지나서야 처음으로 사람을 만났다. 그곳에서 수퍼마켓을 운영하던 후루우치 에지(59)였다. 작은 키의 후루우치는 파란 운동복 차림에 하얀 방독면을 썼다. 그는 지진 발생 직후 이재민 대피소에서 지내다 여동생(고와타 마사코)과 함께 오다카에서 약 300㎞ 떨어진 ‘완충지대’ 내의 하라마치(原町)로 거처를 옮겼다. 하지만 그들은 먹을거리가 부족했다. 현금이 떨어졌는데 은행은 문을 닫았고, 현금자동인출기는 작동을 멈췄다. 후루우치는 여동생과 함께 오다카에 들러 자신의 수퍼마켓에서 쓸 만한 물건들을 가져오기로 했다.

후루우치는 그 전날 밤 늦게까지 TV 뉴스를 시청했다. 고조되는 핵위기 관련 보도와 시미즈 마사타카((淸水正孝) 도쿄전력(사고 원자로의 운영회사) 사장의 입원 소식에 특히 관심이 쏠렸다. 시미즈는 방사능 유출에 신속히 대응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거센 비난을 받아 왔다.

“(이곳에 온 것이) 위험한 행동인 줄 안다”고 후루우치는 말했다. “하지만 바람이 북쪽에서 후쿠시마 쪽으로 불고 있고 오래 머물진 않을 생각이다.” 그는 휴대전화가 울리자 깜짝 놀라면서 얼굴이 밝아졌다(최근 이 지역에선 전화 서비스와 전력 공급이 고르지 않았다). 그의 여동생이 수퍼마켓 안에서 건 전화였다. 그녀는 오빠에게 “어서 자동차에 짐을 싣고 이곳을 빠져나가자”고 말했다. 후루우치는 여동생이 있는 어두운 창고 쪽으로 갔다. 그리고 재빨리 차(茶)와 비스킷, 고래고기 통조림, 오렌지 넥타, 캔 커피, 가공 치즈 스프레드, 마가린, 달걀 등을 쇼핑백과 플라스틱 박스 안에 쓸어 담았다. 대부분 유통기한이 지난 지 오래된 식품이었다. 고와타는 “이곳은 대기 중 방사능 수치가 높다”며 나를 만나기 전엔 “사람이라곤 한 명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내가 그녀에게 식품이 방사능에 오염됐을지 모르는데 걱정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걱정되지만 먹을 것이 부족해 별 도리가 없다”고 말했다.

고와타는 짐을 다 싸고 난 뒤 마지막으로 수퍼마켓 안을 한 번 둘러봤다. 지진이 일어나자마자 이곳에서 빠져나간 뒤 처음 와본 참이었다. 그녀는 코를 찌르는 악취에 몸을 움찔했다. “이 지역은 지난 3주 동안 정전됐다”고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대합 조개가 든 양동이와 썩은 생선이 가득한 진열장을 가리켰다. 그녀의 오빠도 엉망진창이 된 가게 안을 돌아본 뒤 다시 황량한 거리로 나가서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는 “사람들이 다시 이곳에서 살고 싶어하지는 않을 듯하다”고 말했다.

고와타는 그때 갑자기 와타나베 부인의 소식을 떠올렸다. 암을 앓고 있는 이웃 할머니인데 소개령을 어기고 아직도 오다카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스바루 승용차에 모밀국수와 세제 등을 싣고 서둘러 마을 변두리 쪽으로 달렸다. 갈색 타일로 지붕을 얹은 2층짜리 시멘트 가옥은 창문마다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고와타는 현관 문을 살짝 두드렸다.

“요리코짱?” 그녀가 불렀다.

“마사코?” 안에서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계셨네요!” 고와타가 소리쳤다.

문이 열리더니 민머리에 베이지색 털모자를 쓴 할머니가 다리를 절름거리며 나왔다. “내가 아프거든.” 할머니가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여길 떠날 수 없어.” 할머니의 남편이 문가로 나왔다. 색깔 있는 안경을 쓰고 암적색 스웨터를 입은 마른 체구의 70대 노인이었다. 할아버지는 지난 1월부터 할머니의 건강이 악화됐다고 말했다. 메스꺼움 등 약의 부작용 때문에 할머니를 다른 곳으로 옮기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서 노부부는 오다카에 남아 위기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기로 결심했다. 오다카 주민 중 아직까지 그곳에 남아 있는 사람은 와타나베 부부를 포함해 6명밖에 안 된다. 할아버지는 그동안 상황이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 동네에는 전기와 수돗물이 여전히 공급되기 때문에 “더운 물 목욕을 할 수 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1주일에 두 번씩 자동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소마(相馬)시 시장에 가서 병에 든 생수와 다른 생필품을 사 왔다. “뉴스를 보니 사태가 수습돼 가는 듯했다”고 할아버지는 말했다. “미나미소마시에 가서 방사능 검사를 받았는데 방사능 수준이 그다지 높지 않았다. 게다가 대피소에 가기보다는 집에 있는 편이 낫다. 대피소는 너무 번잡하다.” 경찰이 할아버지 집을 두 차례 찾아와 대피하라고 말했지만 노부부의 사정을 들은 뒤엔 “알겠다”며 집에 그냥 남도록 했다. 사실 보건 관리와 과학자들의 경고를 무시하고 ‘출입금지 구역’에 눌러앉기로 한 와타나베 할아버지의 행동은 위험천만하다.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움직이지 못하니 어쩔 도리가 없다는 식으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려는 듯 보였다.

3월 31일 밤 후쿠시마에서 남쪽으로 2400㎞ 떨어진 도쿄에서는 이번 재앙에 따른 영향이 미미해지기 시작한 듯 보였다. 전력 부족으로 신주쿠(新宿), 아키하바라(秋葉原) 등 상업지구의 조명이 어두워졌고, 인구밀집 지역의 교통이 원활해지긴 했다. 휘발유 공급 부족 사태에 대한 우려와 일본 사회에 널리 퍼진 불안감을 반영한다. 또 병에 든 생수와 포장식품 수요가 치솟아 많은 편의점의 진열대가 여전히 텅텅 비다시피 한다. 시부야(澁谷) 교차로에 설치된 대형 TV 스크린에선 24시간 내내 재난 상황 보도가 나온다. 하지만 ‘완충지대’와 ‘출입금지 구역’에서 느껴지는 으스스하고 버려진 듯한 분위기와는 대조적으로 도쿄는 활기를 되찾고 정상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지진 직후엔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분위기가 압도적이었지만 이제 좀 더 어두운 감정이 표면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출입금지 구역’에서 만난 한 공장주는 후쿠시마현(특히 ‘완충지대’와 ‘출입금지 구역’)에서 소개돼 도쿄 등 타 도시의 대피소로 보내진 어린이들이 새로 들어간 초등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며 냉대 받는다고 말했다. 다른 어린이들은 이들을 피하면서 “방사능에 오염됐다”고 손가락질을 한다. 그는 자신의 두 살 난 딸도 그런 상황에 처할까 걱정했다. “이재민은 물질적으로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도움이 필요하다”고 그는 말했다. 일본이 새로운 핵 비극을 맞으면서 ‘히바쿠샤’의 고통은 여전히 이 땅을 무겁게 짓누른다.

[With CHIAKI KITADA

번역 정경희]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종부세 내는 사람 4.8만명 늘어난 이유 살펴봤더니…’수·다·고’가 대부분

2인도서 ‘일하기 좋은 기업’ 2년 연속 선정된 LG전자

3‘쉬다가 쇼핑하는 곳’ 전략 통했다…이마트의 진화

4‘성매매 무혐의’ 최민환, “율희 일방적 주장" 일파만파 퍼져...

5‘혼외자 논란’ 닷새 만에 '정우성' 고개 숙였다

6내년 '연봉 3배' 콜?...브레이크 없는 인재 채용 '치킨 게임'

7 ‘유퀴즈’ 출격 고현정, 드뮤어룩 완성한 ‘이 브랜드’

8이커머스에 반격…기대 이상 성과 낸 ‘스타필드 마켓’ 비결은

9‘1400원 强달러’에 달러보험 눈길 가네…장·단점은?

실시간 뉴스

1종부세 내는 사람 4.8만명 늘어난 이유 살펴봤더니…’수·다·고’가 대부분

2인도서 ‘일하기 좋은 기업’ 2년 연속 선정된 LG전자

3‘쉬다가 쇼핑하는 곳’ 전략 통했다…이마트의 진화

4‘성매매 무혐의’ 최민환, “율희 일방적 주장" 일파만파 퍼져...

5‘혼외자 논란’ 닷새 만에 '정우성' 고개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