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F(프로젝트파이낸싱) 부실 배드뱅크로 해결 바람직'
'PF(프로젝트파이낸싱) 부실 배드뱅크로 해결 바람직'
‘대책반장’이 또 바빠졌다. 한쪽 불길이 좀 잠잠해지나 싶더니 이번엔 또 다른 쪽에서 경고등이 울린다. 처음에 난 불이 완전히 꺼지지 않은 채 옆으로 옮겨붙고 있는 모양새다.
1월 취임한 ‘영원한 대책반장’ 김석동 금융위원장 이야기다. 부실 저축은행 처리를 위해 부산이다 목포다, 직접 날아갔던 게 겨우 두 달 전. 이번엔 PF(프로젝트파이낸싱) 탓에 건설사들이 위태위태하다. 잠시도 숨 돌릴 틈이 없는 상황이다.
PF 부실 문제야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최근 위기감이 고조된 건 LIG건설이 3월에 전격적으로 법정관리를 신청하면서다. 모그룹이 탄탄한 대기업 계열 건설사조차 버티지 못한다는 사실이 시장에 충격을 더했다. 건설사 부실의 도미노가 시작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은행권을 중심으로 ‘대기업의 꼬리 자르기’에 대한 비난 여론이 일었지만 동시에 ‘금융사의 PF 옥죄기’가 문제라는 건설업계의 주장도 힘을 얻었다.
“제2의 LIG건설 막아라” 이명박 대통령도 한마디 했다. 3월 22일 국무회의에서 김석동 위원장에게 제2의 LIG건설이 발생하지 않도록 종합적으로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이런 지시에는 저축은행의 부실 문제가 건설사 부실 도미노로 이어지는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가 담겨 있었다. 재무상황이 나빠진 저축은행이 PF 대출을 줄이면서 건설사 경영난을 부추기고, 이것이 다시 금융권의 부실을 확대 재생산하는 상황을 미리 차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금융위원회는 이 대통령의 말이 떨어진 뒤 곧바로 전국 PF사업장에 대한 일제 점검에 나선다는 계획을 밝혔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4월 12일 이번엔 삼부토건이 갑작스레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이 소식을 접한 김 위원장은 당혹스러움을 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려했던 ‘제2의 LIG건설’이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부터 김 위원장은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법정관리 신청에 대한 법원의 최종 결정이 내려지기 전에 ‘좋은 답’을 찾을 것으로 기대한다”며 대주단과 삼부토건을 압박했다. 금융회사가 지원을 통해 삼부토건이 법정관리를 철회하도록 하라는 주문이었다. 사실상의 개입이 시작된 것이다.
이것만으로 충분치 않다고 여긴 듯하다. 삼부토건과 대주단의 협상이 지지부진하자 그는 더 센 카드를 내놨다. 금융지주사 회장, 그것도 5대 금융지주사 회장 전부를 소집했다. 어윤대 KB금융지주 회장, 이팔성 우리금융지주 회장, 김승유 하나금융지주 회장, 강만수 산은지주 회장, 한동우 신한금융 회장. 이들 5명 중 4명이 이명박 대통령의 측근으로 분류되는 실세들이다. 게다가 행시 8회 출신인 강만수 회장은 재무부 시절 김석동 위원장(행시 23회)을 아꼈던 한참 선배다. 그런 회장들에게 “4월 18일 오전 8시 조찬간담회에 참석해달
라”고 하루 전 오전에 통보했다.
4월 18일 오전 서울 명동 은행회관. 조찬간담회가 열리는 방은 50여 명의 취재진이 몰려 발 디딜 틈이 없었다. 5명의 금융지주사 회장은 이미 도착해 일렬로 서 있었고, 8시를 맞춰 권혁세 금융감독원장이, 뒤이어 김석동 금융위원장이 잇따라 도착했다. 악수를 한 뒤 김 위원장이 “이제 앉읍시다”라고 하자 이팔성 회장이 김 위원장에게 먼저 앉을 것을 권했다.
김 위원장은 모두 발언에서부터 치고 나갔다. “건설사 PF에 대한 금융권 지원이 아직 소극적이다. 금융권이 건설사의 경영에 어려움을 보태고 있다.” 회장들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조찬간담회는 예상보다 긴 1시간50분 동안 진행됐다. 이 자리에서 김 위원장은 회장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고 한다. “정부가 PF사업장 상황을 전면 점검 중이다. 금융회사도 PF사업장 중 전망 있는 곳이 일시적인 자금난으로 어렵지 않도록 적극 지원해서 조기 정상화해 달라.” 살릴 수 있는 PF사업장은 가급적 살려 달라는 주문이었다.
이에 일부 지주사 회장은 동조했다. 이팔성 우리금융 회장과 김승유 하나금융 회장 등이 “사업성 있는 PF 대출까지 한꺼번에 회수하면 건설업계 타격이 클 수밖에 없으니 서로 자제할 필요가 있다”고 화답했다. 특히 강만수 회장은 적극 나서서 금융당국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주기도 했다. “PF 대란이 일어난 원인이 무엇인가. 저축은행들이 카드사들에 영업기반을 빼앗기니까 눈을 PF 대출로 돌리면서 일어난 것 아니냐”라며 쓴소리를 했다. 다른 지주사 회장들이 당혹스러웠을 정도로 평소 생각을 거침없이 얘기했다는 후문이다. 겉으로는 후배에게 불려가는 모양새이긴 했지만, 강 회장은 김 위원장의 든든한 지원이었다.
간담회가 끝난 뒤 지주사 회장들의 표정은 썩 좋지는 않았다. 김승유 회장과 어윤대 회장만 멋쩍은 미소를 띠었을 뿐 다른 회장들은 굳은 얼굴로 간담회장을 빠져나왔다. 그래도 김 위원장의 존재감이 어느 정도는 효력을 발휘하는 분위기다. 지주 회장 소집 다음날인 19일 산업은행은 일부 BBB급 건설사의 회사채를 인수했다. 먼저 나서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였다. 삼부토건의 헌인마을 PF 대주단인 우리은행 역시 이순우 행장이 인터뷰에 나서 “삼부토건을 살리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겠다”고 밝히는 등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5개 금융지주사 회장 불러 모아 김석동 위원장은 또 다른 카드도 만지작거리고 있다. PF 배드뱅크 설립이 그것이다. 5대 시중은행을 중심으로 5000억~1조원가량을 출자해서 부실 PF를 사들여 정리하는 배드뱅크를 만들자는 안이다. 4월 18일 조찬간담회에서 권혁세 금감원장이 이 방안에 대해 언급했을 때만 해도 금융위는 “논의되고 있는 수십 가지 방안 중 하나”라며 의미를 축소했다. 3월 취임식에서 ‘금융안정의 종결자’가 되겠다고 선언한 권혁세 원장이 존재감 과시를 위해 설익은 안을 너무 일찍 공개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배드뱅크 설립이 PF 부실을 털어내기 위한 효과적인 방안이라는 점에서 김석동 위원장도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을 거라는 관측이 있다. 실제 김 위원장은 4월 20~21일 열린 ‘저축은행 부실화 원인규명 및 대책마련을 위한 청문회’에서 “초기 검토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면서도 “PF 배드뱅크는 현재로서 검토한 대안 중 가장 바람직하다”고 밝히기도 했다.
PF 배드뱅크를 본격적으로 추진한다면 적잖은 논란에 휩싸일 전망이다. 이미 은행권에서는 “또 은행 팔 비틀기냐”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이미 8개 저축은행 영업정지, 저축은행 특별계정 설치로 저축은행 사태의 돌파구를 찾았던 김 위원장이다. 이번 건설사 PF 부실사태로 대책반장으로서의 능력이 또다시 시험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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