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반성장 한다며 실패한 정책 꺼내
동반성장 한다며 실패한 정책 꺼내
“대기업이 중소기업의 고유 영역을 침범해서는 안 된다. 산업정책을 원점에서 재검토하라.”
동반위가 확정한 가이드라인은 제도 운영 효율성, 중소기업 적합성, 부정적 효과 방지, 중소기업 경쟁력 등 4개 항목, 10개 세부 사항을 기준으로 한다(표 참조). 시장 규모가 1000억~1조5000억원인 업종 가운데 적합 품목을 고르기로 했던 기존 방침은 철회했다. 동반위 정종태 사무총장은 “사전에 컷오프 기준을 만들어 놓고 품목을 선정하는 게 부적절하다는 다수의 의견이 있었다”고 말했다. 만약 시장 규모 1000억~1조5000억원이 대기업을 제한하는 가이드라인으로 확정됐다면 에어컨, 디지털카메라, 김치냉장고, 로봇, 남성화장품, 햄버거, 커피믹스, 된장·고추장 등 장류, 두부, 초콜릿, 라면, 분유 등이 중소기업 품목으로 분류될 수 있었다. 전경련 관계자는 “국내 제조업에서 시장 규모 1조5000억원을 초과하는 품목은 8%가 안 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동반위 측은 “논란이 된 시장 규모 제한을 없애는 대신 업종·품목별로 시장 규모를 고려해 선정 때 가중치를 줄 것”이라고 말했다.
폐지했던 중소기업 고유업종 부활논란은 계속될 전망이다. 동반위가 제시한 기준이 모호할 뿐 아니라 고려해야 할 사안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일단 대기업 범위부터 문제다. 근로자 300명이 넘는 모든 기업을 대기업으로 볼 것인지, 공정거래위원회가 지정하는 상호출자제한기업을 대기업으로 볼 것인지 애매하다. 수출·내수시장은 어떻게 구분하고, 대기업이 중소기업에 맡기는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 품목은 어떻게 할 것인지 정부는 뾰족한 대안을 내놓지 못했다. 또한 세부 가이드라인으로 제시된 소비자 만족도, 협력사 피해, 중소기업 경쟁력 수준 등은 어떻게 평가해 점수를 매길 수 있느냐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시장 규모에 따라 가중치를 달리한다는 발상 역시 객관성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전경련 관계자는 “중소기업 사업 영역이라는 개념 자체가 주관적이고 모호하다”고 말했다.
대기업이 중소기업 영역을 침범했다고 주장하려면 명확한 기준과 근거가 있어야 한다. ‘여론이 그렇다’는 식이면 곤란하다. 과거 우리나라에는 이런 기준과 근거가 분명했다. 1979년 정부는 중소기업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중소기업 고유업종 제도’를 만들었다. 처음 23개 업종으로 시작한 이 제도는 1989년 237개로 늘었다. 정부가 지정한 업종에 진출한 대기업은 벌금을 물었다.
이 제도는 1994년 이후 점차 축소됐다. 정부의 과도한 보호로 중소기업 고유업종의 경쟁력이 낮고 시장 개방 추세에도 맞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다. 고유업종은 1994년 179개로 줄었고 2001년 45개로 축소된 후 2006년 완전 폐지됐다.
문제는 동반위가 들고 나온 ‘중소기업 적합업종 제도’는 캐비닛에 있던 낡은 제도를 다시 꺼낸 것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동반위가 내놓은 공청회 자료에는 과거 중소기업 고유업종 제도가 왜 폐지됐는지 배경 설명이 나온다. ‘사회, 경제의 급속한 변화 따라 이분적 구분이 어려움’ ‘중견기업으로 성장하기보다 다수의 중소 자회사를 설립해 운영’ ‘기술·품질 경쟁보다 가격 경쟁에 주력해 기술·품질 향상 미흡’ ‘외국기업 시장 참여 및 외국제품 수입으로 국내시장 잠식’ ‘지정 전 진입한 대기업은 허용하고 신규 대기업 참여를 제한해 기존 대기업의 독과점 시장 성과 보장하는 부작용’.
동반위가 이번에 내놓은 정책 역시 똑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이전 정부에서 장관을 지낸 한 대학교수는 “대통령이 대·중소기업 정책을 원점에서 검토하라니까 진짜 원점으로 돌아가 폐기된 정책을 다시 들고 나온 것”이라며 “전형적인 관료주의이자 탁상행정”이라고 말했다. 유병규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본부장은 “이번 정책에는 어떻게 중소기업 경쟁력과 선진화를 이끌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없다”고 말했다.
동반위는 “5월 한 달간 중소기업으로부터 적합업종·품목 신청을 받아 검토한 뒤 8월부터 단계적으로 대기업 진입 규제 업종을 발표할 것”이라고 밝혔다. 중소기업청·중소기업중앙회·중소기업 관련 산업협회 등의 의견을 종합해 보면 중소기업이 바라는 업종·품목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두부, 장류, 햄·베이컨, 데스크톱PC, 재생 타이어, 전선, 학생복, 레미콘, 골재, 금형, 주조, 학원, 와인 유통, 타월, 플라스틱 용기, 노트, 국수, 옥수수기름, 양말, 장갑, 탄산가스 제조 등이 포함된다. 대기업이 이미 진출해 있는 분야가 많다. ‘동반성장’은커녕 정부가 붙여놓은 밥그릇 싸움에 대·중소기업이 등을 돌릴 판이다.
■ 20대 그룹 신생 계열사 조사해 보니
기존 사업 연관성 86%… 중소·벤처 인수 많아
정부의 ‘대기업 때리기’가 거세다. 주로 대기업 계열사가 타깃이다. 4월 초 공정거래위원회는 자산 5조원 이상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의 계열사가 1554개로 전년 대비 290개 증가했다고 발표했다. 발표 후 ‘대기업 문어발 확장’ ‘중소기업 영역 무차별 침투’ 등의 여론몰이가 시작됐다. 정운찬 동반성장위원장은 4월 18일 한 대기업과 협력사의 ‘동반성장 협약식’ 자리에서 “대기업의 중소기업 사업영역 진출이 심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대기업 계열사의 중소기업 영역 무차별 침투’는 어디까지 사실일까?
이코노미스트는 지난해 국내 20대 그룹(자산 기준)에 편입된 신생 계열사 139곳이 어떤 업종에 진출했는지 조사했다. M&A(인수합병)나 지분 취득으로 계열사에 편입된 회사의 기존 자회사는 조사에서 제외했다.
신생 계열사의 진출 영역은 다양했다. 업종을 세분류하면 58종에 달했다. 소프트웨어·석유화학·폐기물 관련(각 8곳)이 가장 많았다. 물류, 금융·보험, 부동산개발(각 7곳)이 뒤를 이었다. 그 외에는 반도체 장비, 바이오·헬스, 식료품 및 화장품 유통, 통신, 의류, 신재생에너지, 조선·선박, 방송·미디어 등 다양하게 분포됐다. 제조업 비율은 27%인 37곳이었다.
20대 그룹 1년 차 계열사 중 기존 사업과 연관성이 있는 곳은 86%인 120곳이었다. ‘대기업이 본업과 무관한 업종에 무차별 진출한다’는 주장과는 다른 결과다. 또한 각 그룹사가 ‘신성장동력’으로 키우고 있거나 진출을 준비하는 분야와 관련된 계열사는 42곳이었다. 바이오·헬스케어 진출을 서두르는 삼성그룹이 인수한 메디슨, 태양광 진출에 투자를 늘리고 있는 현대중공업이 프랑스 생고방그룹과 합작해 만든 현대아반시스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신사업 진출이나 수직계열화를 위해 기술력을 확보한 중소·벤처기업을 인수하는 사례가 많았다. 139곳 중 47%인 65곳이 대기업 옷으로 갈아입었다. 제조·설비 엔지니어링 업체인 미라콤아이앤씨(삼성), 전자종이 분야 기술벤처인 이미지앤머터리얼스(LG), 도시광산 기술기업인 나인디지트(포스코), 희소금속 추출 전문기업인 다우메탈(GS), 무인항공기 개발 회사인 마이크로에어로봇(한화), 선박 블록을 제조하는 혁신기업(STX), 로봇 전문기업인 다사로봇(동부) 등이다. 일부에서는 이를 두고 ‘하도급 업체를 대기업이 흡수한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선진국에서는 기업을 키워 대형 기업에 매각하는 경우가 흔하고 당연하게 여긴다. 또한 대기업은 R&D(연구개발)의 상당 부분을 소규모 혁신기업을 인수하거나 지분을 투자해 해결하는 경향이 많다. 설령 하청업체를 인수해도 부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SK텔레콤이 좋은 예다. 이 회사는 지난해 아웃소싱을 주던 고객센터 3곳을 계열사로 편입하면서 8000여 명을 모두 정규직으로 채용했다.
김태윤 기자 pin2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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