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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문화공간] 도시에 떨어진 수수께끼 상자

[기업 문화공간] 도시에 떨어진 수수께끼 상자


‘문화 경영’이 화두다. 기업이 자사 브랜드에 문화적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이를 통해 소비자와의 거리를 좁히면서 브랜드 이미지를 높이고 있다. 여러 기업이 문화 경영 차원에서 개성 있는 공간을 만들어 운영한다. 기업이 소비자와 문화 사이에 놓인 징검다리 같은 공간을 소개한다. <편집자>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위치한 ‘크링(kring)’. 밤에는 건물 전체에 화려한 조명을 밝힌다.

서울 강남구 대치동 코엑스몰을 나서서 조금만 걷다 보면 기이하게 생긴 거대한 건물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내부에 들어서면 의외로 탁 트인 공간에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복합문화공간 크링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는 일반적인 인상이다.

금호건설이 이곳을 운영하고 있음을 단번에 파악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건물 안팎 어디에도 금호건설을 알리는 간판은 눈에 띄지 않는다. 건설사에서 운영하는 다른 문화공간과 달리 이름에도 기업명을 포함하지 않았다. 크링은 네덜란드어로 원(圓)이라는 뜻. 크링의 전광현 실장은 이를 두고 “자칫 기업에서 부수적으로 운영하는 홍보성 공간으로 인지되는 걸 막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문화의 크로스 오버가 일어나는 공간기업에서 운영하는 기존 문화 공간은 대부분 미술이나 공연, 음악회 등 특정 분야를 전문적으로 취급한다. 그러나 크링은 미술, 음악, 패션, 영화 등 장르에 제한을 두지 않고 다양한 행사를 마련하는 복합문화공간이다. 크링은 ‘문화의 크로스 오버를 경험할 수 있는 유연한 공간’을 자처한다.

이로써 얻게 되는 효과가 있다. 국내 주요 사립 미술관 중엔 기업 회장의 부인이나 자녀 혹은 친인척이 운영하면서 시작된 곳이 많다. 아무리 대중을 위한 행사를 주최한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상류층에 한정된 엘리트 문화의 중심지로 인식돼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크링은 각계각층의 문화 행사를 기획하면서 자연히 고급문화와 대중문화를 향유하는 사람들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게다가 입지가 좋아 하루 평균 200명 정도의 관객이 전시장을 찾는다. 미술관에 대한 심리적 장벽과 선입견을 깨고 의미 있는 변화를 일으킨 셈이다.

건축사무소 ‘운생동’에서 설계한 크링의 기본 컨셉트는 건물 이름의 뜻이기도 한 ‘원’이다. 동심원이 입체적으로 반복되고 있는 외관은 금방이라도 음악이 울려 퍼질 듯한 거대 스피커를 연상시킨다. 건축 설계와 운영 취지의 기본 컨셉트는 ‘울림’이다.

이 컨셉트는 금호건설의 브랜드명 ‘어울림’에서 나왔다. 소리가 울려 퍼지듯 시민의 삶에 울림을 주고 소통하겠다는 취지다.

크링은 외관이 파격적이다. 밤에는 LED 조명이 밝혀지면서 환상적인 이미지를 내뿜는다. 크링의 튀는 모습은 개관 초기엔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건축이라기보다 조각에 가깝다”는 말이 나왔다. 지나치게 실험적인 시도로 시민들이 낯설어할 것이라는 목소리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건물 자체를 구경하러 오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호의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크링에는 건축 관련 지망생이나 사진 동호회 사람들이 자주 방문하고, 방송이나 CF 촬영지로도 꾸준히 등장한다.

크링에서는 정기적으로 영화를 상영하고 예술 작품을 전시한다. 크링의 내부 시설을 이용하는 시민들의 모습.

문화공간은 기업이 얻은 이득을 사회로 환원하는 하나의 방편이 된다. 금호건설은 크링을 만들기 전까지는 협찬이나 후원 등 단발적인 방식으로 사회에 기여했다. 그러나 이제는 크링을 통해 문화적 서비스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동시에 도움이 필요한 문화계 곳곳에 시민들의 후원을 연결시켜주는 창구 역할을 하게 됐다. 대표적인 것이 영화 입장료와 커피 판매수익이다. 얼마 전 모금된 입장료를 ‘아시아나 국제단편영화제’와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에 전달했다. 커피 판매수익은 이용자 자율 기부 형식으로 홀트아동복지회, 한국시각장애인예술협회 등에 기부됐다.



‘삶에 울림 주고 소통’ 취지

크링의 내부 전경.
이 전위적인 공간을 통해 금호건설은 시민에게 쉼터를 제공하는 한편 미래 문화의 비전을 간접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크링에서는 정기적으로 미술작품을 전시하고 영화를 상영한다. 그러나 2층의 넓은 공간을 활용하는 이벤트들은 고급 브랜드와 대기업 관련 행사가 대부분이다. 서울시가 주관한 ‘서울시 패션위크’를 비롯해 고급 패션이나 뷰티 브랜드의 행사, 고급 승용차의 신차 발표회가 여기서 열렸다. 시민에게 공간을 개방함으로써 사회환원의 기능을 실천하되 누구나 부러워할 이상향을 제시하면서 앞서 나가는 기업 이미지를 구축하겠다는 계산이다.

크링에 ‘금호’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3층에는 미래의 주거 트렌드 및 명품 라이프스타일을 제시하는 모델하우스가 마련돼 있다. 현재는 서울 한남동 단국대 부지에 지어지고 있는 ‘어울림’ 아파트의 모델하우스를 겸해 사용 중이다. 이곳은 이 아파트의 계약자에 한해 입장이 가능하다.

복합문화공간으로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또 다른 예가 KT&G의 ‘상상마당’이다. 그러나 두 곳의 운영 형태는 정반대다. 기업이 개발하고자 하는 ‘잠재 고객’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에서 결정적 차이점이 생긴다. KT&G의 잠재 고객은 10~20대의 젊은 층이다. 상상마당이 젊음의 거리 홍익대에 기반을 두고 비주류 문화나 소규모 단체 등 젊은 층의 문화를 후원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반면 크링은 대치동을 기반으로 한 주부층을 겨냥한다. 크링이 복합문화공간으로서 다양한 서비스를 하면서도 고급 취향과 대중문화 사이에서 일정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이들의 취향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금호건설은 2008년 크링의 론칭을 앞둔 2007년, 자사의 방송광고에서 ‘건축은 패션이다’라는 카피와 함께 크링의 외관을 공개했다. 이 건물은 도시 한복판에 떨어진 매혹적인 수수께끼 같다. 기묘한 외관을 열고 들어가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다. 크링은 건축과 주거문화에 대한 트렌드를 선도하려는 금호건설의 비전을 감춘 티저(teaser) 광고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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