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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가 만화를 만났을 때

셰익스피어가 만화를 만났을 때


예술영화 감독 케네스 브래너가 수퍼히어로 블록버스터의 지휘봉을 잡았다
`토르`
천둥의 신

누구나 이런 의문을 품을 만하다. 케네스 브래너가 ‘토르: 천둥의 신’을 만들다니 도대체 무슨 일일까? ‘토르’는 바이킹 전설과 고대판 배트맨을 뒤섞은 마블 스튜디오의 1억5000만 달러짜리 수퍼히어로 호화판 영화다. 브래너는 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에서 연기하고 셰익스피어 극을 재해석한 영화를 만들어 이름을 떨친 인물이 아니던가? ‘햄릿’과 ‘헨리 5세’의 주인공 겸 감독을 동시에 맡은 사람이 어떻게 얼음 레이저로 상대방을 얼어붙게 만드는 만화책 영웅이 나오는 여름철 블록버스터를 만든단 말인가?

만약 셰익스피어가 할리우드에서 일한다면 이렇게 물었을 법하다. “왜 브래너 같은 이가 ‘묠니르’라는 거대한 망치를 든 천둥의 신 이야기를 연출할까? 창피한 줄 알아야지!” 하지만 이유가 있었다. 브래너는 1960년대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 자라면서 다른 어떤 미국 문화보다 마블사의 만화책 ‘토르’에 푹 빠졌다. 그는 LA의 폭스 영화 스튜디오 벤치에 앉아 차를 홀짝이며 “이 전설의 영웅들은 지구의 산악지대와 우주를 누빈다”고 말했다. “바로 그 기이한 넘나들기에 푹 빠졌다.”

결국 만화책과 고전문학의 개인적 관심이 겹치는 공통집합 때문에 브래너는 자신의 내면에서 마이클 베이 감독(‘트랜스포머’) 같은 자질을 끌어냈다. 브래너는 2년 동안 대본작가들과 논의하면서 이 영화에서 ‘형제 간 경쟁’이라는 플롯을 발전시켰다. 토르(호주 출신의 신인 배우 크리스 헴스워스)와 동생 로키(톰 히들스턴)은 아버지 오딘(신의 나라 아스가르드를 다스리는 왕으로 앤서니 홉킨스가 맡았다)의 사랑을 독차지하려고 다툰다. 왕위를 둘러싼 권력투쟁을 벌이는 와중에 토르는 거침없는 성급함(특히 아스가르드인들의 숙적인 ‘서리 거인들’을 자극해 신들의 전쟁을 일으키는 죄를 저지른다)으로 지구로 쫓겨난다. 모든 힘을 잃고 평범한 인간이 된 토르는 여자 천체물리학자(내털리 포트먼)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브래너는 이렇게 설명했다. “전형적이고 신화적인 이상이다. 보통사람들과 함께 하는 영웅 말이다. 진정한 어른이 되면서 겪는 성장통, 탕자 이야기, 오만을 버리고 겸손을 수용하는 여정을 담았다. 그런 고전적 구조가 현대와 전통 사이의 영원하며 보이지 않는 연결을 의미한다.”

너무 거창하게 말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브래너는 이 작품을 만들면서 겪은 어려움과 두려움으로 방향을 틀었다. “진지함과 재미를 어떻게 조화시킬까? 어떻게 하면 피상적으로 빠지지 않을까? 난해한 예술영화의 요소를 도입하지 않고 어떻게 진지함을 표현할까?”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브래너가 여름철 블록버스터 영화의 메가폰을 잡았다는 사실은 할리우드가 돈 되는 만화책 장르를 선택할 때 늘 써먹는 전략을 떠올리게 한다. 근년 들어 제작사들은 수퍼히어로 작품을 예술영화 감독에게 곧잘 맡겼다. 인상주의적 제작과 대중적 호소력을 융합하려는 의도다. 예를 들어 ‘와호장룡’의 감독 이안은 2003년 ‘헐크’를 만들었다(하지만 흥행에 실패했다). 한편 ‘메멘토’의 감독 크리스토퍼 놀런은 ‘배트맨 비긴즈’와 ‘다크 나이트’로 고탐 시티 영웅 시리즈를 부활시켰다(두 작품 합해 13억7000만 달러의 흥행 수입을 올렸다).

이런 전략은 특히 마블 스튜디오의 장기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아이언맨’으로 재기시킨 영화사다. 마블의 제작 총책임자 케빈 페이지는 다른 감독 대신 브래너가 ‘토르’를 맡게 된 이유는 셰익스피어 작품의 재해석 경험 때문이라고 말했다. “자칫하면 이 작품은 고등학교 영어시간처럼 딱딱해지기 쉽다. 하지만 브래너가 생기를 불어넣었다. …그는 토르와 로키, 오딘을 셰익스피어를 영화화할 때와 같은 식으로 화면에 옮겼다. 화려한 의상, 특수효과, 우주여행 속에서도 그들을 인간답게 표현했다.”

영화제작사 웨인스타인 컴퍼니의 공동회장인 하비 웨인스타인은 브래너를 둘러싼 흔한 오해를 지적했다(웨인스타인은 지난해 ‘마이 위크 위드 마릴린’을 만들면서 그 작품에서 연기한 브래너와 가까워졌다). “사람들은 브래너를 보면 그가 오랫동안 셰익스피어 작품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에 벨파스트 출신이라는 사실을 까먹는다”고 웨인스타인이 말했다. 현재 그는 브래너의 차기 감독 작품으로 역사적 스포츠 영화 ‘보이즈 인 더 보트’를 제작 중이다. “브래너는 부잣집에서 유복하게 자라지 않았다. 그는 서민을 이해하는 남자다. 그의 셰익스피어는 서민적인 작품이다.”

최근 어느 날 아침 브래너는 어두운 편집실에 웅크리고 앉아 ‘토르’의 완성 작업에 몰두했다. 앞에 줄지어 놓인 디지털 모니터에는 컴퓨터로 생성된 ‘서리 거인’ 무리가 반복해서 비쳤다. 고대 스칸디나비아인 부족을 혼돈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차가운 악귀들이다. 브래너는 이 장면의 열여섯 프레임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심했다. 자르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였다.

브래너는 “이 영화는 호화롭고 거창한 박물관식 오락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아무리 할리우드에서 일하고 대형 영화를 만들어도 전혀 물리지 않는다. 현재 바로 이 순간을 즐기고 그 속에서 균형과 독창성을 찾고 싶다.”

번역 이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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