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URE STORY] 김영찬 골프존 사장
[FEATURE STORY] 김영찬 골프존 사장
‘골프는 치면 칠수록 인생을 생각하게 만들고, 인생은 보면 볼수록 골프를 떠오르게 한다.’ (헨리 롱허스트)지난 6월 17일 대전 유성구에 위치한 골프존 본사. 회색빛 제주석으로 마감한 3층 건물 외벽은 미술관 못지않게 세련된 자태를 뽐냈다. 입구 왼쪽엔 벤트그라스로 잘 정돈된 그린이 펼쳐져 있다. 고운 모래로 가득한 그린 옆 벙커에선 금방이라도 프로 골퍼가 샷을 끝내고 튀어나올 듯했다.
건물 입구에 들어서자 천장까지 훤히 뚫린 로비가 인상적이었다. 곳곳에 미술품이 가득해 갤러리를 방불케 했다. 로비를 가로지르자 한쪽 벽면에 설치된 골프 시뮬레이터 4대가 등장했다. 벙커와 러프를 경험할 수 있는 시뮬레이터부터, 벽면 속으로 공이 사라지는 커튼식 스크린 등 시중에서 볼 수 없는 최신식 스크린 골프 기계들이었다. 직원들은 무료로 스크린 골프를 즐기고 있었다.
김영찬 사장은 “골프존은 이 건물처럼 골프와 게임, IT와 문화가 어우러진 토털 골프문화 기업”이라며 입을 열었다.
‘골프에 나이란 없다. 의지만 있다면 몇 살에 시작해도 향상이 있다.’ (벤 호건)잘 다니던 삼성전자를 그만둔 1993년 김영찬 사장의 나이는 47세. 벤처기업을 하기엔 다소 늦었지만 월급쟁이로 만족하며 살고 싶진 않았다. 음성사서함 사업을 시작했지만 시장은 점점 선정적인 방향으로 흘렀고, 경쟁도 치열해졌다. 고민 끝에 생각한 것이 골프 시뮬레이터였다.
“평소 골프를 좋아했어요. 하지만 연습장에서 느끼는 골프와 필드에서 느끼는 골프가 너무 달랐죠. 연습장과 필드를 이어줄 만한 장치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결국 골프 시뮬레이터 개발에 나섰습니다.”
당시 골프 시뮬레이터는 고급 호텔 피트니스센터에나 몇 대 있는 정도였다. 주로 타구 분석용으로 쓰였다. 대당 가격이 1000만원 정도였지만 성능은 별로였다. 김 사장은 ‘제대로 기계를 만들어 실내 골프연습장에 공급하면 사업이 되겠다’고 판단했다.
김 사장은 2000년 5월 8일 ‘골프존’이란 사명으로 대덕연구단지에 사무실을 냈다. 당시 54세였다. 삼성 출신이, 50대에, 그것도 골프 시뮬레이터라는 낯선 아이템으로 창업한다고 나서자 주위에선 무모하다고 말렸다. 매출이 없는 상황에서 개발에만 매달리다 보니 말 그대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새로운 것을 만들다 보니 적합한 엔지니어를 찾기가 어려웠어요. 특히 센서·네트워크·그래픽 등 어려운 IT기술이 융합된 모델이다 보니 더 힘들었죠. 기껏 수소문해 찾으면 사기꾼이었어요. 그러다 마침 우리에게 맞는 엔지니어를 영입할 수 있었죠.”
회사를 설립하고 1년6개월 만에 만든 첫 제품은 국내 한 콘도가 구입했다. 제품을 내놓은 그해 10억원의 매출을 올린 골프존은 착실하게 시장을 넓혀나갔다. ‘전국 3000개의 실내 연습장에서 우리 제품을 한 대씩 사면 우리 가족과 직원 10명 정도는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2005년부터 상황이 바뀌었다.
‘골프 코스에 직선은 없다. 신은 반듯한 선 같은 것을 그은 일이 없다.’ (잭 니클라우스)
2005년부터 골프 시뮬레이터를 모아놓은 이른바 ‘스크린 골프장’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스크린 골프장’은 새로운 프랜차이즈 수익모델로 주목 받으면서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갑자기 시장이 성장하면서 덩달아 커진 것은 위기의식이었다.
“사업이 이처럼 빨리 발전하리라 예상하지 못했어요. 당시 강원도 강릉에 신규 개업하는 스크린 골프장을 찾았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주인에게 스크린 골프장은 심심풀이 소일거리가 아니라 전 재산을 건 일생일대의 사업이었죠. 만약 내가 못하겠다고 덮어버리면 어떻게 될까, 전국적으로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생기겠다는 생각이 들자 잠이 오지 않았어요.”
사업을 그만둘 순 없었다. 이미 직원들은 물론 가맹주, 협력회사로 파이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때 과거 삼성에서 근무하면서 교육받은 것들이 하나 둘씩 떠올랐다. “본격적인 사업을 하기에 앞서 직원들과 함께 우리 업(業)의 개념부터 정리했습니다. 사업영역과 경영비전, 조직문화에 대해서도 하나씩 논의했죠. 삼성에 있을 때 밥 먹듯이 연수 가서 논의했던 것이었습니다. 정작 삼성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제 사업을 하다 보니 그것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했습니다.”
‘나는 가끔 친한 사람들과 골프를 치지만, 그렇다고 그들과 절대 친하게 골프를 치진 않는다.’ (벤 호건)
김 사장이 설립 초기 직원들에게 제시한 회사의 비전은 단순 명료했다. ‘모든 사람이 골프를 즐기게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러자 직원들로부터 오프라인 골프가 가진 높은 진입장벽을 없앨 수 있는 다양한 방안이 쏟아졌다.
골프존은 센싱 기술과 이미지 기술을 높여 좀 더 실감나는 시스템을 내놓았고, 움직이는 스윙 플레이트를 적용해 실제 필드와 같은 다양한 샷이 가능하도록 했다. 끊임없는 소프트웨어 업그레이드로 더욱 재미있어지자 고객들이 몰려들었다. 골프존 온라인 사이트에선 회원들의 스윙 폼을 분석해 주고, 각종 통계를 한눈에 보여줘 자신의 실력을 분석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는 “차별화된 네트워크 서비스를 선보여 경쟁력이 더 높아졌다”고 돌이켰다.
골프의 재미를 강조하며 소비자들에게 접근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올 초 선보인 신제품 ‘골프존 리얼’은 샷 정확도를 더 높이고 실감 나는 그래픽을 구현해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퍼팅 등이 어렵다는 불만이 쏟아졌다. 김 사장은 “사람들이 골프를 어렵게 느끼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며 “소비자들이 즐길 수 있는 방향으로 수정한 버전을 내놓을 예정”이라고 밝혔다.
김 사장이 ‘재미’만을 추구해 온 것은 아니다. 그가 강조하는 골프존의 최대 강점은 연구개발이다. 골프존의 연구인력은 174명으로 전체 직원의 47%에 이른다. 특허도 75개나 보유하고 있다. 그는 “기술을 통해 정확도가 받쳐줘야 사람들이 신뢰하고 재미를 느끼는 것”이라며 “(골프가 IT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IT가 골프에 녹아야 성공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장타의 유혹을 이기면 명인이 된다.’ (보비 로크)
“블랙스톤이라는 세계 최대 사모펀드 아시죠? 애초 타이틀리스트를 같이 인수해 보자며 우리를 찾아왔어요. 하지만 우리는 글로벌 회사를 경영할 준비가 아직 안 됐으니 힘들겠다고 고사했습니다. 마침 우리나라 기업이 인수했으니 정말 잘됐어요. 우리도 차근차근 세계적인 브랜드로 거듭날 겁니다.” 골프존은 지난 5월 상장을 통해 거액을 거머쥐었다. 당장 세계적인 골프용품 회사의 인수합병(M&A)에 군침을 흘릴 법도 하다. 김 사장의 말은 달랐다.
“우리가 상장을 추진한 것은 외형보다 내실에 대한 투자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회사의 성장 속도를 직원들이나 협력사들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입니다. 상장을 통해 대외 신인도를 높인다면 우수 인재와 좋은 파트너들이 자연스럽게 찾아오겠죠. M&A는 그 다음 이야기입니다.”
김 사장이 처음 골프존을 차렸을 때도 그랬다. 당시 그는 시뮬레이터 개발과 별도로 온라인 골프게임 개발에 나섰다. 하지만 온라인 게임이 장기적인 투자와 자금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자 곧바로 발을 뺐다. 그는 “감당하기 힘든 것에 매달리기보다 시뮬레이터에 집중하는 것이 낫다고 여겼다”며 “덕분에 시뮬레이터에 게임 요소를 접목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골프 라운드에서도 내실을 중시한다. 핸디캡 12인 그는 드라이버 비거리보다는 우드와 퍼트의 정확도를 통해 스코어를 유지한다. 그는 “나이가 들면서 나에게 맞는 공략법을 깨우쳐 스코어를 유지하고 있다”고 조언했다.
‘좋은 골퍼는 볼을 치는 동안 좋은 일만 생각하고, 서툰 골퍼는 나쁜 일만 생각한다.’ (진 사라젠)
골프존은 상장 전부터 ‘대어’로 관심을 모았다. 장외시장에서부터 돌풍을 일으켰던 골프존은 청약경쟁률만 209.64대 1을 기록했다. 코스닥 버블이 한창이던 2000년 이후 코스닥시장에서 상장 당일 시가총액 1조원을 넘은 것은 골프존이 처음이다. 골프존의 시초가는 9만4400원으로 공모가 8만5000원보다 11.06%나 높았다. 하지만 차익 실현 매물이 쏟아지면서 결국 8900원(9.43%) 떨어진 8만5500원에 마감했다.
한 달이 지난 현재는 7만원대로 떨어졌다. 전반적으로 불안한 주식시장, 무엇보다 국내 스크린 골프 시장이 포화상태라는 우려 때문이다. 문현식 NH투자증권 연구원은 “현재 매출의 81%를 차지하는 주력 사업인 골프 시뮬레이터 판매가 스크린 골프 시장의 포화로 한계에 이른 것은 확실해 보인다”고 분석했다.
정작 김 사장의 얼굴에선 조급함을 찾아볼 수 없다. 시장의 평가에 일희일비하지 않겠다는 의지로도 보였다. 김 사장은 “우리 회원수가 100만 명이 넘지만 전체 골프인구의 절반에 불과하다”며 “그만큼 성장 여지가 많다”고 자신했다.
골프존은 현재 전국 6000여 개의 가맹점을 두고 있다. 가맹점들이 소프트웨어를 업그레이드할 때마다 매출이 발생한다. 골프존 리얼의 경우 고객이 라운드를 할 때마다 매출이 일어난다. 김 사장은 “향후 우리 가맹점 네트워크를 활용해 의류, 신발 등 골프용품 사업에도 진출할 계획”이라며 “전자제품 하면 하이마트를 떠올리는 것처럼 골프 하면 골프존을 떠올리게 만들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 6월 1일엔 연습장용으로 개발된 신제품 ‘골프존 드라이빙 레인지’(GDR)를 갖춘 아카데미 직영점을 강남에 열었다. 신형 센서를 탑재하고 김대현, 안신애 등 프로 골퍼들이 참여해 타구 인식 정확도를 99%까지 끌어올렸다고 한다. 회원들은 연습기록을 축적하고, 클럽별 기록에 대한 데이터도 제공받을 수 있다. 김 사장은 “올해 수도권에 7개의 직영점을 오픈하고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늘려갈 것”이라며 “앞으로 3~5년 안에 실외 골프연습장은 사라질 것”이라고 장담했다.
과거 포기했던 온라인 골프게임 개발에도 다시 도전하고 있다. 그는 “내년이면 베타 서비스를 선보일 수 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궁극적으로는 오프라인 골프장 인수도 고려하고 있다. 김 사장은 “곳곳에 IT기술을 입힌 골프장을 선보이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골프 게임의 90%는 멘털이다.’ (톰 머피)
골프존 본업인 시뮬레이터의 경우 국내보다는 해외시장 개척에 더 바쁘다. 이미 일본과 중국의 경우 현지 시장점유율 1위를 기록하고 있다. 김 사장은 “일본에선 기존 로컬 브랜드를 제치고 1위에 올라 그 의미가 남다르다”며 “중국은 골프 인구를 감안할 때 스크린 골프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할 잠재력이 무궁무진하다”고 소개했다.
흥미로운 건 김 사장이 오는 7월 떠나는 출장지가 중국이나 일본이 아닌 캐나다와 스웨덴이다. 둘 다 겨울이 유난히 춥고, 길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김 사장은 “캐나다나 스웨덴은 골프 인구가 많지만 겨울이 길어 스크린 골프 수요도 많을 것으로 기대된다”며 “토론토의 경우 지난 2월 진출했는데 상당히 고무적인 결과를 얻었다”고 말했다.
해외에선 차고나 집 안에 골프 시뮬레이터를 설치하는 개인이 많은 것이 특징. 그는 “중동 부호들을 비롯해 카자흐스탄·아제르바이잔 등의 대통령궁에도 우리 제품을 설치했다”며 “국내에서도 이름을 대면 알 만한 부자들의 집에 우리 시뮬레이터가 설치돼 있다”고 말했다.
김 사장 역시 상장을 통해 억만장자 대열에 합류했다. 김 사장이 아들(김원일 골프존 공동대표)과 함께 보유하고 있는 골프존 지분은 60.65%로 평가액이 5000억원이 넘는다. 김 사장은 “스크린 골프를 통해 3만 명 이상의 고용과 전체 1조5000억원에 달하는 새로운 시장을 창출했다는 데 보람을 느낀다”며 “앞으로 지역사회에서 성공한 기업들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롤 모델을 보여주고 싶다”고 밝혔다.
한적한 토요일이면 아내와 함께 도시락을 싸 들고 본사 1층의 스크린 골프장을 찾는다는 그는 “좋아하는 골프를 직업으로 삼다 보니 다른 운동을 할 틈이 없다”며 웃었다. 직원들에게도 골프를 독려한다. 골프를 못 치는 신입 사원들은 의무적으로 3개월간 골프 레슨을 받아야 한다. 김 사장을 통해 ‘머리를 올린’ 직원만 100명이 넘는다. 김 사장은 “업의 특성상 직원들이 골프를 알고 즐겨야 한다”며 “스스로 즐기면 보다 신명 나고 창의적으로 일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구력 20년이 넘는 그지만 아직까진 홀인원과 인연이 없다. 하지만 아쉬움은 없어 보였다. 비즈니스에서 이미 ‘홀인원’을 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더 큰 ‘홀인원’을 기다리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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