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lector] “컬렉션은 돈을 초월한 신앙이며 생명”
[Collector] “컬렉션은 돈을 초월한 신앙이며 생명”
2007년 3월 미국에서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한 한국인이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18세기 백자 달항아리(白磁大壺·높이 48.2㎝, 폭 50㎝)를 구입했다는 소식이었다. 낙찰가 127만2000달러. 당시 환율로 치면 약 12억원이다. 백자 달항아리. 보름달 모양이지만 완전하게 둥글지는 않은 모습. 몸통 중간이 약간 뒤틀리고 기우뚱해 더 여유롭고 편안한 모습. 누군가는 이를 두고 “넉넉한 맏며느리 얼굴”이라고 했다. 완벽함보다 인간적 자연스러움을 추구했던 옛사람들의 마음이 잘 담겨 있는 명품이다. 게다가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유출됐던 것이기에 해외 유출 문화재의 귀환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이렇게 멋진 백자를 구입한 컬렉터는 이상준(55) 호텔 프리마 대표다. 8월 셋째 주 서울 강남구 청담동 호텔 프리마를 찾았다. 호텔 한쪽에서는 ‘백자철화’전이 열리고 있었다. 넓지 않은 공간이었지만 철화백자의 무늬가 참 매력적이었다. 소박하면서도 시원스럽다.
문자무늬 항아리도 좋았고 새구름무늬 항아리도 좋았다. 두세 번의 붓질로 풀포기 하나, 새 한 마리 쓱 그려 넣은 조선 도공의 여유와 낭만. 보고 돌아서려 하면 또 보고 싶다. 모두 이 대표가 수집한 철화백자다.
‘컬렉터는 자신의 수집품을 닮아간다’는 말이 있다. 그러고 보니 이 대표의 인상도 백자와 많이 닮았다. 그는 먼저 인연에 대해 얘기했다.
“추사의 글씨도 그렇고 저 백자도 그렇고, 이런 명품들이 어떻게 저의 손에까지 오게 됐을까 돌이켜보면 그것이 바로 인연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인연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지요.”
이 대표는 처음엔 수석을 채집했다. 경남 함양 출신인 그는 어린 시절 살던 곳 사방이 온통 산과 들이라고 했다.
“그야말로 산수화의 고향에서 살면서 지천에 깔린 돌을 보고 돌 속의 무늬에 빠져들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이었는데 그렇게 심미안을 키웠다고 할까요.”
부인 적금까지 도자기 구입에 모두 써직장을 잡고 결혼하고 198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도자기 등 고미술에 대한 관심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수석 받침용 모래를 사러 갔다가 도자기를 만나면서 도자기의 기품에 빠져들었다. 월급은 물론 부인이 타온 적금 500만원을 그림과 도자기를 구입하는 데 모두 써버리기도 했다. 그러면서 통신과 금속 관련 회사를 거쳐 1998년 일본 투자자들과 함께 호텔 프리마를 인수했다.
“이 호텔에 처음 와서 보니 별 특징이 없는 거예요. 새로운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게 바로 아트 경영이었습니다.”
1998년이면 그가 고미술 수집을 시작한 지 10여 년쯤 지났을 때로 본격적 컬렉터가 돼 가던 시절이었으니 자신의 취향과 회사 경영의 측면이 적절하게 맞아떨어진 듯하다. 그래서 호텔 매출의 일정 부분을 예술품 수집에 투자하기로 했다.
그가 수집한 미술품 문화재는 현재 2000여 점. 도자기, 전통 서화, 석물, 국내외 현대 작가의 작품, 독일의 마이센 도자기 등 시대와 장르를 망라한다. 이 대표는 ‘호텔 속의 뮤지엄, 뮤지엄 속의 호텔’을 지향한다. 호텔에 가 보면 이를 실감한다. 본관 1층 로비 입구에 들어서면 일본인 하야시 시헤이(林子平)가 18세기에 제작한 한반도 지도가 있다. 독도는 당연히 한국 땅이다. 이 대표가 이 지도를 걸어놓은 것은 우리의 자존심 때문이다. 작지만 공간이 예쁜 박물관도 있고 독일의 마이센 도자기가 전시된 레스토랑도 있다. 어디 이뿐인가. 호텔 층층 곳곳을 동서고금의 미술품과 문화재를 감상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놓았다. ‘유망 작가전’ ‘근현대 작가전’ ‘분청사기전’ 등 매년 두세 차례 기획전을 열고 있다. 지금의 전시는 ‘조선시대 제기(祭器)’전과 ‘백자철화’전. 이 대표는 특히 젊은 작가들의 작품 전시를 통해 그들을 후원하는 것도 빼놓지 않는다.
“정말로 끌리는 작품을 산다”별관에 위치한 이 대표의 집무실 또한 하나의 작은 전시실이다. 입구와 정원엔 석탑과 석물들이 정겨운 표정으로 사람을 맞이한다. 사무실은 크리스티 경매에서 구입한 백자 달항아리를 비롯해 추사 김정희의 글씨, 청화백자, 철화백자, 박수근·김환기·이우환의 그림 등 다양한 미술품으로 가득하다. 이제 컬렉션 경력 25년. 그동안 수집했어야 했는데 기회를 놓친 것이 있지 않을까. 그래서 후회한 적도 있지 않을까.
“언젠가 일본 오사카(大阪) 우메다(梅田) 거리에서 백자병을 하나를 보았습니다. 백자청화 산수무늬 사각병이었죠. 그리 큰 것은 아니었는데 1500만 엔을 부르더군요. 그때는 돈이 없어 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매일매일 눈에 밟히더군요. 한 달 뒤 다시 갔죠. 이미 팔렸더군요. 아쉬웠지만 그것도 인연이려니 했습니다. 제가 염원하면 언젠가 다시 나에게 올 수 있지 않을까요?”
이 대표는 “지금은 마음을 비우려 한다”고 강조했다. 열정적으로 수집하지만 집착하지는 않겠다는 말이다. 집착은 과욕으로 이어진다.
“처음에 다소 집착했지만 20년 지나니 이제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투자라고 생각해선 안 됩니다. 투자라고 생각하면 아마추어죠. 진정한 컬렉션은 돈을 초월하는 겁니다.”
이 대표는 그래서 수집한 미술품을 되팔지 않는다. 그는 일본에도 자주 간다. 갈 때마다 오사카, 교토(京都) 등지의 고미술 거리를 찾는다. 거기서 특별히 눈여겨보는 것은 역시 도자기다. 대부분 일제강점기 때 유출된 것이다. 그것을 볼 때마다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집착에서 벗어나면 소명의식이 생깁니다. 해외에 유출된 우리 것을 찾아와야 한다는 소명의식, 우리 젊은 작가들을 지원해야 한다는 소명의식 그런 거죠.”
그는 잘 팔리는 작품보다 마음이 끌리는 작품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아트페어 같은 곳에 가도 주변의 설명보다는 가슴 설레게 하는 작품을 구입해야 한다는 말이다.
“정말로 끌리는 작품을 사게 되면 세월이 지난 뒤 내가 얼마 주고 샀더라 하는 생각조차 사라집니다. 그저 그 자체로 좋은 것이죠. 명품을 돈으로 따질 수는 없으니까요.”
이 대표는 이것을 ‘끌림의 미학’이라고 했다. 그래서일까. 그는 한 고미술상이 덤으로 끼워줬다는 자그마한 철화백자를 여러 차례 쓰다듬었다. 주둥이는 약간 깨졌고 나뭇잎 무늬도 단순했지만 볼수록 참 예쁜 철화백자였다. 꼭 비싼 돈을 주지 않아도, 거창한 작품이 아니어도 내 마음이 통하면 그게 바로 명품이라는 생각을 웅변하는 듯했다.
이 대표는 컬렉션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신앙 또는 생명”이라고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와 이 글을 정리하고 있는데 이 대표로부터 연락이 왔다. 일본 오사카에서 구입하지 못했던 백자청화 산수무늬 사각병이 9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 나온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의 말처럼 “진심으로 염원하니 다시 인연의 끈이 드리운 것”이다. 백자처럼 담백한 믿음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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