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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ons] 패션계의 선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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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그 이탈리아판 편집장 프랑카 소자니, 패션계 조롱하는 격렬한 이미지에 유머 감각도 뛰어나



JACOB BERNSTEIN 기자지난 6개월 동안 세계 패션계에선 존 갈리아노의 해고로 공석이 된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자리를 누가 차지할지 추측이 난무했다. 지방시의 리카르도 티시일까? 아니면 랑뱅의 알베르 엘바즈일까? 그도 아니면 여기 저기 안 나서는 곳이 없는 마크 제이콥스일까? 이 문제와 관련해 보그 이탈리아판의 편집장 프랑카 소자니(61)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소자니는 “존 갈리아노를 다시 고용하라”고 말했다. 그녀는 이 말로 자신이 곤란한 입장에 처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갈리아노는 지난 2월 파리의 한 술집에서 유대인 비하 발언을 한 혐의로 체포됐고, 9월 8일 법정에서 6000유로의 벌금형을 선고 받았다. 소자니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의 생각도 이해가 간다. 갈리아노에게 단순히 ‘그 행동은 나빴지만 용서할 테니 돌아오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갈리아노가 안쓰럽다. 그 술집에서 갈리아노가 내뱉은 말이 그의 본심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술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고 취했다. 사람들은 술에 취하면 심한 행동을 할 때가 있다. 그 발언은 갈리아노의 인간적인 실수였지 정치나 종교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살인을 저지르지도 않았다!”

보그 이탈리아판의 광고가 디오르(그리고 LVMH 경영진)에 상당 부분 의존하는 처지를 생각할 때 그녀의 이런 발언은 꽤 위험한 모험이다. 하지만 소자니는 선동가로 알려졌다. 지난 23년 동안 보그 이탈리아판의 편집장으로 일하면서 그녀는 패션계를 조롱하는 격렬하면서도 우스꽝스러운 이미지를 과감하게 채택해 왔다. 진지한 분위기의 미국 패션 잡지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일이다.

2006년에는 얼굴에 붕대를 칭칭 감은 채 유명 디자이너의 옷을 입은 린다 에반젤리스타(캐나다 출신 모델)의 사진을 ‘변신 열풍(Makeover Madness)’이라는 제목과 함께 표지에 실었다. 안 쪽에는 할리우드와 패션계에 번지는 성형수술 유행을 익살스럽게 풍자한 스티븐 마이젤의 사진이 실렸다. 그 이듬해에 젊은 여자 유명인 누구 누구가 마약이나 알코올 중독으로 갱생시설에 들어갔다는 뉴스가 빈번히 보도됐다. 그러자 소자니는 마이젤이 갱생시설을 배경 삼아 찍은 모델들의 사진을 잡지에 실었다. 그런가 하면 흑인 여성이나 풍만한 몸매의 여성들만을 주제로 한 호 전체를 꾸미기도 했다. 이 두 호는 패션계에서 큰 논란을 일으키면서 날개 돋친 듯 팔렸다.

보그 미국판의 편집장이자 소자니의 가까운 친구인 애나 윈투어는 이렇게 말했다. “프랑카는 두려움이 없는 편집장이다. 유머 감각도 뛰어나다. 미국의 잡지 종사자들은 특정 계층에 불쾌감을 줄 만한 내용을 피하느라 전전긍긍한다. 하지만 유럽에서는 잡지가 나름의 시각을 당당히 밝혀서 사회적으로 논란을 일으키는 수단으로 받아들여진다. 그것이 바람직한 시각인지 아닌지조차 걱정할 필요가 없다. 사실 바람직하지 않을 때가 더 재미 있다.”

소자니가 보그 이탈리아판의 편집장이 된 초창기에 그녀 밑에서 일했던 프랑스의 유명한 예술감독 파비앙 바롱은 이렇게 말했다. “애나 윈투어가 패션 잡지계의 스티븐 스필버그라면 프랑카는 페드로 알모도바르다. ... 그녀는 내가 함께 일해본 편집장 중 재능이 가장 뛰어나다.” 도나텔라 베르사체는 “프랑카는 정말 독창적”이라고 말했다.

소자니는 오랫동안 패션 잡지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왔지만 주로 보이지 않는 뒤쪽에 머물렀다. 하지만 지난 1년 반 동안 사정이 급작스럽게 달라졌다. 그녀는 미국의 TV 리얼리티 프로그램 ‘아메리카 넥스트 톱 모델(America’s Next Top Model)’의 심사위원으로 자주 등장했고, 패션쇼에 참석할 때면 쇼가 진행되는 내내 트위터에 글을 올렸다. 또 보그 이탈리아판 웹사이트에 지난 100년에 걸친 초현실주의의 진화부터 케이트 미들턴 영국 왕자비의 패션(소자니에 따르면 ‘저가 패션’을 지나치게 애용한다)까지 다양한 문제를 논하는 익살스러운 글을 올린다. 유럽의 남성복 패션쇼를 두고는 “남자 모델들은 해결책이 없는 또 하나의 문제”라고 썼다.

소자니가 패션계에서 특이한 인물로 여겨지는 이유 중 하나는 그녀가 때때로 패션업계에서 불문율로 여겨지는 관습까지 비판하고 나서기 때문이다. 지난 5월 칸 영화제에 참석한 그녀는 패션 행사와 후원 기업의 홍보로 영화제의 본질이 흐려지는 데 놀랐다. 그녀는“정도가 너무 지나쳤다. 대낮에도 파티가 수없이 열렸다”고 말했다. 또 블로그에 “캘빈 클라인과 장 폴 고티에의 행사는 패션계와 할리우드의 유착관계를 보여주는 좋은 예였다”고 썼다.

기자는 지난 7월 말 밀라노에 있는 콘데 내스트 보그를 소유한 출판 그룹 사무실에서 소자니를 만났다. 사무실 벽엔 온통 수퍼모델들의 사진이었다. 에반젤리스타와 크리스티 털링턴, 나오미 캠벨 등. 갈수록 유명인사와 그들의 생활방식에 초점을 맞추는 미국 패션 잡지들과 달리 보그 이탈리아판은 여배우의 사진을 표지에 싣는 경우가 드물다. 유명한 패션 스타일리스트인 로리 골드스타인은 이것이 “사진가들이 보그 이탈리아판의 사진을 찍고 싶어하는 이유 중 하나”라고 말했다. “요즘은 진정한 의미의 패션 잡지가 많지 않다. 대다수가 상업화해 패션 잡지로서의 본질을 잃었다. 프랑카는 패션 기사의 형식과 내용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하지만 유명인사의 이야기로 잡지가 망가지도록 허용하지 않았다.”

그녀를 만났던 날 소자니는 마르니의 뱀가죽 무늬 원피스를 입고 마놀로 블라닉의 샌들을 신었다. 곱슬거리는 금발과 맑고 푸른 눈이 라파엘 전파(19세기 중엽 영국에서 일어난 미술 운동)의 그림에 나오는 여인들을 떠올리게 했다. 화장기 없는 그녀의 얼굴에서 주름을 찾아보기 어려웠지만 성형수술을 받거나 보톡스 주사를 맞진 않았다. “얼굴에 전혀 손을 안 댔다”고 그녀는 말했다. “나이는 어쩔 수 없다. 세월을 되돌리진 못한다.”

이 문제에선 패션계 인사 대다수가 소자니와 생각이 다르지만 그녀는 상관하지 않는다. 우연한 계기로 패션계에 입문하게 된 소자니는 보그 이탈리아판의 편집장이 된 이후 유럽 문화계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로 떠올랐다. 그녀는 미술품 수집가(바버라 크루거, 앤디 워홀 등의 작품을 소장한다)이자 밀라노 사교계의 여왕으로 잘 알려졌다. 그녀가 여는 파티에 가면 제프 쿤스(미술가)나 칼 라거펠트(디자이너), V S 나이폴(노벨 문학상을 받은 인도계 영국 작가) 등 다양한 분야의 명사들을 만난다. “퇴근 후엔 어떤 친구와도 패션을 논하지 않는다”고 그녀는 말했다. “패션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잘 알기 때문이다. 사실이다! 칼과 만났을 때도 패션이 아니라 책이나 음악 이야기를 한다.”

그런 그녀가 어떻게 패션계의 거물이 됐을까? 소자니는 이탈리의 북부의 소도시 만투아에서 성장했고 대학에선 영어와 철학을 공부했다. 23세에 패션계에 첫 발을 내디뎠고 아동 패션 잡지인 보그 밤비니의 말단 직원으로 입사했다. 당시 그녀는 신혼이었지만 불행했다. “난 이혼을 원했다”고 그녀는 말했다. “직업을 갖게 되면 좀 더 독립적인 기분이 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잡지사에 취직했다. 그것이 내 평생의 일이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패션계에서의 출발은 순탄치 않았다. “사람들은 내가 부르주아 근성이 너무 강하고 재능이 없다고 말했다.” 소자니는 말단 직원으로 3개월 동안 일하면서 무슨 일이든 잘못됐다 하면 모두 그녀 탓을 하는 데 질려서 인도로 도망친 뒤 2개월 동안 돌아가지 않아 해고됐다. 하지만 그녀 대신 들어왔던 여직원이 임신을 해서 그만두는 바람에 소자니는 그 잡지사에 다시 고용됐다. 그 때부터 그녀는 열심히 일했고 능력을 인정 받아 승진을 거듭했다.

하지만 소자니의 아버지는 여전히 그녀의 일자리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하루는 아버지가 그녀에게 전화해 직장에서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었다. “난 ‘사무실 청소를 하고 사진을 촬영할 아동 모델들에게 옷을 입힌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4개 국어를 할 줄 알고 철학을 공부한 네가 고작 가정부 일을 하느냐?’고 말했다. 아버지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소자니는 아버지에게 반항이라도 하듯 혁신적인 이탈리아 잡지 ‘레이’로 자리를 옮겨 편집장이 됐다. 그녀는 그 곳에서 창의적이고 사진 보는 눈이 탁월한 편집장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녀가 편집장이 된 후 잡지가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고 파비앙 바롱은 말했다.

소자니는 1980년대 초 두 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지만 그 후 곧 이혼했다. 그리고 그 뒤로는 결혼하지 않았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우리가 콘데 내스트의 사무실에서 밀라노의 한 레스토랑으로 자리를 옮긴 뒤 그녀가 말했다. “잘난 체하는 건 아니지만 내가 만났던 사람들은 늘 나보다 못했다.” 소자니는 디저트로 나온 초콜릿 케이크를 한 입 베어먹더니 포크를 식탁에 탁 내려놨다. 그러고는 “맛이 형편 없다”고 말하면서 접시를 내 쪽으로 밀어놨다.

1988년 소자니는 보그 이탈리아판의 편집장이 됐다. 당시 이 잡지는 콘데 내스트 그룹에서 별 볼 일 없는 축에 속했다. “패션 카탈로그로 출발한 보그는 지나치게 화려하며 사치를 조장하는 잡지가 돼버렸다”고 그녀는 말했다. “광고주들은 내가 앞으로 어떤 식으로 잡지를 끌어나갈지 알고 싶어 했다. 하지만 난 말할 생각이 없었다. ‘만약 내가 잘못하면 회사에서 날 해고하면 되고 난 떠나면 그뿐’이라고 생각했다.”

소자니가 편집장이 된 후 보그 이탈리아판은 큰 인기를 끌었다. 디자이너들이 그녀의 조언을 들으려고 찾아오기 시작했다. 디자이너 다이앤 폰 퍼스텐버그는 “(보그 이탈리아판은) 사람들이 그 중 몇 쪽을 찢어서 갖거나 참고하고 싶어하는 그런 잡지가 됐다”고 말했다. 카사 보그, 루오모 보그 등 보그 이탈리아판의 부록을 저비용-고수익 상품으로 만든 일도 소자니의 업적이다. 이 부록들은 심각한 경기침체 속에서도 광고가 넘칠 정도로 몰려든다.

소자니는 리얼리티 쇼나 블로그 활동이 여성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보그 이탈리아판의 이미지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해간다. “모든 규칙은 깨트리라고 만들어졌다”고 그녀는 말했다. “만약 내가 10년 전 썼던 방식을 지금도 고집한다면 보그 이탈리아판은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진부한 잡지가 되고 만다. 언제나 한 발 앞서 나가야 한다. 뒷걸음질 쳐서는 안 된다.”

번역 정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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