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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 고르키 공원의 변신

[travel] 고르키 공원의 변신


어두운 이미지가 강했던 모스크바 최대의 녹지공간이 부르주아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됐다

고르키 공원은 여러 가지로 유명하지만 그중 좋은 일은 많지 않다. 모스크바 주민들은 이 도시 최대의 녹지공간을 과거 소련 시대의 엄격히 통제된 유흥지로 기억했다. 군악대의 연주를 들으며 싸구려 아이스크림을 손에 들고 산책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 가족들로 붐비는 곳이다.

Gorky Park is famous for many things, not many of them good. For Muscovites, their city’s biggest green space used to be known as a place of regimented Soviet-era fun, full of strolling proletarian families eating cheap ice cream to the sound of military bands.

외국인들은 고르키 공원이라고 하면 미국 미스터리 소설가 마틴 크루즈 스미스가 얼굴 없는 시체(faceless corpses)와 경쟁이 치열한 소련 암시장 거래(black marketeering)를 소재로 다룬 1981년작 소설의 배경(그리고 제목)을 떠올린다. 물론 스콜피온스의 노래 ‘모스크바를 따라서 / 고르키 공원으로 가라 / 바람소리를 들으며 / 변화의 바람소리’도 있다.

내게는 무엇보다 피해야 할 장소라는 인식이 강했다. 1990년대 중반 모스크바 타임스의 젊은 기자 시절 그곳에서 술 취한 공수부대원들에게 거의 곤죽이 되도록 두들겨 맞았다. 고르키 공원은 가난한 모스크바인들이 값싸게 데이트(cheap dates)를 즐기던 장소였다. 사람들은 난잡하게 늘어선 번쩍이는 카니벌 놀이기구(a wilderness of garish carnival rides), 요란한 팝 음악, 그리고 터무니없이 비싼 케밥을 기억한다. 모스크바의 오토바이 갱단 나이트 울브스는 미국의 헬스 에인절스(Hells Angels, 검은 가죽옷 차림으로 할리 데이비슨을 타고 다니는 오토바이 갱단) 격이다. 그들은 공원 깊숙한 곳에 근거지를 마련했다. 그리고 그 공원은 모스크바에 아주 드문 넓은 공공장소 중의 하나였지만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야 했다.

지난 여름 고르키 공원에 다시 “변화의 바람(wind of change)”이 불었다. 싸구려 유원지(cheesy funfairs), 술 취한 군인들, 그리고 소련 시대 이후 지구 종말을 맞은 듯한 깨진 콘크리트 더미의 폐허 대신 공원은 이제 늦여름의 햇살을 즐기며 무료 와이파이(무선통신망)를 사용하고, 자전거를 타고, 무알콜 모히토 칵테일을 마시는 젊은이들로 북적거린다(the park is now full of free-Wi-Fi-using, bicycling, nonalcoholic-mojito-sipping young things catching the late-summer rays). 건강과 안전은 안중에도 없는 카니벌 놀이기구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대신 장미 정원과 분수대가 들어섰다(알고 보니 사실은 원래부터 있었지만 그 위에 놀이기구가 세워졌었다).

사람들은 잔디밭 곳곳에 있는 대형 빈백 의자(beanbags, 큰 부대 안에 작은 플라스틱 조각들을 채운 의자 대용품)에서 노트북과 시간을 보낸다. 90년대의 조립식 부스 자리에는 1930년대 초기 구성주의(Constructivism, 묘사적 요소를 거부하고 순수한 구성을 지향) 스타일 가판대를 복원한 목재 구조물이 세워져 주스와 샌드위치를 판매한다(보드카는 없다). 고르키 공원의 한쪽으로 약 5km가량 뻗은 모스크바 강둑에는 파리 센 강변의 휴식공간(plages)을 본뜬 도심 휴식시설이 마련됐다. 모험적인 프랑스 여성 두 명이 야외 페탕크(petanque, 철제 공을 굴리는 볼링 비슷한 경기) 레인도 만들었다.

중산층의 확대가 가져온 변화였다. 이 모두를 보면서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러시아가 일종의 눈 내리는 추운 지방의 나이지리아가 아니라(rather than a kind of Nigeria with snow) 정말로 정상적이고 세련된 나라가 될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어떻게 이런 변화를 가져왔을까? 지난 15년 동안 모스크바에 오일 머니의 쓰나미가 덮쳐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됐다(has been transformed beyond recognition). 과거 수수하고 역사적인 저층 건물의 도심지역(The low-rise, once rather low-key, historic downtown)은 방대하고 번쩍거리는 주거·상업지구로 재개발됐다. 수만 개의 아름다운 옛날 건물이 헐리고 새 건물이 들어섰다. 모두 1992~2010년 모스크바 시장을 지낸 유리 루츠코프의 넘치는 의욕 덕분이었다.

공식·비공식적으로 시 당국에 막대한 자금이 몰렸다(루츠코프의 부인으로 건설 재벌인 엘레나 바투리나가 러시아 최고 여성 갑부라는 자신의 지위를 당연하게 여겼다는 정도만 말해두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공공 공간을 더 많이 지으려는 투자는 거의 없었다.

실제로 시 당국은 일반대중으로부터 가능한 한 많은 공간을 짜내는 데 혈안이 된 듯했다. 소련 시대의 어린이 도서관과 음악 학교, 그리고 연금 수령자 클럽을 쫓아내고 그들이 입주했던 역사적인 건물들을 팔아 치웠다. 운전자들이 태연하게 인도에 주차해 거리를 걸어 다니기도 어려워졌다. 실제로 세계 최악으로 꼽히는 교통정체에 시달리면서도 모스크바에는 아직 주차 단속 시스템(system of parking tickets)이 없다. 루츠코프의 모스크바에서는 아름다움, 공간, 즐거움이 무상 서비스가 아니라 돈을 주고 구매해야 하는 상품이었다(beauty, space, and pleasure were commodities to be bought, not given away for free).

그랬으니 내가 고르키 공원의 새로운 모습에 놀랄 만했다. 세르게이 소비아닌 현 모스크바 시장과 그가 공원 책임자로 새로 임명한 세르게이 카프코프의 머리에서 나온 작품(brainchild)이다. 카프코프는 공원에 담장을 둘러 돈을 뽑아낼 목적으로 조잡한 기능들을 짜맞춘 엘리트 전용 클럽(fenced-off, money-spinning elitny preserves)을 구상하지 않았다. 다른 욕심 없이 오로지 모스크바 일반 시민의 삶을 향상시키겠다는 일념 아래 정말로 근사한 공공 공간을 창조했다.

물론 여기에는 약간의 단서조항(a bit of a caveat)이 숨어 있다. 쉬운 돈벌이(making a fast buck)를 마다할 만한 여유가 있는 사람은 이미 어느 정도 큰 돈을 번 사람뿐이라는 점이다. 이 경우 고르키 공원의 대부는 석유 재벌 로만 아브라모비치다. 카프코프가 그의 측근이다(그는 아브라모비치가 북극 지방 추코트카의 주지사였을 때 지역 의원을 지냈다). 그리고 아브라모비치의 여자친구 다샤 주코바가 내년 고르키 공원의 역사적인 전시장에 세계 수준의 현대미술 센터(a world-class contemporary-arts center)를 열 계획이다.

과거 미국 기업 중 최대 규모의 재산을 기부하고 “많은 돈을 갖고 죽으면 불명예(a man who dies rich dies disgraced)”라고 주장했던 앤드류 카네기에 비할 만한 규모의 공공기부(public philanthropy)는 아니다. 그러나 고르키 공원의 변신은 1990년대와 2000년대의 금전 만능주의 문화(take-the-money-and-run culture)와는 다른 새로운 출발점이다. 모스크바 시민들은 자신들의 사적인 공간뿐 아니라 도시의 공공 공간에도 투자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난 9월 고르키 공원에서 열린 모스크바 식품 페스티벌이 그 필요성을 입증하는 모범 사례였다. 상위 1% 부자보다는 중상층의 전문직 종사자(well-heeled professionals)가 대다수인 모스크바 주민 1만2000명이 모여 지역 맥주, 훈제 거위 가슴살, 그리고 치즈를 맛보았다. 모스크바 중산층의 성서가 된 식품 전문지 아피샤 예다의 알렉세이 지민 편집장이 개방된 주방에서 요리 강좌를 열었다. 페스티벌의 주제는 양보다 질, 간단한 재료를 최대한 활용하는 법, 세계 식품문화에의 합류였다(The festival was all about quality rather than quantity, about how to make the best of simple things, about joining the food culture of the world). 평범한 전문직 종사자의 임금으로 멋지고 세련된 삶을 누리며 신흥재벌(oligarch)이 아니더라도 고급 문화를 향유할 수 있다는 인식을 확산시키려는 취지였다. 어쨌든 아무리 돈 많은 신흥재벌이라도 고르키 공원만큼 크고 아름다운 모스크바 정원을 가진 사람은 없으니까 말이다.

[With Anna Nemtsova in Moscow

번역 차진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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