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징대학살의 기억
난징대학살의 기억
1937년 겨울, 일본군은 당시 중국의 수도였던 난징(南京)을 침략했다. 수십만 명이 살해당한 이 난징대학살은 중일 관계의 역사에서 가장 가슴 아픈 한 페이지로 남아 있다. 그러나 유대인 대학살을 비롯한 제2차 세계대전 중의 다른 대규모 잔학행위와는 달리, 난징대학살을 묘사하려는 창조적인 시도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러나 지난 몇 년간 문학과 영화 장르에서 이 사건을 극화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중국의 신세대 작가와 감독들이 관객의 요구, 검열당국, 그리고 예술가적 양심 사이에서 절묘한 줄타기를 하며 이 비극을 다루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전미도서상(National Book Award) 수상 작가 하진(金雪飛)은 지난해 가을 영어 소설 ‘난징진혼곡(Nanjing Requiem)’을 출판했다. 이 작품은 당시 중국인들을 구하려 애썼던 외국인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그리고 지난해 말 개봉한 장이머우(張藝謨) 감독의 ‘진링의 13소녀(The Flowers of War)’는 어린이들과 매춘부들을 일본인들로부터 보호했던 한 성직자의 이야기다. 크리스천 베일이 주연을 맡은 이 영화에는 중국영화 사상 가장 많은 제작비가 투입됐다.
전에는 그와 같은 역사적 성찰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공산당이 권력을 잡은 뒤 몇 년 동안 정부는 난징대학살을 은폐하려 했다. 새 일본 정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 경제원조를 받기 위해서였다. 난징은 적대관계에 있던 국민당 정권의 수도였고, 공산당은 대학살 당시 중국인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전혀 하지 않았다. 따라서 공산당의 역사에 대학살이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그리고 정부가 반대의견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 관해서는 거의 공개적으로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정치환경이 변했다. 마오쩌둥 사후 자유화 바람이 불고, 난징대학살을 일본군의 ‘침략(invaded)’이 아닌 ‘진출(advanced into)’로 주장한 일본 교과서로 인해 일본과의 관계가 악화됐다. 영화평론가 덩지멍은 “반일감정이 당에게 유용한 도구가 되면서 난징대학살이 중국인들의 의식에 자리잡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특히 지난 수 년간 많은 예술가들은 과거의 국가적인 수치를 초강대국의 위상에 걸맞게 재조명하는 작업을 시도해 왔다. 요즘의 예술적 해석은 국가주의가 대세다. 예컨대 ‘진링의 13소녀’는 일본인들을 무자비하고 가학적인 야수들로 그려내며 정부의 비위를 맞췄다. 장이머우 영화의 원작 소설을 쓴 옌거링은 “사람들은 왜 이 이야기를 다시 끄집어내냐고 묻는다”고 말한다. “그들은 그 사건을 수치로 여기지만, 내가 보기에는 강간범들과 살인자들이야말로 수치스러워해야 한다.”
하지만 최근에는 일본 병사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킨 작품도 나왔다. 난징 대학살을 다룬 2009년작 영화 ‘난징! 난징!( 南京! 南京!: City of Life and Death)’ 도입부에는 일본 병사 몇 명이 우연히 피난민들로 가득한 교회를 발견하는 장면이 있다. 한 노인이 손을 들어 항복을 표하자 일본군 병사의 눈에 연민의 감정이 어린다. 영화는 대중과 평단 모두의 호평을 받는 동시에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하룻밤 사이에 국가의 적이 됐다”고 그 영화를 감독한 루취안(陸川)이 말했다.
실제로 일본의 만행(승려들을 거세하거나 부모에게 딸을 강간하게 하는 등)은 많은 사람들에게 아직도 너무나 가슴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들은 순수한 중국인들이 일본인 악마들을 상대하는 장이머우의 묘사방식을 만족스럽게 여긴다. 그러나 루를 비롯한 사람들은 더 섬세한 묘사를 원했다. “내 영화에서 거짓을 말하고 싶지는 않다”고 루는 말한다. “일본인들도 똑같은 인간이라고 믿는다.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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