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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영화 ‘은교’ - 노인의 몸에서 잠자던 ‘청년’을 깨우다

[Culture] 영화 ‘은교’ - 노인의 몸에서 잠자던 ‘청년’을 깨우다

“너의 젊음이 상이 아니듯, 나의 늙음이 형벌이 아니다.” 박범신 작가의 소설 『은교』는 이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순식간에 만개했던 벚꽃이 하나 둘 잎을 떨구기 시작한 봄의 한 가운데서 이 문장을 읽어서일까. 지는 꽃잎이 새삼 처연했다. 흔히 우리는 인생을 계절에 비유한다. 생명의 기운이 싹을 틔우는 봄이 아이라면 뜨겁게 타오르는 여름은 청춘이고, 꽃이 지고 열매가 맺히는 가을은 중년, 모든 것이 다시 땅으로 돌아가는 서늘한 겨울은 노년과도 같다.

많은 문학작품 혹은 영화의 주인공은 아무래도 봄과 여름이다. 예술이 아이와 청춘의 시간, 그 빛나게 타오르는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것은 벚꽃이 갑자기 피고 지는 것처럼 순식간에 지나가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박범신 작가의 소설 『은교』는 이 만고의 진리를 되새기게 한다. 이제는 젊음에서 꽤 멀어져 나이 듦의 영역에 성큼 발을 들여놓은 작가는 아마 세상의 수많은 ‘봄’들에 질투가 났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앞서 말한, 가슴을 후비는 장탄식을 흘린다. 맞다. 젊음이 상이 아니듯 늙음은 벌이 아니다. 그저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다.



치명적인 매혹의 순간‘해피엔드’(1999)의 정지우 감독도 바로 저 문장에 매혹되었다고 한다. 사실 저 문장에 마음이 동한 감독이 한 둘이 아니었다. 소설 『은교』는 판권 경쟁이 치열하다고 소문난 작품이었다. 70대 시인과 30대 제자와 열일곱 살 여고생 사이에서 휘몰아치는 감정의 격랑. 박범신 작가는 이 파격의 멜로가 단순한 치정극으로 그려질까 우려했다. 많은 영화 제작사의 러브콜이 쏟아졌지만 그 중 콕 짚어 ‘정지우 감독’에게 영화화를 허락한 것은 아주 현명한 선택이었다. 정지우 감독은 ‘홀림의 감정’을 가장 우아하고 아름답게 그려내기로 정평이 나 있기 때문이다.

영화 ‘은교’는 정지우 감독의 장기가 그대로 드러난다. 영화 ‘은교’는 가질 수 없는 것을 탐하는 이들의 이야기다. 대한민국 최고의 시인 이적요(박해일)는 고요한 삶 속에서 고목나무처럼 늙어가고 있다. 영화는 첫 장면에서 생기가 사라지고 푸석푸석해진 노인의 육체를 찬찬히 바라보면서 늙음의 처연함을 시각화한다. 하지만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늙음이 슬픈 것은 육체가 늙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 육체 속에 갇힌 영혼은 여전히 청춘이라는 불일치 때문이다.

이적요도 마찬가지다. 나이든 육체 속에 뜨거운 청년을 숨기고 사는 70대 노 시인의 삶에 어느 날 여고생 은교(김고은)가 불쑥 찾아온다. 열린 창문으로 들어 온 작은 새 마냥, 이리저리 포르르 날아다니듯 이적요의 고요한 집을 들쑤시고 다니는 은교를 보며 이적요는 너무 오랜만에 생기를 느낀다. 처음엔 귀여운 손녀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심정으로 은교를 바라보았던 이적요는 어느 날 흔들의자에서 곤히 잠든 소녀를 바라보다가 어떤 균열의 징조를 느낀다. 노인의 몸 속에 잠자고 있었던 ‘청년’이 깨어난 것이다.

이적요를 친아버지처럼 따르던 제자 서지우(김무열)도 은교에게 빠져든다. 이적요가 은교에게 매혹 당한 까닭이 순수하게 빛나는 그녀의 젊음 때문이라면 서지우의 매혹은 좀 다르다. 서지우는 은교를 통해 이적요를 넘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힌다. 스승 이적요의 천부적인 재능을 동경하면서도 질투하던 서지우는 은교를 통해 이적요에겐 없고 자신에게만 있는 어떤 ‘재능’을 발견한다. 바로 ‘젊음’이다. 영화는 세 사람 사이에 휘몰아치는 온갖 감정, 동경, 질투, 애증, 매혹, 욕망을 겹겹이 쌓으며 파국으로 치닫는다.



30대 배우 박해일의 노인 연기 돋보여소설을 영화로 옮길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캐스팅이다. 관객은 책 속에 글자로 묘사되었던 인물들이 자신의 상상 그대로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길 원한다. 이 점에서 영화 ‘은교’는 꽤 성공적이다. 70대 노인 이적요는 배우 박해일이 연기한다. 특수분장으로 나이를 덧씌우고 노년의 쓸쓸함을 표현하는 박해일의 연기는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설득력을 갖는다. 초반부 젊은 박해일의 ‘노인 목소리’가 낯설겠지만 적응하고 나면 어느 순간 그가 자연스럽게 70대 할아버지로 보인다. 열등감과 질투로 폭주하는 제자 서지우를 연기한 김무열도 안정적이다.

이적요와 은교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서지우는 한 편으로는 가해자이며 다른 한 편으로는 피해자다. 김무열은 그 양면성을 능숙하게 연기한다. 마지막으로 은교 역의 김고은. 영화를 보고 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얼굴이 있을 것이다. 그녀는 10여 년 전의 ‘전도연’을 보는 것 같다.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움으로도 빛이 나는, 흰 티셔츠에 청바지만 입고 서 있어도 눈부시게 매력적이다. 정지우 감독은 ‘젊음’의 뮤즈 역에 꼭 맞는 여배우를 발굴해냈다. ‘은교’가 첫 작품임에도, 김고은은 어색하거나 주저하는 법이 없다. 대형 신인의 발견이다. 언젠가 ‘은교’는 ‘김고은의 데뷔작’으로 더 유명해질지 모른다.



■ 놓치면 아쉬울 신작 3



봄, 눈



감독 김태균 |

출연 윤석화 이경영 임지규 김영옥 |



개봉 4월 26일 |

전체 관람가
연극계의 대모, 윤석화가 ‘레테의 연가’(1987) 이후 실로 오랜만에 스크린에 돌아왔다. ‘봄, 눈’의 이야기는 단순하다. 엄마이자 아내인 순옥(윤석화)이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고, 가족과 화해하고 삶의 마지막을 정리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렸다. 사랑하는 가족과 헤어질 수밖에 없는 슬픔, 그리고 서로를 향한 애틋한 사랑이 절절하게 펼쳐진다. 마지막 병원 침대에서 홀로 앉아 미소를 지으며 죽음을 맞이하는 순옥의 얼굴이 오랜 잔상으로 남는다.



아르마딜로

감독
야누스 메츠 페더슨 |

출연 매드 미니, 대니얼 윌비 |



개봉 4월 26일 |

15세 관람가‘아르마딜로’는 2009년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최전선으로 관객을 불러들인다. 아프가니스탄 최전방 기지 아르마딜로에 파병된 덴마크 쿤인들을 통해 보는, 일종의 전쟁 보고서. 이 전쟁 다큐멘터리에는 ‘부수고 터지는’ 전쟁 스펙터클을 기대해선 안 된다. 이 영화는 인간이 어떻게 전쟁에 물들어 가는지 세밀하게 관찰한다. 바로 옆에서 전쟁을 목격하는 듯한 기분이다. 전쟁의 진짜 무서움이 무엇인지 볼 수 있다.



어벤져스

감독 조스 웨던

출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스칼렛 요한슨,

크리스 헴스워드, 크리스 에반스



개봉 4월 26일 |

12세 관람가혼자서도 너끈히 ‘블록버스터 시리즈’를 보유하고 있는 수퍼히어로 주인공들이 한 자리에 뭉쳤다. 아이언 맨, 토르, 캡틴 아메리카, 헐크 등등 할리우드 수퍼히어로 주인공들이 모두 모였다는 사실 만으로도 기대치가 급상승한다. 그 기대를 충분히 만족시켜줄 만한 작품이다. 액션 스펙터클은 물론, 탄탄한 드라마, 위트 넘치는 대사 등 모든 부분에서 만족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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