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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로에 선 한국 에너지 정책 - “대안 없이 원전 폐쇄땐 블랙아웃”

기로에 선 한국 에너지 정책 - “대안 없이 원전 폐쇄땐 블랙아웃”

국내 원자력 발전이 기로에 섰다. 1970년대 이후 경제 발전과 궤를 같이 하며 전력 공급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해왔지만 지난해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폐지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원전을 미래 핵심 에너지원으로 활용하려던 우리 정부로서는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국내 원전의 역사는 1960년대부터 시작된다. 1962년 미국으로부터 100kW급 연구용 원자로 ‘트리가 마크2’를 들여와 연구를 시작했다. 최초의 원자력 발전소는 1978년 건설됐는데 당시 정부는 단일 사업으로 최대 규모였던 약 1500억원을 투자해 고리 1호기를 완공하고 상업운전을 시작했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21번째 원전 보유국이 됐다. 이후 원전 비중은 꾸준히 늘어 현재 국내에는 고리 5기, 월성 4기, 울진 6기, 영광 6기 등 총 21기의 원전이 가동 중이다. 비중은 전체 전력발전량의 약 34% 정도다.

2008년 발표한 제1차 국가에너지기본계획에 따르면 정부는 원전을 저탄소 녹색성장을 뒷받침할 유일한 대안으로 보고 있다. 경제적, 환경적 측면에서 가장 합리적인 방안이라는 의미다. 정부는 이에 따라 현재 34%인 전체 발전량 비중을 2030년까지 59% 수준으로 늘리겠다는 구상을 내놨다. 가동 중인 21기 이외에 19기를 추가로 만든다는 계획인데 이미 7기는 건설이 진행 중이다.

일본이 원전을 통한 전력 공급을 중단하기 하루 전인 5월 4일 국내에서는 울진 북면에서는 신울진 원전 1·2호기 기공식이 열렸다. 그 동안 해외 기술에 의존했던 핵심 기자재인 ‘원전계측제어시스템(MMIS)’과 ‘원자로냉각재펌프’를 국내 기술로 개발해 적용한 최초의 원전이다. 1호기는 오는 9월에 콘크리트 타설을 시작해 2014년 6월에 원자로를 설치하고 2017년 4월 준공된다. 2호기는 2015년 5월 원자로를 설치해 2018년 4월에 준공할 계획이다.

이날 기공식에 참석한 이명박 대통령은 “원전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며 다시 한 번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 대통령은 “에너지 자원이 풍부한 산유국들도 석유 이후의 시대를 대비하려고 원전 건설에 적극 나서고 있다”며 “아랍에미리트가 울진에 설치된 것과 동일한 APR-1400 원자로를 건설 중이고, 사우디아라비아도 도입을 적극적으로 검토 중”이라고 설명했다. 이 대통령은 또 “얼마 전 발생한 정전사건 은폐나 부품 납품 비리는 원자력 발전에 대한 국민 신뢰를 떨어뜨리는 일”이라며 “철저히 조사해 책임을 묻고 제도 개선책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이처럼 정부는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세계적인 폐지 움직임에도 원전의 비중을 꾸준히 늘려가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원전의 필요성과 불안감 사이에 존재하는 인식차는 여전하다. 올 3월 현대경제연구원이 발표한 ‘원자력에너지 안전성에 대한 대국민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 중 89.9%는 원자력 에너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응답자의 42.0%가 사고 위험이 높다고 답변해 안전성에 대한 우려 역시 큰 것으로 나타났다.

3월 환경연합의 온라인 조사 결과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원자력 발전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이 크게 나빠졌음을 보여준다. 국민 10명 중 6명 이상(64.9%)이 원자력 비중 확대에 반대한다고 응답했고 ‘각 에너지원이 얼마나 바람직한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불과 35%만이 원자력이 바람직하다고 답했다. 38%인 석탄보다도 낮은 수치로 96%인 태양광, 95%인 풍력과 비교하면 세 배 이상 차이가 났다.



“원전은 선택 아닌 필수”학계의 주장 역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다수의 전문가들은 당분간 원전의 의존도를 줄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꾸준한 유가 상승과 세계 경제의 불안, 화석 연료의 고갈 등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원전이 꼭 필요하다는 주장인데 에너지 대외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로서는 원전을 포기할 경우 타격을 감당할 수 없다는 의미다. 2010년 국내 전력소비량은 42만3784GWh였다. 제5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따르면 전력소비량은 해마다 1.9%씩 증가해 2024년에는 55만1606GWh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전체 전력의 34%을 공급하고 있는 원전을 폐지하면 이를 상쇄할만한 다른 발전원이 필요한데 원전 찬성론자들은 “현실적으로 대안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은철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는 “원자력의 생산단가는 kWh당 39.7원 정도로 다른 석유나 태양광 등 다른 발전원에 비해 월등히 저렴하다”며 “신재생에너지 등 다른 발전원의 생산단가가 현실화돼야 원전 폐지를 논의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한 원전 관계자 역시 “1982년 이후 물가상승률은 230%였지만 전기 요금은 불과 14.5%만 올랐다”며 “원전이 그만큼 싸게 전력을 공급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독일 등 유럽 국가들과 단순 비교는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 교수는 “독일이 결단할 수 있었던 것은 설비예비율이 90%가 넘고 그만한 예비 전력을 갖췄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2010년 독일의 최대전력은 83.3GW였지만 설비용량은 163.6GW로 설비예비율은 96.4%에 달한다. 또한 석탄이나 천연가스의 매장량도 우리나라보다 훨씬 많고, 프랑스로부터 즉각적으로 전력을 수입할 수 있는 시스템도 갖추고 있다. 일본 역시 최대전력은 178.9GW인데 설비용량은 247.9GW다. 설비예비율이 38.5%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사정이 다르다. 2011년 국내 최대전력은 73.17GW였지만 설비용량은 76.65GW에 그쳤다. 설비예비율이 4.8%에 불과하기 때문에 당장 원전의 가동을 중단할 경우 타격이 클 수 밖에 없다.

40%에 가까운 예비율을 가졌음에도 원전 가동을 중단한 일본은 올 여름 사상 최대의 전력난을 겪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일본의 경우 1973년 2.6%에 불과했던 원전의 비중이 2010년 30.8%로 급증한 반면, 73.2%를 차지했던 화력발전의 비중은 8.3%로 줄었다. 전체의 3분의 1에 달하는 공급량을 메울 방법을 찾고 있지만 화력발전 등은 이미 시설이 노후해 대안 모색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7월부터는 오후 1시에서 4시 사이에 의무적으로 쉬도록 하는 ‘시에스타(낮잠)’제도 도입까지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는 “현재 원전이 담당하는 발전량을 화력발전으로 대체할 경우 전력요금이 40% 이상 늘어날 수 밖에 없는데 국민들이 납득하겠느냐”며 “신재생에너지가 대안으로 떠오르는 상황이고, 생산단가를 낮추기 위한 연구도 진행 중이지만 아직은 원전의 발전량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했다. 아직 신재생에너지의 설비 이용효율은 태양광의 경우 10~15%정도, 풍력은 20% 내외다. 반면 원자력은 90% 이상이다. 갈 길이 멀다는 뜻이다.

안전성 역시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다. 원전 관계자는 “가압경수로(PWR) 방식의 냉각 시스템을 채택한 우리 원전이 비등경수로(BWR) 방식을 쓰는 일본에 비해 훨씬 안전하다”며 “후쿠시마 사고 이후 46개의 장단기 개선대책을 수립해 안전성 강화를 추진하고 있는 만큼 지나치게 위험을 강조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원자력이 CO2를 거의 배출하지 않은 친환경에너지라는 점도 원전 찬성론의 주요 논거 중 하나다.



반대론자들은 원전 경제성 의문 제기반면 반대론자들은 원전의 장점으로 꼽히는 경제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발전소 건설과 운영, 생산비만 따지면 타 발전원보다 경제적이지만 유지비와 방사성 폐기물 처리 비용 등을 고려하면 비용이 크게 늘어난다는 것이다. 후쿠시마 사고 직후 일본은 ‘발전단가 검증위원회’를 꾸려 원전의 경제성에 대해 정부 차원의 검증작업을 벌였다. 이 결과에 따르면 안전 대책 비용, 사고 대책 비용, 원전 입지에 따른 교부금 등 사회적 비용을 포함할 경우 원전의 생산단가는 석탄이나 LNG 등과 비슷한 수준까지 상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유지비용에 원자로 폐로 비용이 포함될 경우 단가는 더욱 올라갈 수 있다. 한 환경단체 관계자는 “후쿠시마 사고 수습 비용이 100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며 “원전이 다른 발전원에 비해 경제적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주장은 이제 설득력을 잃었다”고 주장했다.

원전 비중을 늘릴 비용으로 신재생에너지에 더 투자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신재생에너지가 당장은 생산비용이 비싸지만 경제성 개선 속도가 빠른 만큼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독일의 경우 신재생에너지가 2017년 그리드패리티(화석연료보다 발전단가가 낮아지는 것)에 도달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모 교수는 “단기적으로 원전을 없애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장기적으로는 원전을 폐지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설계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그럼에도 오히려 늘려가겠다는 주장이 국민적 합의를 얻을 수 있을 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존속과 폐지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면서 정부의 계획에도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탈원전 정책을 채택하는 국가들이 속속 등장하는데다 국내에서는 새로운 발전소 건설 후보지인 영덕과 삼척 등에서 건설 반발 움직임이 커지고 있다. 이 대통령은 “선거 때마다 국가 중요 정책을 바꿔서는 안 된다”며 원전 추가 건설을 밀고 나갈 계획임을 분명히 했지만 반대에 부딪혀 정책 결정이 늦어질 가능성도 있다. 정부가 국민들을 어떻게 설득해 나갈지 주목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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