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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육아휴직 붐 - ‘딸 바보’ 김과장 “애 좀 키우고 올게요”

남편의 육아휴직 붐 - ‘딸 바보’ 김과장 “애 좀 키우고 올게요”

5월 16일 오후 2시, 울산광역시 동구의 한 가정집 . 알록달록한 유아용 의자에 앉은 나은(14개월)이가 입을 “아~”하고 벌린다. 아빠 권성욱(37)씨가 숟가락 위에 에그 스크램블을 얹어 입 안에 쏙 넣어준다. 앞니가 예쁘게 난 아가는 오물오물 입을 움직이더니 이내 아빠를 보며 방긋 웃는다. 권씨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진다.

지방직 공무원인 권성욱씨는 5월 들어 나은이의 육아를 전담하고 있다. 지난해 3월 나은이를 낳은 후 육아휴직을 한 아내가 5월 말 복직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처가에서 아이를 맡아주겠다고도 했지만 부부는 늦은 나이에 결혼해 얻은 딸을 직접 키우고 싶었다. 권씨는 오랜 고민 끝에 육아휴직을 결심했다. 1년간 육아휴직 기간을 얻은 그의 복직 예정일은 내년 4월 30일이다.

“처음에 육아휴직을 한다고 하니 다들 대학원 진학이나 여행 등 다른 계획이 있느냐고 물었어요. 아이를 키우는 일만으로 직장을 쉰다는 아빠를 이해 못하더라고요. 아이 하나 키우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닌데 말이죠. 그만큼 아직은 남성 육아휴직에 대한 인식 자체가 많이 부족한 것 같아요.”

나은이 아빠처럼 육아휴직서를 낸 남성 근로자가 지난해 1400명을 넘어섰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지난해 남성 육아휴직 신청자는 1402명으로 2010년 819명보다 71%나 증가했다.

2001년 남성에게도 육아휴직이 허용된 이후 가장 많은 수치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지난해 남성 육아휴직자가 급증한 것은 육아휴직급여가 기존 50만원 정액제에서 월 100만원까지 통상임금의 40%(최저 50만원)가 주어지는 정률제로 바뀐 데 따른 것으로 이해된다”고 말했다.

그는 “남성의 경우 여성보다 임금 수준이 높기 때문에 육아휴직 때 상대적으로 나은 급여를 받을 수 있다”면서 “육아휴직자에 대해 회사 측에도 월 20만원씩 장려금을 지급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활성화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설명했다.



월 100만원까지 통상임금의 40% 받아 개선됐다고는 하지만 정작 육아휴직자들은 “고액 연봉을 받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통상임금의 40%로는 턱없이 모자라다”고 입을 모은다. 권씨의 아내 이영아(39)씨는 “각종 보험료, 연금 등을 떼고 나면 기저귀 값 대기도 빠듯하다”면서 “저번 주에 친정 어머니가 남편 먹으라고 사온 소고기도 아기 이유식에 넣었다(웃음)”고 말했다. 육아휴직과 동시에 월 수입이 절반 이상 줄어드는 상황에서 외벌이 부부가 육아휴직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이유다.

2009년, 6개월 간의 육아휴직 경험이 있는 이진성(가명·38)씨는 “직장에서 남자가 육아 때문에 휴직한다는 건 자신의 경력을 포기하는 걸로 인식한다”면서 “가정 소득도 현저히 줄어들기 때문에 아빠가 육아휴직을 신청하는 건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고 말했다.

육아휴직제도는 1987년 처음 생겼으나 임금보전 등 지원책이 없어 이용하는 사람이 적었다. 2001년 11월부터 고용보험기금에서 육아휴직 급여가 지급돼 이용자가 생기기 시작했다.

당시 남성 육아휴직자는 단 2명뿐이었지만 관련 제도가 개선된 2008년부터 그 수가 점차 증가했다. 하지만 10여 년이 지난 지금, 전체 육아휴직자 중 남성 비율은 2%대로 매우 낮은 편이다. 스웨덴의 남성 육아휴직 이용률이 80%에 달하는 데 비하면 턱없이 낮은 수치다.

스웨덴은 부부 합산 480일간의 육아휴직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물론, 이 중 60일은 반드시 아버지가 사용하는 ‘파파쿼터제’를 도입한 이후 남성 육아휴직 이용률이 50% 이상 증가했다. 노르웨이도 4주 간의 아버지 육아휴직을 의무화하고 있고, 이탈리아에서는 10개월의 부모 육아휴직 기간 중 3개월 이상을 아버지가 사용하면 휴직기간을 한달 더 연장해주는 방식으로 남성 육아휴직을 장려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2006년 파파쿼터제 도입을 시도한 적이 있지만 성과는 미미했다.

국내에서 남성 육아휴직자는 여전히 낯선 존재다. 그나마 복지 여건이 좋은 공공 부문도 사정이 다르진 않다. 여성 공무원의 육아휴직 이용률이 27%(2009년 기준)인 반면 남성공무원은 1%대에 불과하다. ‘철밥통’으로 불리는 공무원들의 사정도 육아휴직 사용에 있어서는 일반 기업과 별 차이가 없다. 권성욱씨 역시 직장 내에서 남자로서는 ‘1호’ 육아휴직자다.

권씨가 휴직을 한다고 해서 대체 인력이 충원되진 않기 때문에 휴직서를 낼 때 적잖이 ‘눈칫밥’을 먹었단다. “동료들한테 많이 미안했죠. 윗분들도 이해는 하지만 꼭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는 반응이었고요. 하지만 제 의지가 워낙 확고했어요. 여자 동료들은 대부분 부러워했지만 남자 동료들은 ‘극성맞다’는 반응이었어요. 휴직이 결정된 후에는 오히려 남자 후배들이 더 관심을 보였는데 저를 시작으로 조금씩 인식이 바뀌면 좋겠어요.”



스웨덴의 남성 육아휴직 이용률 80%현행 제도에 따르면 2008년 1월 1일 이후 태어난 영·유아가 있는 근로자는 성별에 관계없이 육아휴직을 신청할 수 있다. 부부가 모두 직장에 다닐 경우엔 각각 1년씩 최대 2년까지 사용이 가능하다.

근로자의 육아휴직을 거부하는 사업주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게 되는 등 육아휴직 허용이 의무화돼 있다. 하지만 실제 육아휴직제도를 갖추고 있는 기업의 비율은 전체 기업의 40.8%에 불과하다. 나머지 기업은 영·유아 자녀를 둔 근로자를 위한 별도의 육아휴직 제도를 두고 있지 않았다.

대기업이라고 상황이 더 나은 것도 아니다. 대기업에 다니는 김정훈(가명·35)씨는 한때 육아휴직을 고려했지만 결국 포기했다. 먼저 육아휴직을 사용한 아내가 직장 복귀 후 받는 업무상의 불이익을 곁에서 봤기 때문이다. 김씨는 “여자 동료들의 육아휴직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상황에서 남자가 휴직계를 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라면서 “결국 집에 CCTV를 설치하고, 한 달에 120만원을 주면서 ‘이모님(베이비시터)’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

차명진 새누리당 의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819명(2010년 기준)의 남성 육아휴직자 가운데 재계 순위 30위 이내 대기업에 다니는 사람은 104명에 불과했다. 남성 육아휴직자가 10명 이상인 기업은 삼성·LG·롯데 등 3곳에 그쳤고 포스코와 GS는 남성 육아휴직자가 전무했다. 재계 순위 10위 안에 드는 나머지 기업들도 ‘아빠 휴직자’는 1~2명에 불과했다. 오히려 전체 남성 육아휴직자 가운데 절반 이상은 중소기업 근로자였다. ‘신의 직장’으로 불리는 공기업의 휴직자 수도 코레일 14명, 한국토지주택공사(LH) 5명을 제외하면 대부분 1명 안팎에 불과했다.

대기업에서는 극소수의 육아휴직자가 있더라도 그 존재에 대해서는 쉬쉬하는 분위기다. 한 대기업 인사과 관계자는 “남성 육아휴직 문화를 적극적으로 알리거나 권장할 순 없는 분위기”라면서 “중소기업보다는 인력 공급이 수월한 편이지만 그 비용이 만만치 않아 기업 입장에선 육아휴직을 두 손 들고 환영할 수만은 없다”고 말했다. 육아휴직 3개월 차에 접어든 양성민(가명·39)씨는 중소기업에 다니고 있다. 그는 요즘 아이가 자는 시간을 틈타서 창업 아이템을 알아보고 있다. 눈치를 보며 육아휴직은 겨우 했지만 복직 후 자리를 보전할 수 있을 지 걱정이기 때문이다.

양씨는 “복직 후 겪을 인사상 불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육아휴직급여가 나오는 시간을 일종의 ‘유예기간’으로 생각하며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창업도 함께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많은 기업이 육아휴직자의 공백 기간에 대체 인력을 쓰는 비용이 만만치 않고, 복직 후 적응이 힘들다는 점 등을 들어 육아휴직에 대한 난색을 표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육아휴직 경험이 있는 남성들은 “복직 후 업무상에 별다른 어려움을 겪은 적이 없다”고 말한다.



복직 후 애사심 더 높아져지난해 9월, 셋째를 낳은 후 최근 두 번째 육아휴직서를 낸 문성진(가명·41)씨는 2007년 6개월간의 육아휴직 후 업무 성과가 좋아 승진에 성공했다. 문씨는 “더 많은 기간을 일한 동료와 똑같은 평가기준을 적용한다는 이유로 승진 평가 회의에서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고 들었다”면서 “사측에서 육아휴직 전후 평가성적을 고려해준 덕에 승진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올해 2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 3개월간 휴직한 후 최근 복직한 장대군(36)씨는 “육아휴직 후 회사에 대한 충성도가 오히려 더 높아졌다”고 말했다. 장씨는 잦은 야근과 술자리 탓에 딸 아연(17개월)이가 자는 모습만 겨우 보는 ‘전형적인 아빠’였다. 그런 생활이 반복되던 어느 날, 아이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데 충격을 받아 육아휴직을 결심했다.

“휴직서를 내는 과정이 순탄치 않았어요. 휴직서가 한달 넘게 결재가 안됐거든요. 내내 마음을 졸이다가 아내가 복직하기 이틀 전에서야 휴직서가 수리됐어요. 끝끝내 허락을 못 받으면 지방에 계신 장모님을 불러야 하나 걱정하던 차였어요.”

어렵게 휴직 기회를 얻은 장씨는 “3개월의 육아휴직 경험이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고 말했다. 술과 담배도 끊었다. 장씨는 “가족의 소중함을 깨달은 만큼 회사에 대한 고마움도 커졌다”고 말했다. 가정에서 충실한 가장이 된 그는 복직 후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고 있다. 복직 보름 만에 그가 맡은 프로젝트만 4건에 달한다.

장씨는 “휴직서를 내기까지는 고민이 많았지만 평생에 한번뿐인 시기라고 생각하니 아이를 키우는 하루하루가 더없이 소중했다”면서 “양육이 엄마만의 몫이 아니듯 아이에게 엄마, 아빠의 역할이 모두 필요하단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복지 여건을 개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남성 휴직자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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