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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주와 반복 그리고 무제

변주와 반복 그리고 무제



길을 걷다가 옥외 대형 광고판에 그 어떤 광고 문구도 없이, 빈 침대를 찍은 흑백 사진이 걸려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총천연색 빛을 내뿜는 LED 광고들 사이에단출한 이미지의 이 광고를 보고 어떤 이는 잠시 멈춰 서서 갸우뚱할 수도 있겠고, 어떤 이는 무심코 지나칠 지도 모르겠다. 이 광고판은 숙박업소 광고도 아니고,침대 광고도 아니다. 미술 작품이다.

삼성 태평로 빌딩, 중앙일보사, 명동 신세계백화점 맞은편 중앙우체국 옆, 연세대학교 정문 앞 터널, 한강진역, 남이섬 노래박물관까지 여섯 곳에 자리한 이 빌보드 작품은 쿠바 작가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Felix Gonzales-Torres)의 것이다. 그렇다고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가 한국에 와서 직접 이 광고판을 설치한 것은 아니다.

작가는 이미 1996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제목조차 붙이지 않은 이 작품(‘무제’)은 작가보다 5년 먼저 사망한 그의 동성연인 로스 레이콕이 죽은 1991년에 처음 제작돼, 최근 뉴욕현대미술관(MoMA)의 전시 ‘프린트/아웃(Print/Out)’을 기해 맨해튼·브루클린·퀸즈 등에도 걸린 바 있다.

이번에 한국에서 그의 광고판을 설치하고, 동시에 개인전을 개최하는 곳은 삼성미술관 플라토다. 플라토는 MoMA를 비롯한 세계 유수의 미술관과 개인 소장가로부터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의 작품 44점을 가져왔다. 9월 28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는 아시아에서 열리는 그의 첫 개인전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깊다.

전시 제목‘Double’은 쌍·이중·변주·표리·주름·역주행·함정·반복·분신 등의 사전적 의미를 모두 아우를 만큼 여러 가지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의 작품에서 시각적으로 가장 두드러진 특성은 같은 물체를 ‘쌍’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침대 위두 개의베개, 한 쌍의 고양이 등이다..



서울 시내 곳곳에 광고판 작품 설치특히 똑같이 생긴 원형시계로 이루어진 ‘무제(완벽한 연인들)’는 제목이 시사하듯 사랑하는 커플에 대한 작품이다. 그런데 실제로 전시장에 걸린 두 시계는 초침이 조금 다르다. 설치 당시 동시에 전지를 넣어 분명히 같은 시간을 반영하도록 설정했지만, 기계적인 차이로 인해 서서히 어긋나기 시작해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지고 결국한 시계는 먼저 멈추게 될 것이다.

1957년 쿠바에서 태어난 곤잘레스-토레스는 스페인과 푸에르토리코 등지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고,사춘기에 자신의 성 정체성을 깨달았다. 스무 살이 좀 넘은 1979년 뉴욕으로 이주한 그는 당시 전 세계를 패닉으로 몰아넣었던 에이즈의 재앙을 직접 목격하게 됐다.

실제로 곤잘레스-토레스는 연인 로스 레이콕이 에이즈로 죽어 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고, 그 자신 또한 시한부 인생을 살면서 죽음에 대한 공포와 함께 영원히 지속할 수 있는 예술을 갈망했다. 시계·거울·전구·인쇄물 등 작가가 주로 사용했던 재료들 대부분에서 한시적인 속성이 강하게 드러나는 이유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쿠바 출신의 유색인종이자 동성애자로 삶 자체가 ‘비주류’인 사회적 소수자였지만, 영리한 작가는 다문화 담론이 논의되던 학계를 중심으로 미술계의 주류 시스템을 역이용했다. 500kg에 육박하는 사탕을 바닥에 사각형 모양으로 촘촘히 펼쳐 놓은 ‘무제(플라시보)’는 처음에는 미니멀한 조각 작품과 비슷해 보인다. 관객들은 이사탕을 집어 먹을 수 있다.

전시 기간이 지날수록, 맨 처음의 사각형 경계가 흐릿해지며 무정형화된다. 비슷한 맥락에서 인쇄물을 쌓아 올린 작품 역시 점차처음의 기념비적 형태를 잃게 된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작품이 훼손되도록 방치함으로써 예술의 본질에 대한 저항적 발언을 한 것이다. 작품의 감상과 훼손, 변형과 영속, 복제와 탄생 등의 아이러니 속에서 작가는 미술사에 나오는 작품에 대해 혁명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최근에 활동하는 많은 미술가가 ‘가장 좋아하는 미술가’로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를 꼽는다. 그 이유는 바로 예술에 대한 변혁적 태도를 기반으로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시적인 은유와 정치적 발언을 동일선상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인간 본연의 따뜻함과 유머러스함도 놓치지 않았다.

백인남성 중심으로 돌아가는 미국 주류 사회에서 칭송받는 정치가·카우보이·과학자·군인 등을 가리키는 사진 작품‘무제(자연사박물관)’ 앞에 하늘색 단상의 가장자리에 전구를 설치한 플랫폼을 두고 그 위에서 은색 수영복을 입은 고고 댄서가 춤을 추도록 병치시켰다. (이번 플라토 전시에서도 한국 고고 보이가 하루에 5분씩 춤을 춘다.)



유색인종이자 동성애자로서 비주류의 삶사실 그가 1988년 첫 개인전을 개최하고서 본격적인 작가 활동은 펼친 것은 불과 10년 남짓이다. 그러나 죽은 지 16년이 지난 지금까지 총 60회에 가까운 개인전과 700회가 넘는 그룹전에 참여했다. 심지어 2007년 베니스비엔날레에 미국관 단독 대표로 선정되고, 2011년 이스탄불비엔날레에서는 전시 전체 주제가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의 작품일 정도로 작가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다. 비록 그는 이 세상에 없지만, 그의 작품은 우리와 함께, 우리의 주변에서 영원히 살아 숨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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